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생태문화]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광장, 7월9일대로

남미생태문화 탐방, 세상에 없는 경험, 우연히 발견한 즐거움 - 12
라펜트l박미옥 교수l기사입력2017-02-09
Human Nature & Culture 남미생태문화 탐방기
세상에 없는 경험, 우연히 발견한 즐거움 - 12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광장, 7월9일대로




글·사진_박미옥 오피니언리더

나사렛대학교 교수




5월 광장 위치


5월 광장 Plaza de Mayo

월드컵 응원이나 기념 행사, 집회 및 촛불시위, 기타 비중 있는 행사가 자주 열리고 있는 광화문광장이나 시청광장은 단순한 모임 장소를 넘어 우리에게 많은 상징적 의미를 준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신적 중심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5월 광장’을 기억해본다. 우리 일행이 5월 광장을 방문했던 약 한달 뒤인 2016년 8월 12일,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5월 광장 어머니회’에 의해 30여년을 이어 온 2천번째 목요일 행진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주요 사건으로는 해방과 정부수립, 전쟁과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어려울 때마다 우리 민족은 마음과 지혜를 모았고 개인보다 국가와 민족을 먼저 사랑했던 저력을 보여주곤 하였다. 1945년 해방 이전에도 우리나라는 국내에서 그리고 이국의 낯선 땅에서 곳곳에 모여 자주국가임을 그리고 자주민임을 선언하곤 하였다.

스페인의 페르디난도 7세가 나폴레옹에 의해 쫓겨나면서, 1810년 5월 25일 아르헨티나에서는 1차의회(1st Government Junta)를 조직하여 스페인 식민국가 아르헨티나 국왕이었던 리오 데 라플라타 부왕의 퇴위와 자치정부 수립을 선언한다. 이 역사적 사건을 ‘5월 혁명’이라 부른다. 이후 1814년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남미의 독립 영웅 호세 데 산 마르틴의 지휘로 점차 독립이 현실화되어, 마침내 1816년 7월 9일 투쿠만(Tucuman) 의회 소집으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다. 


해방과 민주화의 성지, 5월광장 전경. 가운데 흰색 ‘5월의 피라밋’, 뒤로 분홍빛 대통령궁

이렇게 7월 9일 독립을 위한 출발이 되었던 1810년 5월의 그 날, 그들이 모였던 그 곳은 지금 ‘5월 광장’으로 불리며 이후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이 곳에서 그들의 마음을 모으곤 하였다. 특히 군부독재가 절정에 이르던 7-80년대 민주화 투쟁의 근거이며 특히 독재정권에 희생된 자식을 찾는 어머니들의 한이 깃든 광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경험했던 바와 같이 아르헨티나 역시 식민지 시대와 아울러 민주화되기 이전에 군부독재의 아픔을 겪었고 많은 희생자로 인해 지금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특히 1976~83년 군부독재 통치기, 무려 3만여 명이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몰려 희생되었고 그들은 이를 ‘더러운 전쟁’이라 부른다. 독재자 비델라는 반정부 인사들 가운데 임신한 여성들에게 족쇄를 채운 채 출산하게 하였고, 출산 뒤 여성들은 군용기에 실어 바다에 산 채로 던져 살해하고, 아이들은 친정부 인사들에게 입양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살벌한 군부독재 치하 계엄령 아래 모두가 침묵할 때, 자녀와 손자·손녀를 잃은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5월 광장의 어머니회(Asociación Madres de Plaza de Mayo)’는 정부의 탄압 속에도 군부독재에 정면으로 맞선 유일한 모임이었다. 오늘도 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상징으로 아르헨티나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5월 광장에 그려진 어머니들의 하얀 숄.

38년 째 매주 목요일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모여 저항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와 레온 히에코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 흘리는 곳, 아직도 아픈 가슴으로 남아있는 30년전 포클랜드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곳. 그들의 마음은 ‘산 채로 나타나라(내 자식을 살려내라)’는 플래카드에 담겨져 있다. 그리고 지난 여름, 2천번째 행진이 이루어졌다. 특히 하얀 솔은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아기의 배냇옷을 이용하였으며 처음에는 단순한 흰 두건이었다가 점차 아이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기 시작하였다.

아르헨티나 근대화의 격동기를 온몸에 담고 있는 5월 광장에서는 어쩌면 우리의 아픔과 경험을 나누는 듯 지금도 그날의 상징들이 여전히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5월 광장은 1536년 페드로 데 멘도사에 의해 조성되었다가 1541년 폐허가 된 후 1580년 6월 재건되었다. 방어목적인 ‘요새광장(Plaza de Fuerte)을 거쳐 영국군 침략을 격퇴한 1807년부터 승리광장(Plaza de Victoria)으로 불리다가 독립선언 이후 5월 광장 명명되었다. 서양문화에서 광장은 도시의 중심이며 상징적 의미를 지닌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자주 등장한다. 5월광장 역시 아르헨티나의 격동기를 몸소 겪고 있는 그들의 상징적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5월 광장의 함성을 ...


5월 광장 전경


 5월광장의 장식화단


5월 광장에는...


대통령궁 '분홍빛 저택 (Casa Rosada)'

분홍색 대통령궁. 정면 왼쪽 2층 발코니가 에비타(에바페론)가 10만 군중을 향해 연설하며 손을 흔들던 곳

아르헨티나 정치 경제의 중심인 5월 광장에는 대통령궁, 대성당, 5월의 피라밋, 중앙은행 등이 있다. 5월 광장 동쪽 끝 커다란 분홍빛 건물이 대통령 궁이다. 스페인의 로코코 양식의 이 건물은 1873년부터 1894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원래는 외부로부터의 침략군을 막기 위한 요새로 건설되었으며 원 건물에 우체국과 성채를 보강하였다. 1873년 착공 당시부터 분홍색으로 칠한 이후 ‘카사로사다(분홍빛저택)’으로 불리며, 속설에 의하면 분홍색은 붉은색(자유당)과 하얀색(연합당)의 단합을 상징한다는 설이 있다.

대통령궁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는 이곳 2층 광장방향 발코니에서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에비타(에바페론)가 10만 군중을 향해 연설하며 손을 흔들던 곳이다. 그리고 에비타의 남편 페론 대통령과 독재자를 포함한 역대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이 이곳에서 연설을 하였다.

또한 대통령궁 앞에는 아르헨티나 독립영웅이며 아르헨티나 국기의 창안자로 알려진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의 기마상이 있다. 이 앞에서는 매일 대통령 관저의 위병교대식이 이루어진다.  

5월 광장 한가운데 흰 색으로 솟아있는 ‘5월의 피라밋(Piramide de Myao)’은 1810년 5월 25일, 5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높이가 18.76m에 달한다. 현재 남아있는 탑은 1911년도에 다시 건립했으며 탑신에는 “1810년 5월 25일(25 MAYO 1810)”이 새겨져 있고, 탑 속에는 아르헨티나 전국에서 수집한 흙이 들어 있다고 한다.


5월의 피라밋


대통령궁 앞에 우뚝선 아르헨티나 독립영웅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의 기마상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Catedral Metropolitana)


5월 광장 건너 편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대통령궁 바로 옆, 5월 광장 북쪽에는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네오클래식 양식의 장엄한 부에노스아이레스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은 그리스 신전 모양을 띠고 있으며 12사도를 상징하는 12개의 코린트 양식의 열주가 받치고 있다. 성당이라기보다는 마치 박물관이나 미술관과 같은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이 성당은 ‘알레한드로 부스티요가’가 설계했다고 하며, 18세기 중반부터 시작하여 50여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27년에 완공되었다. 프란치스코 1세가 교황이 되기 전 추기경으로 머물렀던 성당으로서 내부에는 18세기의 귀중한 성상들과 제단화 뿐만 아니라 네오르네상스 및 네오바로크양식의 장식물들로 가득하다.

또한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아르헨티나와 칠레, 페루를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킨 남미의 독립영웅 산마르틴(Jose de San Martin) 장군의 무덤이 있다. 1880년 프랑스에 있던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의 시신이 아르헨티나로 와서 대성당 오른쪽 통로와 연결된 자리에 마련한 무덤에 이장되었다. 대성당 벽에는 산마르틴 장군을 기리기 위해 횃불을 밝히고 있다. 



성당입구 교황 프란치스코 1세 초상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성당 내부 통로와 화려한 장식


성당의 십자가 예수상과 사도상

5월 광장에서 그 외 눈여겨 볼 건물은 까빌도, 중앙은행 등이 있다. 언뜻 성당처럼 보이는 흰색 건물인 까빌도(Cabildo)는 스페인 식민 시절 총독부 건물로서 1608년 이래 여러 차례 증축되면서 탑이 있는 2층 구조의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2층은 5월 혁명 박물관으로 사용되어 식민시대 가구와 역사적 전시물들이 갖추어져 있다. 민족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식민 통치의 상징인 구 총독부 건물을 한동안 주요 기관으로 사용하다가 결국 철거했던 우리와 그들의 차이는 민족의식과 식민통치 방식의 차이,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적 성숙도에서 오는 것이리라. 


식민시대 총독부 건물, 까빌도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4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받치고 있다.


5월 광장의 스페인 건물들


7월9일 대로 (Avenida 9 de Julio)

위성영상으로 본 7월9일 대로와 5월 광장

경복궁 정문 광화문 앞의 ‘광화문대로’는 조선시대 육조거리로서 주변에 의정부, 이조, 환성부, 호조, 기로소, 예조, 사헌부, 병조, 형조 등이 배치되어 있던 중심적 상징거리이다. 현재도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한 세종문화회관 등 주요 국가 공공기관들이 자리잡고 있는 중심가로이다. 우리의 광화문대로와 같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7월9일 대로’는 아르헨티나 독립과 번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1810년 5월 25일 5월 혁명으로 시작되어 1816년 7월 9일 뚜꾸만 의회 선언으로 마침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다. 이날을 기념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폭 144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대로를 7월 9일 대로라 부른다. 1887년에 설계 조성되었으며 주변의 건물들을 철거한 대규모 토목공사로서 지금은 중앙 버스전용차로와 보행로 등이 설치되어 있지만 여전히 엄청난 폭을 자랑하고 있다. 거리 남쪽 Constitucion 역 북쪽에 있는 Retiro 지역에서 리오 데 라 플라타 해안의 서쪽으로 이어지며, 가로 중심에는 레퍼블리카(republica) 광장과 오벨리스크가 건립되어있다. 오벨리스크는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400주년 기념으로 세워졌으며 높이 67.5m에 이른다. 콘크리트와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에서 생산된 흰색 돌을 사용해서 초고속으로 진행되어 31일 만에 건립되었는데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이 빗발쳤으나 지금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이 되었다. 


1937년의 레퍼블리카 광장과 오벨리스크 (자료: wikipedia)


7월9일 대로 레퍼블리카 광장 오벨리스크. 옆의 건물에 그려진 에비타의 얼굴


여인의 다리 (Puente de La Mujer)
기능적으로 다리는 차량이나 보행자의 통행을 위한 수단이면서 아름다움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과 상징성을 높이는 수단이기도 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또 다른 명물, 2001년 개장한 여인의 다리는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했으며 원래 빅토리아섬에 있던 것을 5개월의 작업 끝에 이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두사람이 탱고를 춤추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인의 다리

글·사진 _ 박미옥 교수  ·  나사렛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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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flower@kor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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