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위의 신선이 내려와 살던 곳 봉화의 석천정사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5회
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4-11


(강충세.2013) 권씨종택의 별당정원 청암정(靑巖亭).

 

我公平昔抱深衷 依杖茫茫一電空 :  

우리공이 깊은 뜻을 품었으나 좋고 나쁜 일들이 번 개처럼 지나가 버렸구나.
至今亭在奇巖上 依舊荷生古沼中 :

정자는 기암바위위에 서 있는데 못에서 피고 있는 연꽃은 옛모습 그대로일세.
滿目煙雲懷表樂 一庭蘭玉見遺風 :

아득하게 보이는 구름은 본래의 즐거움이요, 뜰에 자란 아름다운 난초는 바람에 향기로움을 더하네.
取生幾誤蒙知獎 白首吟詩意不窮 :

나같은 부족한 사람이 공의 은덕에 힘입어 흰머리 날리며 글을 읊으니 감사한 마음 끝이 없어라.

-퇴계 이황이 석천정사의 주인 권동보에게 써준 시-
 
산골오지 봉화. 봉화 닭실 마을은 문수산(1,206m) 자락 끝에 울창한 솔숲을 배경으로 옛 한옥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고, 하천이 마을과 들을 둘러 계곡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깊은 두메산골로, 병란과 세상을 피해서 살 만한 편한 한 곳” 이라고 하여 우리나라 살기 좋은 4대 길지중 하나로 꼽았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다 수탉(동쪽의 옥적봉)과 암탉(서쪽의 백운령) 형태의 나지막한 산이 알을 품듯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다.


석천정사의 위치도. 

 


석천정사의 외원 ①. 큰 스케일로서 석천정사의 위치와 성격을 지형도로서 표현하였다.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은 봉화군 금봉리 계곡을 지나 유곡리 닭실마을을 궁(弓)자형으로 감싸고 흐른다. 일찍이 조선중기 문신으로 예조판서까지 지냈으나 기묘사화(1519)때 파직되어 내려온 권 벌 (權 橃1478-1548)을 도와 아들 권동보(權東輔:1517-1591)가 청암정을 조영하는데 기여했고 이어 자기 자신만의 수신 처로서 석천정사(石泉亭舍)를 지었다. 석천정사는 부친 권벌이 초기 터전을 삼은 곳에 맏아들 권동보가 정사를 신축하고 별서로 삼은 셈이다.


(강충세.2013) 권동보((權東輔:1517-1591)의 별서인 석천정사.
원래의 살림집인 본제 (本第)는 800m 안쪽 닭실마을안에 있다.
석천정사는 동보가 살림집에서 충분히 떨어 져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별서(別墅)의 역할을 한다.



(강충세.2010) 석천정사의 암반과 계류

청암(靑巖) 권동보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1536년 향시와 154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분이다. 아버지 권벌이 1547년 윤원형등의 소윤일당을 비난한 양재역 벽사사건(良才驛壁書事件:丁米士禍)에 연루되어 삭주(朔州)로 귀양가 1년 만에 죽자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두문불출하여 살았다. 동보는 1564년 선친 등의 묘소를 수호할 추원재(追遠齋)와 1588년 사림과 안동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의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三溪書院)을 건립했다. 부친에 대한 억울함과 상심이 얼마나 컸으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벼슬길 마다하고 낙향하여 부친을 추모하며 살았을까? 마음상해 나라의 녹을 먹느니, 산수간에 집을 짓고, 마음편히 유유자적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암천세고(巖泉世稿), 청암난고(靑巖亂稿), 청암일고(靑巖逸稿)란 책을 남겼다. 암천세고(巖泉世稿)에서 권동보의 묘갈명을 지은 미수 허목(米壽 許穆 :1595-1682)은 권동보의 만년에 대해“ 시내위에 집을 지어 석천정사(石泉精舍)라 이름 하였고, 산속에 거연헌(居然軒)을 두었는데 모두가 천석(泉石)이 있는 곳이었으며, 음악을 좋아하여 평소에도 사죽(絲竹)이 그치지 않았으며 늘 읊조리면서 스스로를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석천정사(石泉精舍)란 현판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송재 송일중(松齋 宋一中: 1632-1717)의 글씨이며, 추녀 끝에 있는 수명루(水明樓: 물맑은 행실과 덕행을 후대에 퍼트림)와 계산함휘(溪山含輝: 시내와 산이 빛을 머금음)는 철종때 경상도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송벽 이정신(李正臣: 1792-1858)의 글씨이다.

 


석천정사에서 본 좌측계류

 


석천정사에서 본 우측계류 근경

일반 방문객들은 닭실 마을에 오면 충재고택과 청암정만을 보고 석천정사는 지나치기가 쉽다. 그만큼 석천정사는 마을과는 떨어진 외딴 곳에 있다. 봉화 닭실 마을에 도착하여 먼저 석천정사를 찾아간다. 마을 좌측으로 돌아가는 산모퉁이 길. 잘생긴 노송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산길을 따라 동보(東輔)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던 곳을 찾아 가는 길. 그 길은 신선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마음이 풍성해지고 여유로워지는 길이다. 아름드리 송림을 끼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시원하고 깨끗한 계곡, 석천계곡이 자리한다. 책을 읽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선비의 이상향을 실현한 곳. 그곳에서 바깥 경치를 보면 기암괴석과 소나무, 맑은 물줄기가 한 폭의 산수화다.

 


석천정사에서 본 우측계류 원경

 


석천정사의 외원 ②. 작은 스케일로서 석천정사주변의 모습을 진경산수화적 기법으 로 나타냈다.

동보는 권 벌이 터전을 마련해 준 암반위로 석축을 쌓고 팔작지붕으로 화사하게 건물을 배치했다. 건물의 형태와 디자인은 금강산 유람에서 보았던 소박한 절집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건물들이 단아하고 아름답다. 마루 구조에 달린 창살을 열면 그대로 계곡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고 창살을 내리면 물과 바람 등 자연의 소리에 독서를 하고 휴양하는 공간이 된다. 선경에 빨려들어 다리를 건너간다. 그리고 정사 쪽을 되돌아본다. 수정 같은 계곡사이로 물에 비추는 정사의 모습은 더욱 동화에나 나오는 그림 같다. 다리는 모가 나지 않고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목교다. 그것도 암반을 기반으로 두 개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놓은 것이 정겨웁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 솔바람소리와 계곡 물소리의 청량함을 느끼며 산책을 한다.


개울건너편에서 본 목교와 석천정사.

 


석천정사 배치도.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비룡 폭(飛龍 瀑), 백석 량(白石 梁), 사자 석(寫字 石), 청하 굴(靑霞 窟), 권충정공 산수구장(權忠定公 山水舊庄), 청하 동천(靑霞 洞天), 팔자 암 (八字 巖)등이 새겨져있고 정사 안에는 석천 정(石泉 亭)이란 암각이 새겨져 있어 장소성을 느끼게 한다.


석천정(石泉亭) 암각과 내부공간  

특히 계곡아래 “하늘위에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의 청하동천(靑霞洞天)은 동보선생의 4대손 권두응(權斗應 1656-1732)이 새겼다. 이곳은 기암괴석이 많고 물이 좋아 도깨비들도 몰려와서 놀았다는 지역으로 도깨비들이 석천정사에서 공부를 하던 서생들을 무수히 괴롭혔다고 한다. 이에 권두응이 바위에 청하동천(靑霞洞天)이란 글자를 새기고 주서 칠을 하여 필력으로 내쫒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삼계리 못미쳐 삼계서원 뒤편에는 조선초기 가난한 부부가 영험있는 스님의 은덕으로 부친의 묘소를 잘 관리하게 됨으로써 만주로 가서 천자(天子:청나라태종)를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세상에 이리 아름다운 길이 있을까? 신선이 된 듯하고 선녀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다. 그래도 중심은 석천정사인지라, 다시 발길을 정사쪽으로 옮긴다. 경치도 경치지만 입에서 단내가 날정도로 공기가 청아하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는 것이 금강산에라도 들어온 느낌이다. 커다란 너럭바위, 깨끗한 강자갈과 모래,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계류는 정사에서 살았던 동보(東輔)의 선비정신이 투영되면서 역사의 향기가 잔잔하게 밀려온다. 정사를 지나 다시 노송사이로 펼쳐진 석천정사 본제(本第: 살림집)인 고택으로 가는 길. 거꾸로 보면 석천정사와 석천계곡은 금닭이 알을 품고있는 천하의 명당자리로 되돌아가는 대문역할을 하는 곳이다.
 


(강충세.2013) 석천정사에서 닭실마을로 가는 오솔길.
옆의 동산과 오솔길은 석천정 사와 본제인 고택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오늘날 닭실마을은 봉화읍에서 울진방향으로 가는 국도에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충재의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三溪書院)이 있는 삼계리에서 올라오는 길이 주 진입로 였다고 한다. “ 마을 전체가 한눈에 포옥 들어온다. 한폭의 동양화다. 큰길을 마다하고 왼편으로 징검다리를 건넌다. 개울가에서 유유자적하게 빨래하는 아주머니. 물살이 빠르고 맑아 옷가지를 헹구는가 싶더니, 금방 고무대야에 가져온 나물과 채소도 씻을 태세다.” 이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생활풍경이다.


(봉화군.2013)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전경.
좌측으로 석천정사(石泉精舍)의 본제(本 第)인 권씨종택이 있고 끝자락엔 별당정원인 청암정이 있다.

 


(강충세.2013) 권씨고택(本第)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맑음 시냇물에 빨래하는 아 낙네의 모습이 마냥 정겹다.

다시 너른 들판이 나오고 도착 되는 곳이 청암정. 조선후기의 퇴계학파 안덕문(安德文: 1747-1811)은 1803년(순조3) 가을 여행을 떠나 남긴 동유록(東遊錄)에서 이곳을 둘러 “석천정사는 소나무와 회향(檜香)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하하였고, 청암정에 이르르니 정자가 큰 바위위에 섰는데 물로 사방을 둘러 있었다고 표현하였다.

 

이어 충재(1478-1548)선생을 홀로 향사하는 삼계서원(三溪書院)을 찾았는데 청암, 석천, 삼계는 바로권씨 일문의 유업을 이룬 곳이자 해동(海東)의 절승이다“ 라고 극찬하였다.

 

이어 살림집으로 쓰인 본제(本第)인 고택(古宅:충재고택)엘 들어간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와 관련하여 청백리로서 학문에만 열중하겠다고 이곳에 내려와 살게 된 입향조 권 벌의 위엄이 느껴지고,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벼슬을 버리고 석천정사를 운영했던 심동보의 절의정신(節義精神)이 배어난다. 마을을 나서며 구수하게 부서지는 한과를 입에 물고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넓고 길게 자리한 기와집들이 양지쪽에 그림처럼 늘어서 있다.
 

권동보의 살림집인 권씨종택 본제(本第).
 
고택 본제에서 떨어져 마을과는 완전히 격리된 곳에 위치한 별서 석천정사. 석천정사는 다시 그의 아들 권 래(權來: 1562-1617)에게 이어져 별서로서의 면모를 완비하게 되었다.

 

권 래는 이곳의 경치에 흠취되어 자신의 호도 아버지가 지은 석천정사(石泉精舍)란 이름의 석천(石泉)을 따서 지었다. 권 래는 춘양면 의양리에 있는 한수정(寒水亭:1608)도 운영하게 된다.

 

정(丁)자형 건물이 동남향으로 위치하여 있고, 와룡 연(臥龍淵)이라는 연못이 삼면에 둘러져 있으며, 초연 대(超然 臺)라는 바위가 있는 별서이다. 닭실 마을 산 능성이 너머의 토일 마을에는 권 벌의 둘째아들 권 동미(權 東美:1525-1585)가 별서로 조성한 송암 정(松巖亭)과 서설 당(瑞雪堂)이 있다. 정자의 사면에는 툇마루, 전면에는 계자난간이 시설되어있고 내부창호의 띠살 무늬가 매우 아름답다.

 

권씨 문중의 별서에 관해서는 다른 유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료가 빈약하다. 차제에 석천정사는 물론 송암정, 한수정에 관한 정밀한 사료를 밝혀 권씨 문중의 별서문화를 새롭게 발굴할 필요가 있다. 이들 별서들은 우리나라 4대 길지 닭실 마을의 유교와 선비정신을 잘 살려낼 수 있는 문화자원이다. 석천정사 주변의 자연경관은 최대한 손대지 않도록 해야 하고, 현대식으로 지은 화장실의 벽체와 지붕, 내부시설은 석천정사와 조화를 이루도록 개선하고, 이용적인 측면에서도 불편이 없도록 개조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 철학을 담은 별서. 하늘위의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고 하는 숨어있는 비경(秘景) 석천정사. 문헌적 사료를 더욱 발굴하고 인위적인 시설은 피하며 자연은 천연그대로 살려 보전해 나갈수 있도록 국민적 계몽과 정책적 뒷받침이 절실한 때이다.

 

이재근 교수의 '자연과 철학을 담은 정원, 한국의 별서'는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헤리티지채널의 '명사칼럼'을 통해 연재되고 있습니다. 헤리티지채널은 국민의 문화유산 애호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한 고품격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문화유산 전문 채널입니다. [헤리티지 채널 바로가기]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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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공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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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선조들의 손길 눈길 발길이...느껴집니다.
20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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