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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03.19

 

조회 : 2449



낡은 기억들



글 _ 장기오



어느 봄날,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단발머리 여학생 둘이 나를 찾아왔다면서, 어머니가 내 등짝을 후려치시며 야단을 쳤다,
“이놈의 소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가시나들이나 후리고 다니는겨?”
나는 어느 시러베 같은 년들이 수채 냄새가 코를 찌르는 이 판잣집엘 찾아왔겠느냐며 시큰둥해 했다. 당시는 남녀교제가 자유롭지 못한 시절이라, 여학생이 남학생의 집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그 자체로도 얌전하지 못하다는 증거였기에 참,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가 보았다.
어라, 나가보니 진짜로 생면부지의 여학생 둘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어떻게 알기에,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느냐고 물으니 그녀들은 어디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학교 교지를 맡아 편집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들이 교지에 실린 나의 시(詩)를 보고서 찾아왔다는 것이다. 내 작품을 보고 찾아왔다는데 나로서는 기분 나쁠 것이 없었다. 황급히 나오느라 나는 맨몸으로 나왔고, 또 설사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나왔다 하더라도 돈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는 처지였으므로 그녀들이 사주는 국화빵을 정신없이 주워 먹으면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요지인 즉, 그녀들은 K여고 문예반 멤버들인데, 우리 학교하고 문예 서클을 하나 만드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한창 이성에 눈뜰 무렵인데 미모 역시 둘 다 빠지지 않았으며, 이 도시에서도 명문여고 학생들인지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 이튿날부터 공작에 착수했다. 그런데 우리 학교 문예반장이라는 친구가 난색을 표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학생들이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 사먹는 것도 징계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하물며 여학생들과 어울려 빵집을 들락거렸다가는 영락없이 정학(停學)처분을 받을 것임이 명약관화했다, 소문은 학교 안에 쫙 퍼졌고, 문예반과 관계없는 놈들까지도 침을 흘리면서 내 곁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기다 빵값을 대겠다는 놈까지도 부지기수였다. 에라, 모르겠다. 한번 시도나 해보자고 결심을 하고는 학교 허락도 없이, 나는 그녀들에게 연락을 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둘 중 주동자로 지목되는 여학생 집앞에서 나는 내 이름을 있는 대로 외쳐댔다. 그러자 눈치가 빤한 그녀가 살며시 대문을 열고 나왔고, 우리는 어두운 골목에서 이러쿵 저러쿵 모의를 했다. 그때 나는 혼자 가기가 멋쩍어 친구 A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가 나중에 소용돌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문예 서클이 아닌 두 학교 학생간의 교제 서클로 변질된 첫 모임이 시작되었다.
봄날이 가고 막 초여름이 시작되는 어느 날, 우리는 어느 으쓱한 골목길 만두집에서 만났다. 남녀 합쳐 여덟 명 정도였던 것 같다. 문학과 관계 없는 놈들이었으니 화제 역시 겉돌고 있었지만, 그녀들 역시 굳이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그들 중 B가 그 중 예쁘게 생긴 주동 여학생에게 주는 눈빛이 수상쩍었다, 그 첫번째 미팅에서 우리는 교외 지도교사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곧바로 학교로 통보가 되고, 나는 교무실로 불려갔다. 나는 들킬 때 내 명찰을 보여주면서 내가 다 책임질 거라고 했기 때문에 나 혼자서만 교무실로 불려갔고, 나는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의 이름은 끝까지 대지 않았다. 나는 단지 문예 서클을 위한 예비 모임으로, 문예반장에게도 이 사실을 의논했는데 문예반장이 거절을 해서 더는 그 모임을 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하러 나갔다고 주장하면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항변을 했다. 문예반장의 증언도 있고 해서, 그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면서 모임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나를 따라 ‘여학생의 집을 같이 방문한 친구 A’와 ‘첫 미팅에서 반해 버린 녀석 B’가 예쁘장하게 생긴 주동 여학생을 놓고 붙어 버린 것이다. 그 여학생은 두 사람 중에서 A를 상대적으로 좋아하는 거 같았다. 그러나 진실로 그녀가 좋아하는 녀석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엉뚱한 사람을 좋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녀석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심사였던 것 같았다.
이것이 두 녀석의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 다, 그 여학생이 자기를 더 좋아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B는 친한 친구들을 불러모아 자기의 고민을 의논했고, 의리에 가득찬 친구들은 A를 불러 그 여학생에게 손을 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A 역시, 그들이 그런 공갈을 친다고 ‘그러마’하고 선뜻 물러설 만큼 배알이 없는 놈이 아니었던 만큼, 당연히 그럴 수 없다고 거절을 했다. 사실 A는 친구들 의리까지 상해가면서 그 여학생을 좋아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의외로 상대가 세게 나오니까 나도 그럼 물러설 수 없다고 버틴 것이다. 그렇게 패가 갈리고 말았다.
당시 B는 약간 주먹기질이 있는 그룹에 속해 있었는데, 그 그룹 친구들이 말하자면, 손을 봐야겠다고 별렀다. 여학생 하나를 두고 학교에서 싸움이 붙어 버린 것이다. A 역시, 야구를 했던 친구랑 만만치가 않았다.
그해 어느 가을날, 학교 앞 독서실에서 패싸움이 붙은 것이다.
몇 합의 주먹질이 오가면서 불량 기질이 있는 B팀에게 판세가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런데 화제의 주인공인 A에게는 절친한 친구, C가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딴 일을 하고 있다가 뒤늦게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주먹과는 거리가 먼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엎어져 몰매를 맞고 있는 A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던져 A를 껴안고는 A에게 오는 발길질을 고스란히 혼자서 감당했다. 이 싸움의 결과는 C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 소문은 K여고에까지 번졌다. 싸움을 건 B는 주먹질이나 하는 불량학생으로 낙인 찍혔고, A는 온몸으로 사랑을 지킨, 의리 있는 사나이로, 그리고 친구를 대신해 몰매를 맞은 C는 여학생들의 우상이 되었다. B의 KO패였다.
그렇게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황야의 결투를 신청한 B는 그 이후로도 그 여학생의 동정을 얻지 못하고 낙마를 했고, A는 간간히 그 여학생을 만나기는 한 모양인데, 그녀가 그가 아닌 다른 학생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안 후부터는 시들해지고 말았다. 그 여학생이 좋아하는 남학생 역시, 친구들끼리 벌이는 유치한 사랑의 게임에 뛰어들기 싫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그 여학생의 의도대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우리들에게 화재가 되었다, 50이 넘어서도 그 화제만으로 밤을 지새운 일이 허다했다. 과연 ‘그녀가 좋아했던 인물은 누구였을까?’가 핵심이었다. 누구였는지는 아직까지도 설이 분분하다.

그렇게 한때의 우상이었던 C는 그 이후로도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화제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보다 친구들을 더 배려했다. 염치가 없든, 형편이 안되든 간에 그는 모른척, 친구들의 빵값을 대고 술값을 댔다. 기약 없이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는 명문대에 들어갔지만, 동숭동 술집을 돌아다니며 등록금을 술값으로 다 탕진했다. 당시에 그를 만나려면 동숭동 술집 골목을 서너 집만 뒤지면 불쾌한 얼굴로 술청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는 술 마시고, 기타치고, 노래하는 등 잡기(雜技)에 한 일 년쯤 정신이 없더니, 어느 날부턴가 더는 동숭동 술집에서 그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다. 세상을 향해, 그 쪼잔하고 천편일률적인 제도권 공부 따위는 안해도 얼마든지 자신 있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런 자신감은 주변에서도 한 몫을 했다. ‘너는 천재니까 할 수 있다.’는 신호를 주위에서 끊임없이 보낸 것이었다. 그도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 <25시>, 라스트 신에서의 안소니 퀸의 웃음을 기억하는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 부조리한 표정을.
그는 그런 불가해한 표정을 흘리면서 실패한 숫자만큼 술집을 들락거리는 횟수가 잦아졌고, 결국은 알코올 중도자가 되고 말았다.
평생 직장도 없이 떠돌면서 아무런 뜻도 이루지 못한 채, 그는 도심의 길손이 되어 홀로 적막하게 술만 마시다, 차가운 겨울날 떠났다.
머리를 술이고 공원 벤치에 앉아 오래오래 사색하다가 그렇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나 버렸다.
부질없지 않은가? 그가 비록 우리가 알고 잇는 것보다 더 큰 원대한 꿈을 꾸었다 한들, 이미 그가 없어진 다음에 사람들 사이에 회자(膾炙)된다 해도 그 얼마이겠는가? 그 꿈을 위해 외로움을 참고 견디며 한 번뿐인 삶을 통째로 바친 그가, 저승에서 뉘우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가 떠나자 비로소 우리들은 알았다. 우리 모두가 그를 사랑한 줄 알았는데, 우리가 사랑한 건 그가 아니라 항상 그의 곁을 맴돌던 바람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만나면, 아직도 공원 벤치에서 외롭게 죽어간 그 친구와 독서실에서의 그 치기 어린 결투, ‘그 여학생이 좋아한 학생’이 우리 중에 누구였는가로 왈가불가하면서 곧잘 밤을 지새운다.

우리들의 이야기에는 낡은 필름처럼 무수한 스크래치(scratch)가 별처럼 반짝이고, 주룩주룩 우울한 비가 내린다.
그는 그렇게 가고, 우리는 이렇게 욕되게 남았다.

수필집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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