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날은 고향이 보고 싶다

장기오 수필집_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라펜트l장기오l기사입력2013-01-15


고향의 겨울은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영일만에서 시작된 바람은 형산강의 모래를 밤새 실어 날라 아침에 일어나면 마루는 온통 모래 천지였고,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모래는 입안까지 서걱거리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루를 쓸어도 쌓이는 모래 먼지는 줄지 않을 뿐 아니라, 볕이 좋은 날에도 모래 먼지가 햇빛을 가려 마을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좁은 골목길에 돌개바람이라도 한 차례 불면, 우물가에 있던 세숫대야며 그릇들이 내동댕이쳐졌고, 길가의 종이부스러기들을 하늘로 말아 올렸다.

 

대낮에도 사람들은 문을 닫아걸고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아 거리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지만, 잠깐 바람이 자고 볕이 좋을라 치면 어른들에게 아랫목을 빼앗긴 아이들만이 영양실조에 걸린 누런 얼굴로 담벼락에 옹기종기 해바라기를 하면서 추운 겨울을 보냈다.

 

몇 안되는 동네 구멍가게들은 허연 먼지를 뒤집어쓴 유령의 집처럼 음산했고, 가게 주인 역시, 겨울 내내 안방에서 화투장을 끌어안고 막걸리내기를 하거나, 종일 낮잠으로 보냈다. 그래도 활기가 있는 쪽은 장터거리의 주막집과 다방들이었다. 동네 한량들은 선술집에 죽치고 앉아 술추렴을 하기도 했고, 새로 온 다방 레지를 꼬시려고 종일을 커피에, 쌍화차에, 위티(위스키 티-도라지 위스키 한 잔과 홍차 한 잔)를 시켜가며 눈맞춤을 하는 바람둥이도 있었다.

 

포항까지 하루에 두 번 가는 시외버스가 있긴 했지만, 목욕탕이 없는 동네라 목욕하러 나가는 사람과 바람둥이 총각들과 눈 맞은 처녀들이 바람피우러 나가는 것 이외에는 승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외지로 나가는 버스에 누가 타고, 누가 들어오는 지를 면밀히 관찰하면, 누가 누구와 연애를 한다든지, 어떤 다방 레지가 누구와 바람이 났다든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런 소식들은 손바닥만한 동네라 삽시간에 소문이 났고, 그러면 며칠은 좋이 시끄러웠다.

 

사내들은 사내대로, 아낙네들은 아낙네대로, 바람 부는 고샅길을 오가며 부지런히 수다를 떨 즈음, 바람난 레지는 야반도주를 하고, 연애하던 처녀는 부모에게 머리채가 잡히기도 하고, 때로는 머리까지 깎인 채, 골방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곳이 비록 고향이긴 했지만,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기만 했을 뿐, 아주 어릴 때 대구로 나왔기 때문에 타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어렵사리 가계를 꾸려가다 형님이 교편을 잡으면서 조금은 숨통이 트였지만,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하는 초등학교 접장 생활로 인해 기억에도 없는 그곳, 안태 고향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1년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의 봉급으로 다섯식구를 먹여 살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형님은 낙향하면서우리 형편에 두 집 살림은 곤란하니 공부를 계속하고 싶으면, 그곳 학교로 전학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니가 알아서 해라.’면서 매정하게 식솔들을 이끌고 떠나 버렸다. 혼자 대구에 남은 나는 한 학기도 버티지 못하고 기약없는 휴학을 하고 뒤따라 내려가고 말았다.

 

워낙 굶기를 밥 먹듯 했던 대구에서의 생활에 질려, 하루 세 끼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곳 생활 역시, 희망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구호문자로 나온 옥수수 가루로 죽을 끓여먹고, 단칸방에서 온 식구들이 이불 하나에 발만 덮고 지냈으며, 머리맡에 놓여 있던 물그릇이 땡땡 얼 정도로 외풍이 세서 방에 앉아 있어도 코끝이 시렸다. 방구들은 엉덩이가 데일 정도로 절절 끓어도, 아무렇게나 지은 흙벽 집은 귀가 시릴 정도로 형산강의 세찬바람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참으로 우울한 나날이었다.

 

잔뜩 웅크린 채, 문 밖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몽롱한 잠 속으로 빠져드는 것밖엔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런 저녁에 바람을 뚫고 형산강 가로 나가, 얼굴을 때리는 모래도 마다하지 않고, 거센 바람을 마주하고 있으면 종일 몽롱하던 두통이 바람에 날아간 듯 상쾌해지기도 했다.

 

나는 바람 부는 강가를 미 친 듯이 소리소리 지르며 숨이 차서 달리지 못할 때까지 달리다가 모래밭에 쓰러져, 바람에 몰려가는 하늘을 보면서 억눌렸던 것들을 조금씩 풀어냈다. 그 강가에는 고목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유난히 바람이 많은 동네라 아이들이 연을 많이 날리기 때문에, 그 고목나무에는 항상 연이 한두 개 정도는 찢어진 몸체를 바람에 내맡기고 펄럭이고 있었다.

 

그 연은 꼭 나와 같았다.

 

끈 떨어진 연. 지상과의 아무런 연계도 없이 홀로 버려진 그 연은 막막하고 불안한 내 미래와도 같았다.

 

석양을 받고 실루엣으로 서 있는 그 고목나무는 아직도 나의 꿈속에 자주 등장한다. 깊이를 알 수 없이 흐르는 형산강의 도도한 흐름과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고샅길, 해바라기하는 아이들의 누런 얼굴, 형상강의 모래밭에 뛰어든 그 절망의 시간들이 깊은 밤, 나의 잠을 깨운다.

 

지금도 고향에 바람이 불고 있을까?

 

사람들에게는 고향이 있고, 그 고향은 대개 복사꽃 붉게 피는 낭만적이고 전원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우울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향도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한동안 고향은 잊으려 했고 고향에 관한 한 애써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지만, 어쩐 일인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 머릿속에는 그 시절의 우울한 잿빛영상이 자주 떠오르곤 한다.

 

내가 그 고향을 떠난 후, 일부러는 아니지만 그곳에 들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수년 전, 그곳에 우연히 들른 적이 있었다. 모든 고향이 그렇듯이, 나의 고향도 유년의 그런 고향이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서울 근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고목나무가 서 있었던 강가는 강변도로로 변했고, 매운탕집이 군데군데 들어서서 자가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돌담 고샅길은 없어지고, 돌개바람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초등학교도 어디론가 이사를 가고,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다방 대신 카페가 들어서 있었고, 선술집 대신 단란주점들이 네온을 번쩍이고 있었으며, 동네 노름꾼들의 놀이터였던 주막집 옆, 장터는 현대식 시설을 갖춘 상가와 E-마트와 피자집과 노래방과 PC방들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영일군의 한 면에서 포항의 한구로 편입되면서, 그곳도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각종 편의시설들이 들어서서 서울의 그 어느 곳과도 다르지 않았다.

 

낡은 흑백사진의 아련한 추억은 어디론가 가 버리고, 인쇄가 조잡하고 초점이 맞지 않은 싸구려 잡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에도 유년의 그런 고향은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의 고향에서는 아직도 모래 바람이 불고, 아이들은 연을 날리고 해바라기를 한다. 깊은 밤, 잠을 깨면 내 가슴속에는 그 고향의 강물이 아직도 흐른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을 나는 온몸으로 느낀다.

 

바람이 부는 날은 고향이 보고 싶다!

 

-장기오 수필집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중-

 

장기오 대PD

1946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1971년 KBS에 입사하여 TV문학관, 특집드라마 등 약 50여편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드라마제작주간, 방송심의위원, 드라마 제작국장, KBS 大PD등을 역임하였다.
2004년 「현대수필」여름호에  여의도 풍경 이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연출 연보
1980년  인간극장_메아리가 사는 땅 
1981년  TV문학관_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등 8편
1982년  TV문학관_돌의 초상  등 5편
1983년  TV문학관_금시초  등 5편
1984년  대하드라마_독립문 
1985년  TV문학관_노래여! 마지막 노래여  등 5편
1986년  역사드라마_선구자 : 대륙의 밀사  등 5편
1987년  특집극_초혼가 
1988년  창사특집_사로잡힌 영혼 
1990년  TV문예극장_만취당기 
1999년  TV문학관_아우와의 만남 
2000년  TV문학관_길은 그리움을 부른다 
          TV문학관_그 곳에 바람이 있었네 
2001년  TV문학관_홍어 
2003년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강물은 흐른다 

 

수상경력
제1회 프로듀서상(1988, 사로잡힌 영혼)
제25회 백상예술 대상(1988)
독일방송페스티벌 후트라상(1989, 신혼여행에서 생긴 일)
제10회 상하이 TV페스티벌 드라마부문 대상(2004)
「현대수필」  여름호  신인상(2004)

 

저서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수필집
 장기오의 TV드라마론 


 

 

 

연재필자 _ 장기오  ·  대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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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f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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