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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fent Garden Home>정원예술문화>장태현 스케치기행_작품세계>

 

작성일 : 2011.07.29

 

조회 : 3217



동서문화교류의 길목

사진으로나 아름다운 명사산

돈황시내에서 남쪽으로 4㎞ 달리면 모래로만 이루어진 명사산鳴沙山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막고굴이 있는 뒷산과 같은 줄기로서 동서 40㎞, 남북 20㎞나 뻗어 있는 고운 모래산이다. 말이 해발 1650m이지 이 지역 일대가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주변 산 밑과는 100여미터 정도 밖에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곳 탐방객을 위한 관광상품으로 낙타등에 올라타 1㎞정도 서투른 대상행세를 하며 월아천月牙泉에 이르니 이미 다른 여행객들도 산 중턱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곳 풍습으로는 정초에 산위에 올라 모래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면 일년 액땜을 한다 하는데 마치 눈썰매를 타는 모습들이었다. 주변이 모래산이라 소리의 반사가 없어서인지 혹은 뜨거운 열 때문이었는지 주변은 이상하리만치 적막이 감돌고 있었고 표현 못할 공포감에 휩싸이게 된다. 가끔 바람이 불 때 모래가 무너져 내려 총소리와 같은 강한 소리가 울리게 되는데 이를 두고 명사산이라 이름 붙이게 되었다한다.
낙타 대기소에서 걷기 힘들 정도의 뜨거운 모래를 밟으며 둔덕에 올라서니 이름 그대로 초생달과 같은 오아시스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오랜 세월 신기하게도 모래의 이동에 매몰되지 않고 호수의 윤곽을 유지하고 있었고 크지 않은 호수 주변에는 수초들이 자라고 있으나 남쪽 언덕에는 고목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전 사전에 기억하고 있던 장소에는 최근에 준공된 듯한 불사탑이 위 그림과 같이 외롭게 세워져 있었다. 호수의 동서길이는 224m, 가장 넓은 곳의 폭이 39m라 한다.
생각보다 물은 깨끗한 편이었고 깊이는 약 2m 내외로서 관광객을 위한 뱃놀이 시설만 없었다면 국민학교 때 배웠던 자연 신비의 멋 그대로였다. 아름다운 구도構圖의 사진을 담으려 이곳저곳 헤매어보았으나,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하지 숨이 턱에 찬 상태에서는 만사가 귀찮아 석양의 명사산이 아름답다는 이유를 알만하였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부드러운 모래능선의 연속으로 환상적인 경관대상이었으나 너무도 황량하고 뜨거운 현장에서 빨리 헤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동물은 고사하고 지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뿐이니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의 정서로 우리의 금수강산을 대한다면 과연 어떠한 반응이 있을지 새삼 궁금하여지기도 한다.

여하튼 이들이 사는 이곳에서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예술가가 태어나지 못했었고 그것을 기대하기 보다는 오히려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연 적응방법과 서로 다른 문화교류의 거래는 능히 발달하였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이곳의 어린이들에겐 미술시간이 있을까하는 의문과 개울물을 까맣게 그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탄광촌 어린이들과 같이 이들 어린이의 자연풍경은 어떻게 표현될지 두서없는 생각들만 오락가락하는 참으로 별난 자연경험이었다.


오늘의 생활을 이어가는 후예들

이곳 사람들은 기온이 떨어진 아침저녁을 주 활동시간으로 생활하는 듯 아침 일찍 나귀수레에 농산물을 싣고 시장으로 나가거나 가까운 농토에서는 저녁 늦게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12만 인구 중 9만명이 농업 인구로서 주로 밀, 옥수수, 목화 등을 주업으로 하고 최근에는 석유, 철, 동 등의 지하자원을 주요 산물로 생산하고 있다 한다.

일반 서민층의 주택은 회교도 습관이기도 하겠지만 이곳 건조지대에 적응하기 위한 구조로 중원(中原)의 폐쇄적인 한족 거주와는 사뭇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강수량이 년 40m/m정도이므로 지붕물매는 마당 가운데로 흘러내리도록 경사지었으며 알량한 빗물을 모으기 위한 홈통Drain설치는 필수적인 시설이었다‘. ㄷ’자 형태의 건축물 배치는 한마당을 중심으로 퍽 공개적인 출입을 하고 있었으며 건물 추녀 끝에는 발로 엮은 차양이 걸쳐져 있거나 포도넝쿨로 등책을 이루고 있었다.
연립주택 형식의 반복된 건물 배치는 외부의 뜨거운 열을 전달할 벽체의 면적을 줄인듯 하였고, 건축재료는 주로 진흙 벽돌과 백양나무의 활용도가 높았다.

사막에서의 물은 생명의 젖줄로서, 혼탁한 농업용수나 도시내로 관통되는 수로시설은 다른 도시기반시설에 비해 철저하게 관리하는 듯 하였다.
결국 삶의 터전이란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자연기후와 어떻게 타협하고 적응하여 가는가의 지혜로서, 그들은 32,000㎢의 오아시스를 자연에 빼앗기지 않고 오늘까지 확보하여 오고 있는 것이었다.
오후 늦게는 시내 중심가의 밤시장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표준 시간이 북경시간으로 통일되어 있어 방대한 대륙의 동·서쪽 끝의 시간차이는 실제 5시간으로서 오후 8시가 지났어도 쉽게 해가 질 것 같지 않았다.
불야성을 이룬 개인 골동품 리어카를 기웃거리며 지난 시대의 생활유품들을 들춰보는 것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별다른 즐거움이 있고, 비록 모조품이지만 당시의 용감했던 유목생활과 활동적이었던 상인들의 흔적을 놓고서 흥정을 하여 보는 것도 낚시의 즐거움과 같은 짜릿한 흥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한편 마음구석으로는 이렇게까지 조상들의 유물을 거리낌없이 내놓는 그들에게 일종의 연민의 정과 함께 소수민족의 문화를 소홀히 취급하려는 한족들에게 의문점을 갖게 된다.

옛날과 같은 교역대상물이 없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생활유품들을 쉽게 공개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까? 중원땅의 한족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유적을 현재의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경지에까지 부각시켜 놓았으면서도 이곳 소수민족 민속박물관의 전시내용이나 삶의 흔적은 그렇게 허술할 수가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한漢족들의 문화와 유적은 금과 옥조로 아끼면서 주변국들의 문화는 최소한도의 조처도 외면하고 억제하고 있음을 고구려, 발해 유적지에서도 보았고 지금 이곳에서도 다시 한번 보고 있는 것이다.
더욱 의아스러운 것은‘중화中華’라는 환상에서 아직도 주변 국가에 대하여 대국임을 자처하면서도 그 도량은 이 정도로 옹졸함을 보여주고, 해당 소수민족 스스로가 그들의 문화를 포기하도록 유도, 통제하고 있음에 그들은 과연 “떼국인”이었다.
늦은 시간 호텔로 돌아왔으나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무척 건조한 밤에 열린 창을 통해서 모래가 날아들고 있었다.

그 동안의 역사교육과 지정학적 여건으로 보아 당연히 우리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중국의 역할과 문화란 결국 여러 민족들과의 오랜 접촉 현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리의 뿌리일부를 중국에서 새삼 발견하였을 때에는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싶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행이 이러한 지적知的욕구를 해소하기 위할 때에는 더욱 교육적 효과가 큰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이렇게 마음이 즐겁지 않은 것은 피곤한 일정과 견디기 힘든 기후조건만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옛날에 이곳을 오갔던 무수한 문화교류자의 고통을 더듬어 본 바에야 다시 한번 내일의 일정과 언제인가 다시 찾을 준비를 서둘러야 하겠다.

장태현의 <길따라 터를 찾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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