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제에서 멀리 떨어진 계류가에서 학문과 심신수양을 했던 예천의 초간정(草澗亭)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16회
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6-27


“말을 달려 숲 골짜기에 이르니, 새로 지은 정자가 어찌니 깊고 아늑함을 드러내는지 놀라웁다. 옛사람이 놀았던 물가에는 풀포기가 우거지고 기거하며 학문하던 방은 조용할 뿐, 때는 초가을이라 달이 밝고 스산한 기운이 옷깃을 스민다. 노소(老少)가 함께 어울려 담소하다가 밤이 깊어 계곡을 베개 삼아 누우니, 정신은 오히려 맑다. 언덕너머는 넓은 밭이고, 계곡은 기묘한 바위가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개울물은 못을 이루어 물고기가 즐거이 놀고 새가 지저귀니 이것이 본래 공(公)의 뜻이 아닐까? 골짜기의 풀잎은 푸르러 때 묻지 않고 옛 선현들이 남긴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니, 글 속에 든 공의 값진 교훈(敎訓)에 감사드리네.
~권청일(權淸壹)의 초간정술회(草澗亭述懷)~


초간정의 가을원경(강충세.2009)

초간정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별서이다. 1582년 권문해가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612년 후손이 고쳐지었다. 병자호란 때 또 불타 없어진 것을 1642년 후손 권봉의가 다시 세웠고, 현재의 건물은 1870년 후손들이 한 번 더 고쳐 지은 것이다.

정자건물은 원류마을 앞 굽이쳐 흐르는 계류 옆 암반위에 막돌로 기단을 쌓고 지었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왼쪽 2칸에다 온돌방을 만들어 사방으로 문을 달았고 그 외의 부분에는 대청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초간정의 겨울원경1(강충세.2010)


초간정의 봄근경(강충세.2009)

정자 앞 계곡 건너에는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숲이 있고 그 사이로 놓인 기암괴석들과 바위가 절경을 이룬다. 초간정 주위로는 노송 외에도 참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의 오래된 수림이 운치 있게 조성되어있다. 정자마루에 앉아 숲과 기암사이로 시원하게 흘러가는 계류를 보고 있노라면 실로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너른 망루와 아담한 온돌방, 기둥과 지붕을 이루는 나무의 직선과 곡선이 아름답다. 초간정사현판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전설도 초간정에 대한 흥미로움과 신비감을 느끼게 해준다.

“초간정사(草澗精舍)란 현판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다. 후손들은 이를 찾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또 다른 어느 날 영롱한 무지개가 떠올라 이 정자 앞 한 장소에 한참을 비추는 것 아닌가? 신통한 생각이 들어 파보니, 거기에 잃어버린 현판이 나왔다.”


초간정 내부에서 본 외원(강충세.2009)


초간정의 겨울근경(강충세.2010)

작정자 권문해(權文海: 1534-1591)는 자가 호원(灝元), 호가 초간(草澗)이다. 1534년(중종 29년)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에서 출생하였고,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서애(西厓: 1542~1607), 학봉(鶴峰:1538~1593), 동강(東岡:1540~1603)선생 등과 동문수학하여 동인(東人)에 속하였다. 성품이 어질었고 정직청렴, 충직 신의가 있었으며 효성스러웠다. 관직으로는 승정원 좌부승지, 관찰사를 거쳐 사간(司諫)을 지내었다. 저술로는 우리나라 단군 이래 선조 때까지의 풍물과 잡학을 모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이 있고 “초간선생문집(草澗先生文集)”, “초간일기(草澗日記)” 등이 있다. 대동운부군옥에는 우리나라의 지리, 국호, 성씨, 효자, 열녀, 산명, 화명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저술은 초간선생이 관직을 사직하고 초간정에 머물며 집필한 것이다.

초간선생은 정통 성리학을 이어받은 유학자이다. 조선조 선비들의 공통된 생활의식을 좇아 퇴관하여 향리에 내려와 경승지에 정사를 짓고, 강학과 집필에 힘쓰며 여생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초간문집에는 여타의 지방 선비들과 같은 풍류시(風流詩)나 위락적 심경을 읊은 시문은 찾아볼 수 없다.


초간정의 가을근경(강충세.2010)


초간정의 본제앞뜰에는 방지연못과 향나무가 있고 뒤편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보인다.

초간이라는 이름은 당시(唐詩)의 “독인유초간변생(獨燐幽草澗邊生:시냇가에 자란 그윽한 풀포기가 홀로 애처롭다)”이라는 구절에서 “草澗”의 두 글자를 따왔으며, 주렴계(周濂溪)가 말한 바대로 “수면에 이는 잔잔한 물결의 흔들림”을 이곳에서 즐기려 하였다고 “초간정사사적기(草澗精舍史蹟記)”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정자의 명칭은 풍류를 즐기기 위한 별서정자이기보다 강학과 집필을 위한 장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로 초간선생은 향리인 죽림동 본제(本第)에 기거하면서 이곳을 왕래했고, “대동운부군옥”이라는 백과사전을 집필하였으며, 그의 아들 죽소 권별(竹所 權鼈) 또한 이곳에서 인물사전인 “해동잡록(海東雜錄)” 전 14권을 집필하였던 것이다.

초간정은 본가가 있는 죽림동에서 서북쪽으로 약 5리 떨어진 계류에 위치한다. 초간정의 입지는 전면부의 시부령, 국사봉, 북두루미산이 정자일원을 병풍처럼 위요하며 자연하천인 금곡천(金谷川)이 흐르는 가장자리 터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초간정사중수기(草澗精舍重修記)에는 “공이 공주에서 돌아와 죽림(竹林)에서 북서로 5리가량 떨어진 곳에 큰 모퉁이를 돌면, 물길이 만나는 곳에 뾰족한 바위 틈새로 못이 있고, 이끼가 끼어 가경을 이룬 곳이 있는데, 이 골짜기의 남쪽기슭에 정사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죽림이란 권문해의 본가가 있는 마을을 얘기하며 현재 권문해의 13대손 권영기(權榮基: 1937년생)씨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초간정의 본제(강충세. 2010): 본제 좌측으로는 아미산 본제 우측으로 백마산 금당실마을 지나 멀리 보이는 학가산(882m)이 주작역할을 한다.



본제 뒤편에서 본 마을의 외원(강충세.2010): 뜰 넘어 용문면소재지의 금당실마을과 송림이 보이고 멀리 보이는 것이 학가산 자락이다.


죽림동의 종가 전체는 사랑채가 보물457호로 지정되어 있는 사적이다. 이 종가는 왼쪽으로는 백마산, 오른쪽으로는 아미산으로 둘러싸여있고 앞으로는 탁 트인 들판 너머의 금당실 소나무숲, 멀리로는 주작역할의 학가산(鶴駕山: 882M)과 마주보고 있어 대표적인 풍수길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초간선생은 죽림동 향리에 머물며 경승지를 찾아 매일 북두루미산의 산자락을 따라 오가며 산책과 명상에 잠겼을 것이다. 이것은 정원의 영역이 단순히 울타리 안의 것이 아니라 외원, 바라보이는 외부영역까지를 대상으로 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초간정 위치도초간정은 충북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줄기 아래로 흐르는 금곡천을 끼고있고 용문사가 가까이에 있는 저 산간지대에 위치한다.



초간정 외원도(김영환.2014): 학가산 쪽에서 본 초간종택과 초간정좌로는 국사봉(727m), 우로는 매봉(855m) 이 있고그 사이로 운암지와 금당지물이 초간정을 거쳐 금곡천을 이룬다그리고 금곡천은 다시 금당실마을 반대편쪽에서 흘러오는 한천과 만나 내성천으로 합류된다.


이 정원은 본시 정사이었으므로 현재 광영대(光影臺)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은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마루 끝에 하인이 기거하는 살림방이 있었으며, 정자건물 바깥에 서고인 백승각(百承閣)의 건물도 있었다. 진입 공간 암반위에는 석조헌(夕釣軒), 하수헌(花樹軒)이 있었고, 마당일원에는 방지(方池)연못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이 정원의 구성은 광영대(光影臺)의 벽체를 경계로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이 엄밀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정자에는 주인과 각별한 친분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신성한 곳으로 인식되었고 며칠씩 기거하거나 교유인물의 접대를 위하여 하인의 살림집이 부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초간정 내원도(김영환.2014)

초간정을 가기 위해서는 죽림동 정침에서 고개를 넘고 산모퉁이를 돌아야 한다. 초간정의 경관은 이미 멀리 떨어진 본제에서 고개를 넘고 산모퉁이를 돌 때부터 시작한다. 멀리서 보이는 초간정이란 정자는 전체 자연현상의 한 폭의 산수화 중 1개점에 해당된다. 따라서 초간정의 별서는 주변의 자연, 우주를 망라해서 대상을 삼아야 하고 영역을 설정하게 되는 것이다. 정자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계류를 건너야 하며, 돌아서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다리를 건너오면, 관찰자는 정자의 뒷면을 보게 되고 초간정의 건물이 가깝게 다가옴에 따라 조금 전까지 느끼던 그림속에서의 정자의 인상은 곧바로 현세적 의미로 돌아오게 된다.


초간정의 여름원경2: 초간정에 진입하는 우측경관


초간정의 겨울원경2(강충세. 2009)

초간정의 대문을 들어서면서 낮은 담에 의해 안정감을 갖는 마당이 나타나고, 초간정이라고 쓴 정자의 편액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에서 관찰자는 조금 전에 그렇게도 생생하게 들렸던 물소리와 바람소리는 순간 사라지고, 소리는 회화나무소리와 정자에서 글 읽는 소리로 바뀐다. 시각적 대상도 자연히 사람이 관계되는 곳으로 움직여 간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창틀을 통해 만들어지는 그림액자틀의 조망이다.

여기서 아까까지 보아왔던 경관은 주위의 배경이나 여러 가지의 환경요소가 절제된 채, 자연이라고 하는 추상적 인상이 강하게 전달되는 상황이 연출된다. 안에서 밖으로 내다보는 경관은 훨씬 선명하고 상징적이고, 추상적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경관은 자연이라고 하는 관념적인 매체와 현실적인 실경으로 관찰자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초간정 입구에서 본 내원 근경

초간정. 권문해의 수양하는 마음과 학문이 배어있는 곳.

지금부터 25년 전인 1989년 나는 초간정의 본제인 죽림동 사랑채에서 자고 혼자 걸어서 초간정까지 2km의 길을 걸었었다. 그리고 5년 후 다시 그 길을 우리 가족과 함께 걸었다. 옛날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은 이미 사라져버려 새로운 길을 개척하면서, 가시덤불을 헤치며 논두렁, 밭두렁을 건너 멀리 초간정을 쳐다보며 걸었다. 권문해 선생은 이 길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산모퉁이를 돌아 고개를 넘고 초간정을 내려다보며 그가 어떤 꿈과 의지를 가졌을까를 상상했다.

이제 이 길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칸트의 철학의 길’처럼 ‘권문해의 사색의 길’로 개발해서 탐방객들에게 걷게 하면 어떨까? 본제에서 초간정까지 스토리텔링을 통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자동차길이 아닌 걸어서 가는 길을 복원하면 어떨까? 그러나 이곳은 2010년 이후 입구에 주차장과 보건소 건물이 들어서고 유원지성격의 출렁다리가 생겼다. 주민편의와 관광객을 위한 다른 시설들도 들어설 채비 중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러한 인위적인 시설들은 지양되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보다 친숙한 사유의 공간을 연출해야 한다.

초간정은 선비들이 사색하며 살았던 우리의 자존심 같은 공간이다. 모쪼록 향후 초간정은 선비가 자연 속을 거닐고 선비가 철학을 사유했던 영남의 대표적인 공간으로서 잘 보존시키고 정비해나갔으면 싶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조상과 후손에게 떳떳해질 수 있는 정도(正道)이고, 사명이기 때문이다.


초간정의 봄원경(강충세.2009)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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