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사(歸去來辭)

장기오 수필집_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라펜트l장기오l기사입력2013-02-17


현대인은 일탈을 꿈꾼다.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어딘가로 잠적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시도 때도 없이 느끼는 이들이 많다.

 

자아와 현실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확인하고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뇌하면서 삶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는 일과 사랑이 삶의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열정보다는 지혜가, 도전보다는 타협이 보다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이라면, 또 사랑이 얼마나 피곤한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운명은 한 치도 비켜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나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일탈을 시도한다.

 

9시 출근, 6시 퇴근에 일상을 매는 고단한 샐러리맨일수록, 맥 빠진 모습으로 일용할 양식을 얻어오기 위해 가정과 직장을 오가는 후줄구레한 월급쟁이일수록, 대단치도 않는 안락을 위해 젊었을 때의 거창한 꿈 따위는 미련 없이 쉽게 팽개친 예술가일수록, 살다 보니 문득 나이가 50이 넘어 주위의 동료들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하나, 둘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기세등등한 젊은이들이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갈라 주눅이 들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한편에서 마음만 상하고 있을 때, 예쁜 아내와 공부 잘하는 아이들, 좀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 이런 것들이 어쩐지 덧없이 느껴질 때, 또한 뚜렷한 신념도 진지한 노력도 없이 아침 조간신문에서 얻어들은 몇 마디의 지식뿐이면서도 무슨 대단한 선각자인 양, 근거없는 나르시시즘에 취해 속물근성을 드러냈던 젊은 시절의 치기가 부끄러워질 나이쯤이면 사람들은 탈출을 꿈꾼다. 그리고 삶을 다시 한 번 살아보고자 다짐한다.

 

대개의 경우, 현대인의 탈출은 도시로부터의 탈출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같은 이미지가 있는-집 앞에는 실개울이 흐르고, 뒷산에는 아름드리 밤나무에 밤이 주렁주렁 열리는 풍요롭고 한적한 시골 고향과 같은-낭만적인 전원생활을 꿈꾼다.

 

봄에는 텃밭에 씨를 뿌려 여름 내내 상추며 쑥갓으로 더위에 지친 입맛을 돋우는 상큼한 기분 하며, 뒷산에 진달래 피면 꽃 따다가 화전이라도 부쳐 봄날의 기분을 만끽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여름날, 마당에 평상을 내다 놓고 별을 세며 손주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삶의 축복 같기도 한, 무더운 여름날의 소나기가 끝난 후의 적막은 젊은 날의 열정적인 사랑이 끝난 후의 허무같아 새삼스레 첫사랑을 회상할 수도 있으리라.

 

가을걷이가 끝난 뒤 그 쓸쓸한 벌판에 혼자 외롭게 서 있는 허수아비는 마치, 곰삭은 표정으로 양로원 뜨락에 서 있는 노인의 무심한 얼굴 같고, 세월의 허무 같아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시작(詩作)노트를 들춰보며 뒤늦게 시심(詩心)을 가다듬으면서 새삼스레 생의 의미를 반추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울타리에 노랗게 피어난 국화꽃을 따서 아내를 시켜 술을 빚으리라.

 

겨울날 보일러를 한껏 올려놓고 뜨근한 방안에서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이나 읽으면서 초저녁잠을 이겨보리라. 그러다 눈이라도 올라치면 눈의 무게에 못 이겨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겨울밤 강추위에 호수가 갈라지는 소리에 잠을 깨는 낭만 또한 일품이리라.

먼곳에서 벗이 있어 찾아오면 가을에 담갔던 잘 익은 국화주를 내어 종일토록 취해보는 것도 여유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도회살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전원생활은 꿈을 꿀 수는 있을망정 실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참 일할 나이에는 출퇴근이 부담스럽고 아이들 교육이 발목을 잡는다. 대개 이런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정년퇴직을 한, 약간은 사회의 한쪽에 물러나 있는 세대들이 대부분이다.

 

딱히 도시에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살아봐야 과거처럼 생계의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며, 매일 만나서 농담이라도 주고받을 친구들이 하나, 둘 줄어드는 형편에, 구차스럽게도 도시에서 빙빙 도는 것보다는 차라리 은둔을 하자는 심정으로 전원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그 역시 만만치가 않다. 편리한 백화점 쇼핑, 몸이 아플 때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자식과 가까이 살며 내왕하고 싶은 욕구, 특히 여자들의 경우는 수다 친구들과 동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소외의식이 더더욱 망설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원생활에 낭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겨울은 춥고 쓸쓸하고, 여름은 모기 등살에 시달리고, 시장은 멀고, 시장에 가도 원하는 물건을 구하기 어렵고, 밤이면 자연의 정적이 두렵고 외로울 수도 있다. 연극 한 편, 영화 한편을 보려고 해도 하루를 허비해 가며 도시로 나가야 하고, 전람회나 연주회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서기가 귀찮고 번거롭다. 원시인이 되어가는 느낌이고, 어쩐지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해서 머뭇거린다.

 

사람들이 꿈은 꾸면서도 도시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이유들이다.

 

나 역시, 꿈만 꾸었지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정년퇴직을 하면서 비로소 한 번 시도해 보았다. 서울 근교에 조그마한 땅이라도 사서 아담한 집을 짓고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이나 읽으며 살고 싶어 서울 근교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땅값은 오를 대로 다 올랐고, 경치가 괜찮다는 곳에는 으레 별장들이 차지하고 있어 우리 같은 서민들이 그런 낭만을 꿈꾸기에는 너무 요원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이 도시에서 내가 구하는 것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될 때, 그리고 심신이 지쳐 도시생활이 지겨워질 때, 나는 이 도시에서의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젊었을 때는 욕망 때문에, 아쉬움 때문에, 집착 때문에 망설였지만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지금, ‘스스로 그러함이 갖는 의미와 재미를 새삼 음미하고 싶다.

굳이 도연명의 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또 전원이 황폐해졌다 하더라도,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장기오 수필집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중-

연재필자 _ 장기오  ·  대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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