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를 학문의 보고로 승화시킨 강진의 다산초당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4회
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4-10
“바닷돌 주어다 봉우리 만드니 본래의 모습처럼 한눈에 들어오누나. 가파른 비탈에 삼층으로 쌓아서 움푹 패인 곳에 소나무 심고 보니 두 얽힌 모양은 봉황이 춤춘듯하고, 내민 얼룩무늬는 죽순을 닮았다. 가는 줄기 물을 끌어 연못 만드니, 잔잔한 물속엔 하늘이 잠겼도다.
사랑 아래에다 새로이 조세 없는 밭을 일궈 층층이 자갈을 쌓고 샘물을 가두었다. 금년에야 처음으로 미나리 심는 법을 배웠으니 성안에 나가 채소 사는 돈은 들지 않겠구나.”

다산문집 제5권 다산화사(茶山花史)에 나오는 정약용(茶山 丁 若鏞:1762-1836)이 정원을 만드는 내용 시문의 일부이다.


다산초당 (여름: 강충세 2013)


다산초당 (이른 봄: 강진군 2013)

다산(茶山) 정약용은 본래 1762년(영조38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진주목사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질을 가졌고, 성품이 치밀하고 자세하여 4살 때부터 글을 배웠고 6세 때부터는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면서 교훈을 받았다. 7세 되던 해에 시를 썼으며, 14-15세에는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諸子白家)에 능통하였다. 1783년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 1789년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10여 년간 부승지, 참의 등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당쟁으로 인하여 1799년 탄핵을 받았다.

존경해마지 않던 임금 정조가 죽은 다음 해, 신유박해에 휘말려 큰형인 정약종은 처형되고 둘째 형 정약전이 유배 가는 모습을 지켜본 정약용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다산은 신유년(1801) 겨울 강진에 동문 밖의 오두막집을 얻어 사의재(四宜齋)라 이름붙이고 살았고 1805년에는 혜장선사의 도움으로 고성사 보은산방(高聲寺 報恩山房), 1806년 제자 이청(鶴來)집에 이사를 다니면서 근근이 살았다. 무진년(1808) 봄 다산은 외가 해남윤씨 윤단(尹漙: 1744-1821)의 도움으로 윤단과 그의 아들 윤규로(尹奎魯:1769-1837)가 별서로 쓰던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들어가 살게 된다. 당시 다산의 삶은 여러 가지로 처절하기만 했다.


강진읍 사의재(강진군.2013) : 다산이 유배초기 (1801년-1805년) 머물렀던 주막집

다산의 부인은 1807년 다산을 위해 결혼 30주년을 맞아 장롱밑바닥에 고이 모셔두었던 붉은 치맛자락(하피첩:霞)을 보내면서 “그대와 이별한지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니, 살아생전에 만날 날 있을까?” 라고 썼다. 다산은 부인이 보내준 치마를 일부 잘라 자식들에게 보내는 마음을 담는다. 두 아들에게는 훈계의 뜻을 담은 글을 썼고, 시집가는 딸에게는 두 마리 새와 매화를 그려줘 집안의 번창을 기원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 먼 길 애틋한 정을 담았네. 흘러간 세월에 붉은 빛 다 바래서 만년의 서글픔을 가눌 수 없구나.”라고 썼다.


다산초당과 연못(여름)


다산초당과 연못(겨울: 강진군 2013)

다산을 만나기 위해 귤동마을 만덕산 입구의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해남 윤씨 윤단의 후손이 운영하는 “다산명가”라고 하는 이집은 황토방으로 고풍스럽게 꾸몄다. 다산에게 초당을 허락해준 윤단의 원래의 집은 어디였을까? 그러나 귤동마을 내에 있었다는 기록 외에는 그 집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다. 윤단은 해남 윤씨로 다산의 외갓집 어른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손자들을 덕망 있는 다산에게 교육받게 하기 위해서도 초당건물을 내어준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초당에서 길러낸 18인의 제자 중 6명이 윤단의 직계 손자였다. 따라서 귤동마을의 윤단의 집은 다산초당 별서에 주부식 등을 공급하고 지원하는 본제(本第)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초당이 다산이 살았던 유배처(流配處)이기도 했지만 본제에서 조금 떨어져 본제의 지원을 받던 강학과 은일을 위한 별서의 형태였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석바위: 1818년 다산이 유배가 해제되어 초당을 떠나면서 새긴 글씨


천일각 외부에서 본 강진만(강충세 2010)

식사를 주문해놓고 아침 일찍 다산초당을 오른다. 빽빽한 침엽수와 대나무 길을 따라 오르는 산길. 오랜 세월을 보여주듯 나무뿌리들이 길가에 흐드러지게 뻗어있다. 10여 년 동안 이 길을 걸으면서 다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수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구도의 길을 걷듯 다산은 현실을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고 오로지 학문으로서 마음을 수양하고 제자 키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뿌리의 길(김영환.2013): 귤동마을 본제에서 초당으로 올라가는 다산자신의 모습을
인고(認苦)의 여정을 나타내는 “뿌리의 길”로 표현했다

다산초당 입구에 이르면 제자들이 유숙했던 서암(西庵)이 나오고, 다산초당(茶山草堂)이 나온다. 그리고 우측으로 방지원도형의 연못과 화계가 있고, 다산이 기거했던 동암(東庵)이 나온다. 다산은 이곳을 “송풍암(松風庵)”이라고 부르며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흠흠신서』 등 방대한 양의 책을 저술하였다. 다산초당은 비탈면을 깎아서 평탄하게 쌓아올린 축대의 안쪽에 전면 5칸*측면 2칸 규모로 세워져 있다. 동쪽에는 방지를 만들어 자연석으로 쌓은 둥근 섬을 만들었다. 연못 우측 뒤편으로는 언덕 위의 샘물을 나무홈통으로 유도하여 못으로 떨어지도록 하였으며, 배수구는 남쪽 호안으로 자연스럽게 넘쳐흐르도록 꾸며져 있다. 연못 뒤쪽의 경사면에는 1.2m~1.6m의 폭으로 5-6단의 화계를 조성하였는데, 여기에는 화목을 심고, 약초와 채소를 가꾸었다.


천일각 내부에서 본 강진만(강충세 2010)


다산초당 배치도(1991년 4월 측량)

한편 초당 앞에는 차를 달일 때 부뚜막으로 쓰던 평평한 돌의 다조석(茶竈石)이 놓여있고, 서북쪽 언덕위에는 정석(丁石)이란 글씨가, 밑에는 맑은 약천(藥泉)이 솟아난다. 정석(丁石)은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하며,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보아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나타낸다. 약천은 다산초당 뒤편에 있는 작은 샘으로 처음에는 물이 촉촉이 젖어있던 곳이었는데, 다산이 직접 파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전한다. 다산은 이곳 약천의 물을 떠다가 주변에서 모은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는데, 평생 차를 좋아했던 다산의 모습이 떠오르게 하는 특별한 장소이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가산을 말한다. 다산은 원래 이곳에 있던 연못을 개조하면서 주변의 돌을 주워와 둥근 섬 위에 신선의 경지를 나타내는 자그마한 봉우리를 나타냈다. 연못에선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연못에서 기르던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하게 여겼다.

다산초당에서는 이와 같이 정석(丁石), 약천(藥泉), 다조석(茶竈石),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의 4개 장소를 “다산4경”이라 부른다. 또한 다산은 “담을 스치고 있는 작은 복숭아나무[拂墻小桃], 문발에 부딪히는 버들가지(撲簾飛絮:박렴비서), 봄 꿩 우는 소리 듣기(暖日聞雉:난일문치), 가랑비에 물고기 먹이 주기(細雨飼魚:세우사어), 아름다운 바위에 얽혀 있는 단풍나무[(楓纏錦石:풍전금석), 못에 비친 국화꽃(菊照芳池:국조방지), 언덕 위의 대나무의 푸르름(一埠竹翠:일오죽취), 골짜기의 소나무 물결(萬壑松波:만학송파)”의 현상을 다산팔경(茶山八景)으로 삼고 시로 읊었다.


다산초당 팔경도(김영환.2013):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1808),다산화사(茶山花史:1808) 의 내용을
다산초당도(1812)와 이에리 가쯔오(家入一雄:1939)의 정다산선생거적도를 참고, 재구성하여 그렸다.


정다산선생거적도(家入一雄 1939)

정약용이 다산초당 시절 각별하게 지냈던 사람이 백련사에 있던 혜장선사였다. 혜장선사(1772-1811)는 해남 대둔사의 승려였지만 대단한 학승으로 백련사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읍내 사의재에 머물던 1805년 봄에 알게 되어 다도(茶道)의 경지를 익히게 되었고, 유배생활 내내 어려움을 감내해나가는데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길은 다산과 혜장선사가 만나기 위해 걷던 길이다. 이 길은 다산초당 끝부분에 후학들이 만들어놓은 천일각에서 시작한다. 그곳은 조망점이어서, 다산은 처자식과 흑산도로 유배 간 형이 생각날 때면 수도 없이 강진만을 바라보며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다산초당 위치도 : 위성사진에서 본 초당주변 다산관련 경관요소들을 나타냄

한편 백련사로 들어가는 길은 오솔길로, 마음의 위안이 절로 느껴지는 편안한 길이다. 한참을 오르다보면 오른쪽으로 해월루(海越樓)가 있고 조금 내려가면 멀리 백련사가 그림처럼 나타난다. 백련사 주위로는 동백나무 군락과 차밭이 흐트러지게 펼쳐지고 강진만이 내려다보여서 선경을 연출한다. 다산은 백련사를 오르내리면서 혜장선사를 가르치기도 하고, 그에게서 다도 및 불법에 대해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다산과 혜장선사의 우의를 생각하며 걷는 길, 이 길이야말로 죽령 옛길이나 대관령 옛길, 구룡령 옛길처럼 명승으로 지정하고 싶은 길이다.
 

백련사 가는 길: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은 호젓하고도 단아하여 옛길로서 명승으로 지정할 만하다


백련사 원경 (강진군 2013)


다산초당 외원도(김영환.2013): 정약용유적 관련 본제, 초당 공간, 해월루, 백련사 가는 길, 
백련사, 만덕산 등 초당 주변 외원의 모습을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그렸다.

다산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했던 실학자이다. 지금은 다산초당에 기와지붕이 얹혀 있지만, 다산과 각별한 인연을 가진 승려 초의가 그린 그림에는 낮은 담 안에 소박한 초가집이 그려져 있어 원래 초가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산초당도에는 두 채의 초당과 방지 형태의 연못이 담장 안팎에 1개씩 단차를 두고 조성되어 있다. 윗 단의 연못에는 대나무를 쪼갠 홈통으로 산골짜기 물을 끌어들였고, 이물은 담장 밑을 통해서 아래 연못으로 흘러들어갔는데, 현재 담장과 아래 지당은 남아있지 않다.


나무를 쪼개어 홈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는 홈통 비구(飛溝)와 연못

다산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언행일치의 삶을 원림경영에서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산이 생각한 원림은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고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공간이었으며, 실용성을 중시한 공간이었다. 따라서 다산은 정원을 만들면서도 실용주의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윗 연못에 심은 연꽃과 아래 연못에 심은 미나리는 생활의 수단으로서 심은 것이고, 잉어 또한 먹을거리를 감안해서 키웠다고 볼 수 있다. 초당 왼쪽으로 심겨진 원포는 채소를 심던 곳이었고, 뽕나무, 과일나무등도 심었다. 『다산화사(茶山花史)』에 보면 이외에 초당 주위에 매화·복숭아·모란·차·작약·수국·석류·치자 등을 가꾸었고, 채마밭을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지당에서 내려오는 계류 주변으로는 버드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있으며, 초당 뒤편으로 파초가 괴석과 함께 심겨져있고, 초당 울타리 안과 밖으로 붉게 꽃이 핀 화초류와 함께 마당 한편에는 과일나무인 매화가 꽃을 피우고 있다. 다산화사(茶山花史)와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에서 언급한 그 외의 식물로는 귤, 차나무, 모란, 작약, 수국, 치자, 월계화, 해바라기, 포도, 황매 등이 있다.


다산초당도(1812 초의선사가 초당을 방문하여 그린 그림)

다산은 18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57세에 고향 생가인 경기도 남양주 마현으로 돌아가 75세까지 학문을 마무리하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그의 저작은 183책 503권에 이르는 여유당집으로 완간되었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긴 유배생활을 하였지만, 마음을 다스려 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긴 정약용. 그는 1836년 봄 회혼 60주년에 아내에게 바치는 회혼가를 쓰고 생을 마무리한다. “육십년 세월, 눈 깜짝할 사이 날아갔으니,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 같구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이 늙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 밤 목란사 노래 소리 유난히도 좋으니, 옛날의 하피첩(붉은치마:霞)은 먹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소. 나뉘었다 다시 합함은 참으로 우리의 모습, 한 쌍의 표주박을 남겨 자손에게 주겠소.” 그는 드디어 탄생 250주년이 되는 2012년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 독일소설가 헤르만 헤세 등과 함께 유네스코가 선정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현재의 다산초당은 흔적만 남아 잡초만 나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복원한 것으로, 이제 세계적인 인물에 걸맞게 다산초당(茶山草堂:1812년)도와 정다산선생거적(丁茶山先生居跡:1939년)도를 근거로 원형을 찾아 새로이 복원해야 할 것이다. 해남윤씨 윤단과 그의 아들 윤규로, 그리고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소박한 별서로 쓰였던 다산초당. 백련사로 가는 길과 함께 국가 명승으로 승격되어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진정한 복합유산으로 남겨야 할 것으로 믿는다.

이재근 교수의 '자연과 철학을 담은 정원, 한국의 별서'는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헤리티지채널의 '명사칼럼'을 통해 연재되고 있습니다. 헤리티지채널은 국민의 문화유산 애호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한 고품격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문화유산 전문 채널입니다. [헤리티지 채널 바로가기]

글·사진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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