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野史]조경분야의 태동, 제도화 이전의 시기

조경 1세대와 2세대를 중심으로
라펜트l한현구 회장l기사입력2013-01-27

기록이 전무하다시피한 조경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조경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끈을 하나로 묶어 연결시키는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조경을 학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았고 오직 일에만 전념하여 살아온 본인으로서는 후손에게 전해질 이 역사적인 자리에 참여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이야기에 앞서 평생을 업으로 조경에 몸담았던 선친과 대를 이어 지금까지 이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본인의 기억을 토대로 이야기를 이끌 수밖에 없는 것에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작지만 처음으로 시도되는 이러한 역사의 기록을 통해 현세대를 비롯환 다음세대에 그 뿌리를 알리고 그분들의 노고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먼저 지금부터 쓰려는 글은 현재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는 내용이 아닌 본인이 체험한 것을 돌이켜 생각하며 적은 것이므로 다분히 주관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지난 1990년에 치러진 한림 60년 행사에서 과거를 조명해본 <한림 육십년사(1930~1990)>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월간 <조경시공>에 연재된조경野史를 참고로 하여 옛 기억을 더듬어 적어보았다.

 

글의 주된 내용은 조경 1세대 2세대의 이야기로, 1973년도에 한국종합조경공사가 설립되고 1982년 처음 종합조경 면허가 1차로 11개 업체가 탄생되기 이전까지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후부터는 조경을 학문적으로 배운 조경기술사가 가장 전문성 있는 기술자로 인정되었으며 조경기술사를 보유한 업체는 종합조경면허를 획득할 수 있었다. , 이들 업체만이 정부조경공사를 수주할 수 있도록 처음 제도를 만든 것이다.

 

반면 조경기술사가 배출되기 이전에는 조경수를 생산하는 농원 사장이 조경인의 대부분의 몫을 하던 시절이 조경 1, 2세대 시절이었다. 조경학회도, 조경사회도, 조경면허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지금부터 과거 한림농원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이와 연계하여 당시 주변의 조경 역사를 더듬어 이야기 해 본다.

 

故한태현 원장, 월간 환경과조경 1983년 제2호 인터뷰 중

조경과의 첫 인연

필자의 선친은 충북 청원군의 평범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락 인근의 을성산이란 큰 산이 있었는데 15살 되던 해에 청량리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는 곤도란 일본인이 현지에 와서 사방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때 면사무소에 다니는 선친 친구의 소개로 일본사람이 감독하는 사방공사의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방사업이 끝날 무렵 일본인 곤도 씨는 선친의 성실하고 근면함을 칭찬하며 서울에 올라가 청량리 임업시험장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을 하였고 이를 계기로 나무와 인연을 맺고 평생 조경인으로 살게 되었다.

 

당시 임업시험장에서 3년간 열심히 일하면서 수목에 관한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일하는 동안 선친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로 인해 추후에 수목을 기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늘 말하였다.

 

임업시험장생활 3년을 마친 후에 선친은 함경남도에 산림감시원으로 발령을 내주겠다고 하였지만 청주의 부모님을 모셔야했기에 안된다고 정중히 거절하고 청주로 돌아왔다.

 

한림의 시작

1930년 봄,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나무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이만 옹이 향나무 종자 2말과 각종 정원수를 기르는데 필요한 도구를 챙겨 주어 그것을 가지고 종자를 파종하고 양묘업을 시작했다.

 

상호명은 선친의 이름을 넣어한태현 묘포라고 하였고 이로부터 한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사방조림용 양묘는 정부로부터 양묘지정을 받아서 양묘하여야 국가에 묘목을 납품할 수가 있는데, 처음이라서 그런 절차도 모르고 생산하여 납품을 하지 못하고 모든 묘목을 버리게 되었다.

 

당시 충청북도에는 4~5개의 양묘업자가 있었는데 한태현 묘포의 묘목이 전국에서도 가장 우수한 품질로 수상을 하여 유명해지기도 했다. 당시의 양묘사업은 수익성이 높아 수해나 가뭄이 있지 않는 한 10.000평의 땅을 임차하여 양묘를 하면 10.000평의 땅을 살수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관개시설이 전무하여 가뭄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시기여서 2~3년에 한번씩은 연례행사처럼 수해나 가뭄으로 농장이 폐허가 되곤 했다. 가뭄이 오면 온 가족이 농장에서 두레로 물을 퍼서 나르느라 밤을 새웠고 비만 오면 홍수로 논둑이 무너질까 두려워 논에서 밤샘을 하곤 했다, 만약 재해가 나게 되면 토지 임차료, 인건비, 기타 농자재대금 등이 모두 빚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선친도 채권자들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좌)한태현 묘포의 일정시대 모습, 오른쪽이 故한태현 원장

(우)낭성 한태현 묘포의 해방후 모습

 

관상수 시장의 태동

1945년 이전 일제 강점기에는 수요자와 공급자가 대부분 일본인들로만 형성되어 있어 그 때의 이야기는 별로 듣지 못하였다. 해방이 되고 우리 정부가 수립되어 조림사업이 막 시작되려 하자 6.25가 또 반발했다. 전쟁 후 온 국토가 황폐화되어 수복정부는 조림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후 자유당 정권부터 안정을 찾으면서 양묘사업이 활발해지고 점차 조경시장도 형성되어 갔다.

한림농원은 식목일이 되면 청주시내에 묘목시장을 개설하였는데 특히 과수나무가 잘 팔렸고 관상수 묘목도 점차 그 수요가 늘어났다. 이때 선친은 관상수를 적극 재배하면서 서울로 진출을 도모하였다.

 

당시 관상수 업계의 현황을 살펴보면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일본사람들이 운영하던 재배농장을 승계받은 농장이 있었고, 두 번째로는 한림농원처럼 산림양묘업자가 산림용 묘목에 관상수용 묘목의 재배로 전환한 농장이 있었다. 세 번째로는 화원을 경영하던 업체들이 유사한 분야이므로 조경업을 겸업으로 참여한 업체들이 있었다.

 

크게 보면 이 세 부류의 업체들이 제각기 특성을 가지고 조경업에 종사하면서 업계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첫 번째에 해당되는 기존농원을 승계한 업체들은 수령이 오래된 대형 수목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는데 주로 노향나무, 가이즈카 향나무, 섬잣나무, 주목 등의 고급수종에 값이 고가인 것이 많았다. 이로인해 5.16 군사정변 이후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1960년 중반부터 신흥재벌들이 생겨남에 따라, 고급주택이 조성되면서 조경은 당시에 부르는 것이 값으로 많은 호황을 누렸다.

 

이때는 향나무를 심는 것이 곧 조경공사라고 생각할 때였으므로 전국의 노향나무는 전부 뽑혀져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우물가에 심겨져 있던 노향나무, 부락 정자목으로 심겨져 있던 노향나무, 사당의 재실집, 옛날 벼슬하던 사대부집 등 전국의 노향나무들이 서울로 대이동을 하였다.

 

당시의 재미있는 일화로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정원을 꾸미는 경우가 많았던 신흥 재벌들이 농장에 오면 제일 비싼 나무가 어느 것이냐고 묻곤 했다. 그런 나무를 사다 심고는 우리집 정원에는얼마짜리 나무가 심겨져 있다”고 자랑을 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집에 서재를 꾸밀 때에도 서점에서 제목은 보지도 않은 채 책들을 통째로 사서 진열해 놓고 자신을 과시했다고 한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국회의원인 조창대 의원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였는데 대통령이 친히 조문을 갔다가 오는 길에 동빙고 일대에 노향나무가 많이 심겨진 신흥 고급호화주택들을 보고 깜짝 놀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당시 국방부 장관을 해임시켰고, 또한 언론에서는 그 지역을도둑놈촌이라 이름 붙여 화제가 되었다.

 

두 번째로는 산림양묘업에서 조경업으로 전향한 업체들로 묘목을 번식시키는 기술이 뛰어나 주로 묘목생산에 주력하였다. 이때부터 ‘한태현 묘포한림농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경업으로 전향하였다.

 

자유당 말기에서울시 사방관리사업소에서는 변두리의 민둥산을 푸르게 하는 사업으로 대묘조림을 많이 하였다. 그리고 철도청에서는 철도역 주변에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이 사업이 업계로서는 아주 큰 사업이었다. 당시 대형목이 아닌 파종묘목은 양묘업자들이 주로 생산 공급을 많이 하였다. 종자를 구하는 것이 일반인들은 할 수 없는 일이었고 파종하여 발아시키는 것은 더욱 대단한 기술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1960년 중·후반경 조경업이 인기가 많아지고 조경수가 아주 고가에 매매되는 등 호황을 누리자 많은 사람들이 농장을 만들면 수익성이 높다고 인식하여 유행처럼 번졌다. 땅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너도 나도 조경수를 사서 빈 땅에 심기 시작했다.

 

이때에 향나무 묘목이 제일 잘 팔렸는데 향나무도 종자의 각질이 두꺼워서 파종이 까다로워 파종에 성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당시 파종하여 번식한 향나무를 씨향이라고 하고 삽목으로 번식한 향나무를 꺽꽂이 향나무라 구분했는데 씨향나무 묘목이 꺽꽂이 향나무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

 

이때 한림농원의 씨향이 많이 유명해졌었다. 요즘 번성하는 큰 조경업체들이 당시 한림농원에서 묘목을 사다가 농장을 만든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신품종으로 개발한 수종은 거의가 양묘업체들이 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림농원은 임업시험장에 김이만 나무할아버지가 있었으므로 항시 부탁만 하면 종자며 삽수며 손쉽게 무슨 나무라도 구할 수가 있었다.

 

당시에 한림농원에서 개발하여 보급시킨 수목으로는 쥐똥나무, 계수나무, 낙상홍, 좀작살나무, 둥근소나무(당시는 천지송이라 불렸음), 독목화, 낙우송, 두충나무 등이다. 청와대 진입로의 둥근 소나무가 당시에 한림농원에서 재배한 나무로 처음 심겨졌다.

 

천리포 수목원을 만들 때도 당시의 임업시험장의 조무현 선생과 밀러 씨가 한림농장에 며칠씩 머물면서 상당량의 희귀수종을 선발해 갔다. 나무의 수종이 다양하기로는 전국에서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선친이 임업시험장에 계셨던 연유로 나무에 대한 특성을 많이 알았고 번식방법, 종자나 삽수의 수집 또한 용이하여 다른 농원에서 가질 수 없는 장점이 많아 가능했던 일이었다.

 

셋째로 화원을 하던 업체들은 화원보다는 조경업 시장이 큰데 매력을 느끼고 적극 참여하여 여러 업체가 조경업에 적극 활동했으며 조경에 원예를 접목하여 더욱 화려하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조경업체들은 초화류에는 문외한이었는데 초화류를 조경소재로 활용하게 된 기초는 화원을 하던 업체들의 공로가 지대했다. 요즘은 지피식물을 재배하는 전문업체가 많아서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겠으나 원예종은 조경수종과는 그 특성이 아주 다른 분야이므로 조경과 접목이 잘되면 화려한 꽃과 수목을 조화시켜 조경을 한단계 진일보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세 개 분야의 업체들이 각기 특성을 가지면서 업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를 했다고 본다.

 


문공부 문화영화‘시련과 보람’촬영장면_ 오른쪽이 故한태현 원장

 

외국수종의 도입

일본에서 처음으로 정원수가 수입된 시기는 1957년도 경이었다고 본다. 한림농원에서는 가이즈카 향나무 500, 백목련 500본을 수입했었는데 한밭에 심어서 2~3년 후 꽃이 만개하니 꽃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재래종 수목만을 보다가 화려하게 개량된 백목련을 보고 너나 할 것 없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훗날 박정희대통령 시절 육영수 여사가 좋아하는 나무가 백목련이라 하여 다수 심겨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당시 제일 어려운 것이 수입종의 삽수를 구하는 일이었는데 일본인에 의해 조성된 충청북도 도청 정원을 전지하였던 한림농원은 이를 통해 많은 양의 삽수를 구할 수 있었다.

 

삽수가 뿌리만 내리면 판매가 가능하던 시기여서 삽수로도 많은 거래가 이루어졌다. 묘목이 잘 팔리면서 번식 기술도 많이 발전하여 삽목기술, 접목기술, 파종기술 등 놀랄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향나무, 노각나무 등 각질이 두꺼운 나무의 종자도 냉동을 이용하여 휴면을 타파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철죽 등에 녹지삽 기술이 개발되어 짧은 기간 내에 다량의 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번식기술은 어디까지나 조경업계의 전문가만이 가능한 기술이어서 조경업자들의 고유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조경업계가 호황을 누렸다.

 

그 이외에도 외국의 많은 신품종들이 속속 수입이 되었다. 메타세쿼이아는 광주의 정화도 씨가 수입하여 다량 번식을 시켰고 한때는 금값으로 대단한 호황을 누리기도 하였으나, 후에 과잉재배되어 밀식된 수목을 뽑아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플라타너스, 수양버들, 자산홍, 회양목,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 모든 나무들도 주기적으로 위와 같은 호황과 천대를 반복하게 되었고 영리를 목적으로 수목에 많은 투자를 하였던 업자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사례가 매우 많았다.

 

故김이만 나무할아버지와 일본조원업자들의 청주한림농원 농장방문(맨왼쪽이 김이만씨)

 

특수수종 재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은 강원도를 옻나무 재배 적지로 보고 들과 산에 많은 옻나무를 심어 재배하였다. 그리하여 강원도가 칠기 산지로 각광을 받았으나 해방이후 모두 베어져 없어지고 전통칠기 또한 아쉽게 사라져가고 있다.

 

옻나무는 몇 가지 재배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옻이 오르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옻이 안 오르는 사람도 종자로 파종한 옻나무 밭에서 일을 하면 옻이 올랐고, 옻이 오른 부위에 다른 사람이 접촉을 하기만 하여도 옻이 옮겨져, 가족 중에 한 사람만 옻이 올라도 가족 전체가 옻이 옮게 되었다. 당시에는 옻이 올라도 약이 없어 닭을 잡아 삶은 물을 몸에바르는 것이 최선의 치료법이었다. 농원에서는 옻이 오른 인부들을 위해 옻 치료용으로 닭을 사주는 것이 전부였다. 두 번째는 옻나무 종자 발아의 어려움이다. 옻나무 종자는 종자를 싸고 있는 각피가 두껍고 단단하기 때문에 일반 수종과는 달리 파종 후 2~3년 후에나 발아가 된다. 발아조건의 어려움으로 발아율 또한 나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당년발아를 위해 염산처리를 거쳐야 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감각적이고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것이었다. 너무 오래 담그면 종자가 상하고 너무 짧게 담그면 각피의 분해가 덜되어 효과가 없었다. 선친은 이 과정에 관한 한 최고의 숙련자였다.

 

이런 재배의 어려움으로 옻나무는 일반 묘목의 몇 배 값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 재배한 특수수종으로는 뽕나무가 있다. 뽕나무는 유일한 국가산업이었던 잠사산업의 기본으로 여겨져 재배가 적극 권장되었다. 뽕나무는 종자 오디를 파종하여 발아된 뽕나무 묘목에 대목을 접목하여야 하는데 접을 붙이는 접사들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접사들의 인건비가 비쌀 뿐 아니라 외지에서 오기 때문에 숙식 또한 제공하여야 했다.

 

당시에는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일대가 과수 묘목산지로 유명하여 이곳의 접사들이 인기가 많았다. 훗날 이들은 섬잣나무, 백목련, 벚나무, 장미 등 조경용 수목의 접목번식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의 남강 일대가 묘목 재배에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유명하여 일본인들이 농장을 많이 하였고 해방 후에도 전국에서 가장 묘목이 많이 재배되는 산지로 유명했다. 요즘은 그곳이 모두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아쉬움이 컸다.

 

남대문 조원공사(1965) 

 

최초의 조경공사

1960년 후반까지도 정부 또는 정부산하기관의 모든 수목관련 사업은 납품위주로 이루어졌다. 당시 서울시에 근무하던 피상진 씨의 말에 의하면 1960년 후반까지 대부분의 식재관련 사업은 납품위주로 이루어졌고 시공사례는 드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업체가 시공을 하였던 사례도 여러 번 있었다.

 

당시 한림농원에서 시공한 현장만도 1963년경 남대문 주변 조경공사, 5.16이후 국가재건 최고회의청사 조경, 남산 야외 음악당 조경, 온양 현충사 조경, 독일 뤼프케 대통령 내한 시 숙소로 준비하던 영빈관 조경공사(지금의 신라호텔자리), 충주 비료공장 조경, 쌍용 시멘트공장 조경 등 다수인데, 한국종합조경공사가 발족되기 이전에 이루어진 조경공사들이었다.

 

당시에는 조경의 품셈이 없었던 시기였으므로 기관마다 기준이 상이하여 어려움이 많았다.

 

1970년 이후에서야 조경에 관한 품셈과 일위대가 등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5.16 이후부터 산업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국토의 개발이 활발해짐에 따라 조경 공사물량도 급증하였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조경에 대한 깊은 관심이 조경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마치며

70평생을 조경에 몸담고 살았으면서 뒤돌아 볼 여유조차 없이 살아왔는데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오휘영 명예교수(한양대)께 감사드린다. 새삼 주변을 돌아보니 조경 1세대 분들은 거의 작고하였고, 조경 2세대 분들도 거의 현업에서는 손을 떼고 상호 교류나 접촉이 없는 상태로 이제 서로 간에도 만나지 못하는, 잊혀져가는 세대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있었기에 많은 수목이 개발되었고 오늘날 제도의 기틀도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조경의 업역을 지키기 위하여 건설업법 속의 한 구절 한 구절을 투쟁하며 지켜왔고 산림조합법 개정을 투쟁으로 막기도 하였다. 잊혀져가는 조경 1세대 2세대들에게 많은 박수를 부탁드린다.

 


장충동 관상수 협회 사무실 겸 전시장 기공식(1971년). 좌로부터 이능선 서울시 녹지계장, 허형식 녹지과장, 주용준 산업국장, 김동식 관상수협회회장, 한태현 원장, 김명원 씨, 성충근 씨

 

연재필자 _ 한현구 회장  ·  한림에코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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