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로운 돌이 가득한 지당정원, 영양 서석지(瑞石地)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17회
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7-04




梅菊雪中意  매화와 국화는 눈 속에서 뜻을 두고

松篁霜後色   소나무 대나무는 서리 내린 뒤에 제빛을 내누나. 

遂與歲寒翁  마침내 세한지송백(歲寒知松:/잣나무의 푸르름)과 같은 늙은이가

同成帶礪約  대려지서(帶礪之誓:우국충절과 선비정신)의 약속을 함께 이루누나.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1577-1650)의 사우단(四友壇)-

 

청송에서 영양군 입암면 소재지를 지나 청암교를 건너 달리다보면 커다란 절벽바위가 나타난다. 이름 하여 선바위(塔巖). 건너편에는 산세가 가파르게 깎아져 내려온 듯한 Y자형의 뾰족한 기암절벽이 얼굴을 쑤욱 내민다. 양쪽의 기암절벽은 연당리를 들어가는 대문 형상을 한다 하여 석문(石門)이라 불린다. 석문 아래 선바위를 끼고 흐르는 반변천과 남이포(南怡浦). 맑고 투명하기 그지없다.

 





선바위의 기묘하게 생긴 모습은 주변의 수림, 하늘 색깔까지 겹쳐져 마치 거울 호수(Mirror Lake)같다. 중국 구채구의 연못과 뉴질랜드 밀 퍼드 사운드의 밀러레이크(Mirror Lake)가 이곳의 경치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반변 천 옆 도로변에 우뚝 솟은 선바위에는 남이포(南怡浦)와 함께 남이장군(1441-1468)의 전설이 전해져온다.

 

"남이포 인근에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용이 역모를 꾀해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용을 토벌하기 위해 남이장군을 파견했다. 남이장군은 치열한 교전 끝에 용 두 마리의 목을 베고는 석벽에다 자신의 초상을 검 끝으로 새겼다. 그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려다 지형을 보니, 언젠가 도적의 무리가 일어날 기세인지라, 큰 칼로 산맥을 잘라서 물길을 돌렸는데 그 칼질을 한 흔적이 바로 선바위라는 것이다."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 한 후, 함경북도 길주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1467)을 평정한 공으로 25세에 일약 병조판서가 된 풍운아 남이장군. 유자광(1439-1512)의 모함에 의해 26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선바위는 서석지를 지키고 있다. 남이포는 매가 날기 위해 날개를 활짝 펼친 형상으로 매의 부리 부분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거울 같은 반변천에 반영을 드리운 남이포가 옅은 물안개 속에서 금방이라도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를 기세로 서석지를 경호하는 형세다.

 

서석지는 영양에 있는 석문 정영방(1577-1650)의 별서로 역사적 유래가 있고 자연경관이 수려한 정원이다.

 





정영방은 예천 용궁면에서 태어나 정경세(鄭經世)에게 사사를 받았다.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퇴계 학파의 제자이다. 1605(선조38)년 성리학과 시에 능하여 진사(進士)에 합격한 뒤에 벼슬에 나아갔으나 광해군의 실정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의 후손이 남긴 임천산수기(林泉山水記)에 의하면 병자호란 이후 세상이 어지럽자, 정영방은 이곳 연당리를 현인군자가 은거하기 좋은 곳이라고 여기고 별서처(別墅處)로 정했다.

 

정영방(鄭榮邦) 1610년부터 1636년경까지 주거공간인 수직사, 서재인 주일재, 정자인 경정, 그리고 연못에 이르기까지 서석지의 내원을 완성한다. 서단에는 6칸 대청과 2칸 온돌이 있는 경정(敬亭)을 세웠고 북단에는 주일재(主一齋)란 정자를 축조하여 운서헌(雲棲軒)이라 편액 하였으며, 앞에는 방지 형태의 연못을 팠다. 경정의 뒤편에는 수직사(守直舍) 두 채를 두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고 북단의 서재 앞에는 못 안으로 돌출한 사우단(四友壇)을 축성하여 송···국을 심었다.

 

정자인 경정(敬亭)은 대청과 2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루에 앉아 서석지를 바라보면 정자는 물속에 선 듯하다. 경정의 경()은 유학자들에게 있어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었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곧 경()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정원에 은거하며 평생 경()을 추구했다고 한다.

 




 


 

연못은 동서로 길며, 가운데에 돌출한 사우 단을 감싸는 U자형을 이루고 있다. 연못의 석벽은 그 구축법이 매우 가지런하고 깔끔하다. 연못을 판 이유는 마을의 주산인 대박산(766m) 아래 자양산(430m)을 주산으로 볼 때, 안산격인 나월산(271.5m)의 화기를 막기 위한 풍수적 이유가 있다고 하였다. 풍수의 형상을 전체적으로 보면, 영등산(507m)에서 시작된 산맥과 일월산에서 시작된 산맥이 탑암(塔巖)에 와서 서로 만나고, 흥림산(767m)에서 시작되는 청기천(靑杞川:동천)의 맥 또한 입석에서 탑암의 맥과 만난다. 즉 내원의 입구에 해당하는 입석에서 세 갈래의 기가 응집되는 형상이다.

 

"상서(祥瑞)로운 돌이 가득한 지당(池塘)"이란 뜻의 서석지(瑞石池)는 주어진 환경을 잘 살린 정원으로도 품격이 높다. 그 중에서도 서석군은 연못 바닥을 형성하는 크고 작은 암반들이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 있는 것으로 그 돌 하나하나에 모두 명칭이 붙어 있다. 특히 연못 바닥에는 수면 아래에 가라앉은 30여개의 자연석과 수면 밖으로 드러난 60여개의 자연석 등이 수면 안팎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석은 모양에 따라 생물과 자연현상등을 나타낸 봉운석(封雲石:학의 머리를 두르고 구름을 머금은 바위), 상운석(祥雲石:상서로운 구름 돌), 조천촉(調天 燭:광채를 뿜고 하늘과 조화되는 바위), 낙성석(落星石:별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 화예석(花蘂石:꽃과 꽃술을 감상하는 바위), 희접암(戱蝶巖:나비가 날아다니는 바위), 와룡암(臥龍巖: 못 속에 웅크려 누워있는 용형상의 바위), 어상석(漁狀 石:물고기 형상의 바위)이 있어 소우주를 형성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신선의 세계를 기원하는 선유석(仙遊石:신선이 노는 바위), 천유암(遷遊岩), 난가암(爛可岩:도끼자루 썩는 바위), 기평석(碁枰石:바둑판바위)이 있다.


또한 주인의 의지를 반영한 통진교(通眞橋:선계로 건너갈 수 있는 바위), 수륜석(垂綸石:낚싯줄 드리우는 돌), 탁영반(濯纓盤: 갓끈 씻는 바위) 등이 흩어져 있다. 특히 여기서 탁영(濯纓)이란 갓끈을 씻고 신선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더러우면 발을 씻는다는, 세상에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가린다는 뜻으로 유가의 출처관(出處觀)을 나타낸다.

 

이러한 돌들을 대상으로 서석지의 풍경을 상상해보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서석지에서 노닐고 있다.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모르고 바둑을 두는가 하면, 낚싯줄을 드리운다. 꽃이 만발한 연못 위로 나비가 날아다니고, 용은 물속에서 편안하게 누워 잠을 자며 물고기는 자유로이 헤엄을 친다. 하늘에는 은하계 모양의 뭉게구름, 마치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조각구름, 광채를 띄고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별똥별. 거기서 갓끈을 매고 승천하여 통진교 다리를 건너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려 하는 선비....... " 이것은 은일(隱逸) 하고있는 정영방 자신의 심정을 정원 속에 의미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석문에서 서석지까지 들어가는 지역은 무언가 무릉도원을 찾아들어가는 기분이다. 좌회전하여 마을을 따라 올라가면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이 있고 대형 느티나무 아래 이어진 사현암(四賢岩:거북바위)암반 위로 청기천의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진다. 석문선생이 이 하천을 임천(臨泉)이라 칭하고 이준(李峻),오익(吳瀷),김시온등과 천렵을 하며 시문을 짓던 곳이다. 그리고 다시 우측으로 들어가 만나게 되는 곳이 서석지(瑞石池), 수십만 평 별서정원의 중심인 내원이 자리 잡고 있다. 서석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낮은 흙 담 너머에서 솟아오른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와 만난다. 이 나무는 선생의 부인이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 전한다. 정영방 별서의 중심은 분명 담으로 둘러쳐진 이 서석지 원이다.

 

그러나 서석지를 담장 안의 내원 1,530m2 규모의 정원만으로 얘기 할 수는 없다. 서석지 바깥의 청기천(동천)과 마을 안 풍경들, 그리고 석문 밖 반변천의 경관이 있음으로써 서석지가 빛난다.

 







따라서 서석지는 일월산(1,219m), 대박산(726m),자양산(430m)의 지형이 내려와 형성된 마을 위에 조성한 정원을 내원(內園), 내원에서 석문까지 영등산(505)과 나월산(271m),부용봉(376.4m), 사현암(거북바위) 및 청기천일원은 외원(外園)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내원에 이름을 붙이듯 외원에도 구포담, 입석, 구암, 문암 등 이름을 붙여 사색하면서 자신을 다스리는 지혜로 활용했다. 

 

선생에게는 임천, 돌 배기(흰 돌이 많이 나는 곳), 선바위와 자금병 병풍 바위, 주역(駐易) 등 서석지 주변 일대 45만평이 모두 외원이었던 셈이다. 정영방은 이곳을 선정할 때 마을 입구의 경관도 중요시 한 것이 분명하다. 서석지 입구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정원요소로 보았다는 내용이 석문 문집 여러 곳에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청송에서 석문, 영양에서 석문까지의 주변 경관은 서석지로 들어가는 내원과 외원에 영향을 준 영향권원(影響圈園)이라고 정의해야 마땅하다.

 


 

현재 서석지는 물의 순환이 원활하지 못해 수질이 맑지 못하다. 과거에는 서석지의 배수시설인 읍청거(挹淸渠)와 토예거(吐穢渠)가 이 역할을 수행했었다. 입수구인 읍청거(挹淸渠)는 맑은 물이 흘러들어오는 도랑이란 뜻이고 배수구인 토예거(吐穢渠)는 더러움을 토해낸다는 뜻이다. 입수구와 배수구는 물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대각선상에 위치한다. 입수구는 훤히 드러나 있고 배수구는 쉽게 보이지 않는데, 들어오는 물을 보는 것은 좋은 경관요소이나 나가는 물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읍청거와 토예거는 바싹 말라 있다. 물은 주일재 뒤 동네 안길 옆 도랑에서 흘러들어 온다. 도로가 포장되면서 콘크리트 하수관이 매설되자 암거수로가 차단되어 물길이 끊어졌다. 원래에는 사우단 아래에서 지하수도 솟아났는데, 그 기능 역시 상실되었다. 이 또한 물 기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 정원 바깥 부분에서 물이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하고 지하수도 원활히 나올 수 있도록 하여 물길을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

 

상서로운 돌이 가득 차고, 매화,연꽃,국화. 가을 단풍이 장관을 이루는 정원 서석지. 남이장군의 전설로 신비의 석문을 형성하고 있는 경승지 남이포. 석문 반대편으로는 호텔 등 관광시설들이 들어서고 다리가 놓아졌으며, 각종 개발이 추가될 기미다. 개발에 대해서는 서서히, 그리고 보존에 대해서는 보다 철저히 하여 남이포와 석문 주위의 경관을 천연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유지해야 한다.

 


 

아름다운 주변경관과 함께 고즈녁이 잘 남아있는 대표적인 별서정원 서석지. 원형을 잘 살리고 주변의 개발을 최소화함으로써 석문 정영방 선생이 이곳에 와서 은일한 기본 선비정신, 철학적 사고와 학문적 깊이를 되살려 나가야 할 것이다. 

 



 



 



 




 

 

 

글·사진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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