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동백꽃

장기오 대PD의 에세이
라펜트l장기오l기사입력2013-03-24

선운사에 갔다. 알맞게 동백꽃이 한참이었다.

우리가 잠을 잔 여관 뜰에도 동백꽃은 있었고, 도솔암 꼭대기 암자에도 바위를 비집고 수줍은 듯 동백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선운사 경내에는 동백꽃이 그야말로 지천으로 널러있었다. 그러나 대웅전 뒤뜰에 핀 동백꽃이 유난히 붉게 보이는 것은 가슴 저린 사랑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아니 시() 때문이리라.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 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김용택의 <선운사 동백꽃> 전문

 

첫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엉엉 울 수 있는 사랑은 첫 사랑이 틀림없을 것이다. 대개의 첫 사랑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첫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첫 사랑의 추억을 평생을 안고 산다. 세월의 한 자락으로, 혹은 가슴 아린 상처로 말이다. 여자에게 버림받아 본 사람은 알리라. 얼마나 막막하고 얼마나 서러운지를.

 

아직도 채 여물지도 않은 소년이 분하고 억울해서 식식거리며 이 악물고 살얼음 낀 도랑을 건너는 눈물이 그렁그렁 얼굴이 떠오르고, 참다 참다 동백꽃 핀 아무도 없는 뒤뜰에서 서럽게 우는 모습이 손에 잡히듯 선하다. 늘 그랬다. 선운사 올 때마다 그 시()가 떠오르고 그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는 냉담했다. 한 번만 만나달라고 편지를 하고, 퇴교 길을 가로 막고 통 사정을 해도 그녀는 꼼짝을 안했다.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녀린 얼굴이 떠오르고 시간이 갈수록 내 기어이 너를 내 애인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겨났다.

 

당시 그는 건강 때문에, 때로는 가난 때문에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면서 초등학교 동창이던 그녀보다 2년이나 뒤쳐져 있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비웃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억울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만나서 해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만나주질 않았다. 그녀가 만나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그녀가 만나주지 않음으로써 그는 최면에 걸리고 말았다. 정말 해명하려고 그러는 건지, 그녀가 좋아서인지 분간이 안됐고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이라 그는 베르테르를 흉내 내면서 스스로를 비극의 연애소설 주인공으로 자신을 설정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 그의 행동은 연애소설의 그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한 번 만나기 위해 불 밝힌 그녀의 창문 추녀 밑에서 추위에 떨며 지새기를 그 얼마나 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연애편지를 쓰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 했던가. 흔히 하는 이야기로 플라토닉 러브였고 요즘으로 말하면 스토커였다.

 

대개의 첫 사랑은 이상(理想)의 여인일 경우가 많다. 훗날 어쩌다 우연히 만나게 되면 실망하는 것도 오랜 세월 동안 품어왔던 청순하고 착한 이미지의 여인은 어디 가고 뚱뚱하게 살이 찐 수다스러운 중년여인의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피천득 선생도 그랬다. 만나지 말아야 한다고. 백합처럼 시들어가는 아사코를 만나지 말아야 한다고 후회했다.

 

첫 사랑은 맺어지지 않는 것이 좋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수록 좋으리라. 살다보면 외로울 때가 얼마나 많겠는가.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날, 혼자 선술집에 앉아 나만의 추억으로 첫 사랑을, 혹은 이루어 질 수 없었던 사랑을 기억하는 낭만 또한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요즘의 사랑에는 그런 낭만이 없다. 보고 싶어 막무가내로 집 앞에서 기다리고, 한 번만이라도 만나달라고 밤새워 편지 쓰고, 상사병에 걸려 식음마저 전폐하는 온 몸을 던지는 활화산 같은 사랑은 없다. 사랑한다 어쩐다 하다가도 사소한 일로 틀어지면 그냥 헤어진다. 미련이 없다. 사정하지도 매달리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깨끗하다. 밤을 새우는 고뇌도, 식욕을 전폐하고 자신을 학대해가며 상대의 구원과 동정을 구하는 그런 낭만적인 행동 따위는 흘러간 유행가다. 간단하게 결혼하고 고뇌 없이 헤어진다. 쿨 하다. 시련이 없는 사랑, 그 또한 사랑일 수 있을까.

 

낭만이 사라진 세태에는 동백꽃도 그냥 사진 찍는 배경에 불과하다. 동백꽃을 보고 어릴 때 첫 사랑을 떠올리고 시를 기억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우리는 선운사를 내려 왔다. 서정주 선생의 시비(詩碑)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선생의 생가를 방문하고 점심에 소주 한 잔 씩 걸치고 선운사를 떠났다.

선운사에는 동백꽃만 있더라. 목 쉰 육자배기도 없고* 가슴 저린 사랑은 오로지 시()에만 있더라.

 

 

*미당선생의 시선운사 洞口에서 인용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로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전문)

 


번역·동영상 _ 장기오  ·  대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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