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공간_ 사유의 실로(失路), 근본없는 거주: ‘공간’(上)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_11회
라펜트l안명준 조경비평가, 나창호 기자l기사입력2013-08-23

우리 시대 공간은 다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것이다보니 그 의미를 범주화하기도 어려울 만큼 수도 없이 다양해졌다. 용어는 하나인데 담아놓은 생각들이 많다보니 같은 용례에서도 각자 생각이 달라지곤 한다. 게다가 그렇게 시작된 생각들이 불고 불어 이렇게 큰도시를 형성하면서부터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공간으로는 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왜 공간을 이처럼 가혹하게 다루었을까, 왜 공간으로부터 제 갈 길을 못 찾는 것일까?

 

괴리된공간’, 자연에 대한 트라우마

우리가 쓰는 공간이란 말은 경우에 따라세계와 동일하게 쓰일만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우리가 논의하고 싶은 공간을 수많은 의미 중에서 인간이 만들어 쓰는 공간, 또는 실제로 만들어 쓸 수 있는 공간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 우주 공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의미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람들에게 서비스되는 공간 개념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간이라는개념은 역사가 길지 않은, 비교적 근세에 고안된 것이다. 여기에는 흔히 간과하는 중요한 의의가 담겨있다. 공간이 개념으로 설정되고 다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상상의 세계로 편입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는 형태와 형식의 바깥에 있으면서 사람들의 행태를 내포하는 부수적인 것이면서, 어떤 면에서는 그 행태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는데, 개념이 되면서부터는 모든 계획과 디자인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라, 공원 하나, 집 한 채를 만들 때도 우리는 공간부터 이름붙여 나누지 않던가. 놀이공간, 휴게공간, 진입공간, 리빙 룸, 베드 룸 등등 말이다.

 

그렇게 삶터의 주변으로부터 공간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중요하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최대한 근원으로까지 보내보자. 처음 인간에게 공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거기에서부터 공간에 대한 생각은 시작될 수 있다. 그 생각은 수렵, 채집의 시기에도 인간이 공간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그들에게 공간이란 어떤 역할이었을까도 궁금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혼자 살아가지 못하므로, 태어나면서의 첫 공간은 부모의 품이자 보호 범위가 해당된다. 이 때의 공간은 영역으로 부를 수 있는 누군가의 통제 가능 범위이다. 날씨나 다른 조건이 괜찮다면 이 때의 공간은 굳이 강한 물리적 경계를 형성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거나 누군가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이라면 생존을 위해서 그 공간은 뚜렷한 보호막의 경계를 필요로 하게 된다. 강렬한 햇볕 아래에서는 해를 가려줄 무언가의 그늘이 새로운 공간으로서 적합하듯이 말이다. 비바람이 심할 때는 또 어떤가? 들짐승들의 위협이 있다면 또 어떤가? 즉 첫 공간에 대한, ‘통제할 수 있는 영역’(공간)에 대한통제력을 잃어가면서 우리는 하나 둘 강력한 보호막 또는 경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편리하고 예측가능한 보호막 또는 경계는 공간의 통제력을 회복시켜주면서 안전까지 담보해줄테니 매우 유용하였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굴과 같이 한 면만 열려있는 공간으로 나무밑 그늘과 같이 한 면만 경계인 공간보다 월등하게 좋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인류는 물리적 공간을 상정할 수 있는 토대를 시작하게 된다.

 

막히고 적당히 닫힌 것이 편안한 이유는 단 하나이다. 자연이 주는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어느 정도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또한 과도한 걱정과 위협에 대한 대비를 줄이게 됨으로써 보다 창의적인 활동이 가능하게도 해준다. 더 많은 전투력과 사냥 시간은 삶을 점차 풍요롭게 하였을 것이고, 공간은 점차 복잡한 욕구들을 탄생시키며 인류를 한 단계 진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잉여 산물들이 많아지고, 시련을 주는 자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는 인간의 욕망을 다 채우기에는 동굴이 비좁아지기 시작한다. 다툼도 있고, 탐구도 있고, 때로는 권위도 있으면서 공간은 그렇게 들판으로 그 영역을 넓히기 시작한다. 자연의 시련은 여전하니 새로운 경계를 짓고동굴 같은 공간을 만들어 다시 유용하게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후에는 생각도 많아지고 복잡한 도구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공간은 비약적으로 분화하며 행태를 담는 그릇으로 진화한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공간이란 보호(통제)하거나 지키고 싶은 범위(영역) 밖의 시련을 항상 전제한다는 것이다. 부모 품 밖의 위협과 동굴 밖의 시련이 모두 공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공간은 컴플렉스를 본성으로 내포한 개념인지도 모른다. 외부에 대한 저항, 또는 단절로 내부의 행위를 보호하고 지속하려는 속성이 공간에 그대로 녹아 담기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간이 내포하던 행태가 외부 자연에 대해 일정한 트라우마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계가 튼튼해지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이며, 쓰던 공간을 물려주고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지혜도 발달하게 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공간들이 끊임없이 배타적인 것도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일 수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

 

현대 공간의 보편성, 상상으로 가는 징검다리

잘 살펴보면 공간은 계통발생적이어서 원시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에게는 동일하게 작용한다. 공간은 삶의 모습을 성장시키는 기본적인 사항이며, 살아있는 모든 모습들의 기본 토양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지금의 우리가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자연에 대한 공포(Naturaphobia, 자연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앞서의 생각을 이제 현대로 옮겨와 보자. 생존의 기본이었던 공간이 문명과 문화로 성장하면서는 권력과 밀접해지는데, 그것은 경계짓는 일이 점차 고도화되면서 단순히 자연의 시련을 막는 정도가 아니라 내부의 행태를 표현하고 과시하는데까지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관이 화려해지고 새로운 재료가 도입되면서 공간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행태와 거기에 담긴 욕망들이 주인공으로 부각한다.

 

근대 이전에 이루어진 행태의 권력화는 인간의 개인적 영역성을 잊혀지게 하였고, 한동안 우리에게 영역과 공간은 그저 비어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근대가 시작될 무렵에야 화려해진 행태의 컨테이너들에 다시 눈길이 가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통제력을 잃은 행태들이 그들만의 공간환경을 형성하며 지구자연의 토대를 벗어나 공간자연(오귀스탱 베크식으로 한다면 에쿠멘이 될 것이다.)을 따로 만드는데까지로 진화한 후였다. 달과 화성에 인간의 삶터를 만들겠다는 자신감은 여기에 뿌리가 있다.

 

근대 이후 공간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수많은 생각들이 표현될 수 있는 물체 개념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와서야 존재감을 형성한 공간이 한 번 그 위상을 설정한 이후로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며 빠른 진화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공간이 개념이자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트라우마를 벗어버리고 복잡한 정서와 감흥은 단순화한 채 쓰기 쉬운 재료이자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너무도 쉽게 일상적으로 무슨 공간, 무슨 공간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 중에서도 그런 일만 전문으로 해온 직업군들의 발달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하나의 공간을 다루는데 세부 전문분야가 수도없이 나뉠 정도로 생각과 상상이 분화되기까지 하였다. 그로인해 삶터와 유기적으로 맺어지던 공간들의 관계성과 통합성은 해체되고 차가운 생각과 은밀한 상상이 공간을 지배하게 된다. 행태는 괴팍해지고 마지못한 일상은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공간이 내것이 아니라 돈의 것이 되면서는 아예 터로부터 일상을 유리시키기까지 한다. 공간이 특별한 일부에게만 삶터로 남아있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간을 비난하거나 나쁘게 보려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말자. 공간은 이제 전문가들의 세부 전문 분야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간이 개념화, 대상화되면서 수많은 기술들이 개발되고 삶터를 윤택하게 한 것도 잊지 말자.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대 공간이 모두를 위한 상상의 징검다리로 재탄생하였다는 점이고, 이것이 행태의 주인이었던 우리 삶과 삶의 모습을 재요청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자연에 대한 잊었던 트라우마와 주인으로서 공간을 통제하던 향수가 담겨있기도 하다.

연재필자 _ 안명준 조경비평가  ·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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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_ 나창호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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