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달항아리는 미니멀리즘의 극치

Gallery in my memory
라펜트l이성낙 명예총장l기사입력2013-03-06

몇 년 전 바젤 아트 페어(Basel Art Fair)에 들러 수많은 부스(booth)를 기웃거리며, 전시된 다양한 미술품을 감상했다. 별로 크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작품이 나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동일한 크기인 빨강, 검정, 베이지색의 작은 직사각형이 아래, , 옆으로 작품 가운데 배열되어 조합의 미를 연출하는 판화 작품이었다.

 

기하학적 최대공약수를 통한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 미니멀리즘의 대가 리처드 터틀(Richard Tuttle, 1941)의 작품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단순한 이미지에 매료되어 작품의 제작 연도와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려고 작품 가까이 다가가 작가의 서명을 찾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작품 하단에 서명이 있기 마련인데하며 다시 자세히 봤다. 아주 연하고 가느다랗게 연필로“Tuttle  ‘98”이라고 서명한 것을 어렵사리 읽어낼 수 있었다.‘세상에 이렇게 맥없는 사인도 흔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그의겸손함이 강하게 전해졌다. 작가의 서명이 혹시라도 작품의 본질을 손상시킬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미니멀리즘 건축 예술을 이끈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모자람이 더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라고 하였듯이 리처드 터틀도 기하학적 단순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을 구현한 미국 작가이다.

 

리처드 터틀의 작품, 1998년, 56×37㎝. 작가의 서명을 거의 볼 수 없다

 

언젠가 미술 관련 책자에서 소개된 그의 작품 구성을 보았으나 그의 서명을 본 적은 없었다. 작가의 조용하고 겸손한 성격을 보는 듯한 서명을 대하는 순간, 그의 작품 정신이 내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 왔고, 이때부터 나와 깊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인상파, 추상파 등의 예술 흐름에 뒤이어 1960년대 이후 미술, 음악, 건축 그리고 패션(Fashion) 등 여러 분야에서, 인위성을 극소화함으로써 선()에 가까운 단순함과 고요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이 예술의 한 양식(genre)으로 굳게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근래 우리네 생활 문화와 환경은 어쩐지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외양적이고, 너무 호사스럽고, 너무 소란하고, 너무 혼탁하기만 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바로 미니멀리즘의 열풍이 아닌가 싶다. 겸손하고 전혀 꾸밈이 없어 소박할 뿐더러 달처럼 무욕(無慾)과 단아함이 함축된 아름다움의 극치가 바로 우리조선백자 달항아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격조 높은 멋을 일상적인 생활 문화의 일부로 즐겼던 우리 옛 선조들이 그저 자랑스럽기만 하다.

 

조선시대 백자인 달 항아리, 18세기, 높이 50cm, 미니멀리즘 정신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연재필자 _ 이성낙 명예총장  ·  가천의과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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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f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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