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아래 펼쳐진 가사문학의 산실 환벽당 원림(環碧堂 園林)

[조경명사특강]이재근의 ‘한국의 별서’ 26회
라펜트l이재근l기사입력2014-09-05


微雨洗林壑(미우세림학) / 이슬비가 숲속을 씻고 가니,
竹與聊出遊(죽여료출유) / 대나무가마 타고 놀러 갈 만하네.
天開雲去盡(천개운거진) / 하늘이 열리고 구름 또한 걷혔고
峽坼水橫流(협탁수횡류) / 골짜기의 물은 넘쳐 흘러가네.
白髮千莖雪(백발천경설) / 백발은 천 가닥의 눈빛으로 서려있고,
蒼松五月秋(창송오월추) / 푸른 소나무는 오월에도 가을이로다.
飄然蛻螘穴(표연세의혈) / 개미가 홀연히 구멍을 훌쩍 떠나가더니
笙鶴戱瀛洲(생학희영주) / 생황이란 악기와 학은 영주(瀛洲)를 희롱하네
-임억령(林億齡:1496-1568). 차환벽당운(次環碧堂韻)-


환벽당 연못과 경사지모습(강충세.2013)

환벽당(環碧堂)은 무등산아래 광주호 상류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조선 중기의 충신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1540년 지은 별서이다. 김윤제는 인근 충효마을에서 태어나 1528년 진사(進士)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며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사화와 당쟁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문하생들을 기르고 유유자적하며 생을 살았다.

환벽당의 당호(堂號)는 조선전기의 화가 아차산인(峨嵯山人) 신잠(申潛:1491-1554)이 지었는데, “지형이 청산녹수(靑山綠水)로 둘러있고. 전후좌우에 창송(蒼松) 청림(靑林)이 가득하고 푸르름이 사방에 둘러쳐져 있다” 라는 뜻이다.


환벽당 근경


환벽당 마루에서 본 외원(강충세.2013): 앞으로는 내원이 있고 멀리 무등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송강(松江) 정철(鄭澈),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조자이(趙子以) 등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환벽당이 있는 곳은 무등산 북능으로 북봉을 거쳐 꼬막재로 이어지는 능선끝자락에 위치한다. 본제(本第: 살림집)는 북쪽 고개 넘어로 300m정도 떨어져 있다. 환벽당에서 보면 광주와 담양을 경계로 흐르는 증암천(창암천: 蒼巖川)이 있고 남쪽 무등산에서 북쪽 성산에 이르는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당주변에는 사촌 김윤제(金允悌)가 살았던 충효마을과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 살았던 지실마을, 소쇄옹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살았던 창암촌이 있어 이 일대가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중심지역이였음을 알 수 있다.


환벽당과 광주호주변(광주시.2014) 


충효마을무등산아래 뿌리내린 충효마을은 600년이상의 역사를 지닌 반촌으로서 광 산김씨 사촌 김윤제가 살았던 본제(本第)가 있다또한 충효동 왕버들군이 천연기념 물539충효동 도요지가 사적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수백 년 동안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으며, 한결같이 승경에 탄복하여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1525-1597)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7-1596)과 김덕보(金德普: 1571-1627) 형제는 광산김씨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받았다. 송강 정철은 16세 때부터 관계에 나갈 때까지 10년이상을 환벽당에 머물면서 김윤제에게 수학을 받은 애제자이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바로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형에게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


환벽몽유도원(김영환.2013): 배롱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여름 김윤제가 창암천 용소(龍 沼)에서 미역을 감던 정철 소년을 부르는 장면을 형상화하여 그렸다좌측으로는 충 효마을 본제로 통하는 소로길이 있다.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학문과 시를 배웠다. 김윤제는 그를 자신의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현재 영일 정씨(迎日鄭氏)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고 2013년 11월 국가명승(명승 제107호)이 되었다.


환벽당 원경(강충세.2013)

일찍이 면앙정 가단(俛仰亭 歌團)의 창설자 송순(宋純:1493-1582)은 “소쇄원과 식영정, 그리고 환벽당을 일컬어 한 동네에 3 군데 명승이 있다”라고 칭송 하였다. 환벽당은 이제 명승으로 기지정 되었된 소쇄원(瀟灑園: 명승 제40호), 식영정(息影亭: 명승 제57호)과 함께 국가명승지로서 인정을 받아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의 면모를 갖추게 된 셈이다.

환벽당은 본제가 가까이 있는 가택결합형(家宅結合型) 별서로 원림의 공간구조는 담장 안의 내원(內園)과 담장 밖의 창암천(蒼巖川), 용소(龍沼), 조대(釣臺) 등의 외원(外園), 멀리 바라보이는 무등산 자락 등의 영향권원(影響圈園)으로 구분된다.


환벽당 입구 창암천

환벽당 주위로는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 배롱나무들로 둘러쳐져있고, 무등산아래 원효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창암천의 물과 물가의 배롱나무(자미:紫薇 )가 대비되어 단아한 정취를 풍긴다. 멀리 병풍이 쳐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등산의 풍광은 차경효과(借景效果)가 압권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로 방의 형태는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有室形) 정자이다. 환벽당 아래에는 낮은 경사 지형을 살려 담장을 두르고 화강석을 둘러 연못을 조성하였다. 봄철에는 미나리, 창포, 부레옥잠, ,연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연못과 경사지주변에 널려있고 여름에는 붉은색의 꽃무룻( 상사화)이 장관을 이룬다.


환벽당의 여름(여름광주시.2013): 건물뒤로 배롱나무가 보이고 경사지에는 꽃무릇(상사화)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환벽당의 초기 모습은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 지은 “환벽당”시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소세양은 시의 서문에서 “나주목사 김윤제..., 그는 일찍이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광주의 서석산 동쪽에 있다.이곳은 천석(泉石)과 죽목(竹木)의 아름다움이 극치이다. 시냇가에 대(臺)를 쌓았는데, 그 높이가 열 길은 되고 시냇물이 대 아래에까지 이르러서는 휘돌아 모여서 깊은 못을 이룬다. 원래의 아름다운 장소에 넓혀서 더 꾸며놓으니 정자는 빛이 나고 승경(勝景) 또한 기이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은 김윤제가 나주목사를 지낸 후에 쓴 것으로 환벽당은 김윤제가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뒤에 더 넓히고 새롭게 꾸며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170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환벽당의 모습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조선후기의 성리학자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이곳을 방문한 내용을 담은 『南遊日記』에서 “벗 양경지, 채지와 택지의 아들 둘이 와서 모여 함께 환벽당으로 갔다.

커다란 대나무와 단란(檀欒)의 울창함이 백 이랑이나 되는 언덕에 그림자를 비치었다. 축석하여 낚시터를 만드니, 수백칸은 될 만하고, 지극히 즐길 만하다. 당우(堂宇)는 밝아서 진실로 상쾌하게 살 만하며, 집의 서쪽 층계에는 매화와 동백을 심고, 중간에는 작은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어놓아 골골마다 묘함을 더했다. 당에 앉아 봇물을 바라보면, 반짝반짝하는 푸른 물결이 대나무 사이에서 생겨난다. 소나기가 얼핏 내리자 소슬한 바람소리가 흥을 돋우니 이에 시 한 수를 남기고 돌아간다.”라고 썼다.


환벽당 배치 평면도

무등산에서 뻗어 내린 다른 계곡과는 달리 원효계곡은 일찍부터 전대의 사찰문화를 누르고 새로운 사림문화를 일으켜 세웠다. 소쇄원(瀟灑園), 식영정(息影亭), 환벽당(環碧堂), 취가정, 풍암정(楓岩亭), 명옥헌(鳴玉軒), 송강정,(松江亭) 면앙정(俛仰亭)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자(亭子)와 원림(園林)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탓에 이곳을 '정자문화권' 또는 '가사문학권'이라 불러왔다. 이곳은 당대 지식인들이 자연을 음풍농월(吟諷弄月)하고 시문 창작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원효계곡 계산풍류(溪山風流)의 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환벽당의 외원(김영환.2014): 환벽당과 김윤제의 본제를 중심으로 주변의 풍경을 진경 산수화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환벽당을 드나들던 학자들 대부분은 호남사림으로 서로간의 정신적 유대감이 깊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1519)와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를 거치면서 시대의식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다.

가사문학에서 큰 역할을 했던 정철은 식영정의 성산별곡(星山別曲)에서 조대(釣臺)에 얽힌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환벽당을 추억했는데 매우 아름다운 장소로 극찬했다.

次環碧堂韻(차환벽당운) / 환벽당 운에 차하다 - 정철(鄭澈)
一道飛泉兩岸間 한 줄기 샘물이 양 언덕 사이에 날리우고
採菱歌起蓼花灣 여뀌꽃 물굽이에 마름 캐는 노래가 이네.
山翁醉倒溪邊石 산 늙은이 시냇가 돌에 취해 누우니
不管沙鷗自往還 아무려나 모랫가 갈매기는 왔다 갔다 하는고나


김성원 서하당유고』 성산계류탁열도 (1590)

환벽당과 식영정을 잇는 창암천의 다리는 과거에는 무지개 다리였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그동안 산업용으로 물 저장을 위해 댐 수위를 높혀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하는 당국자들이 있어 갈등이 많았다. 그렇게 되면 용소와 조대 등의 흔적은 그나마 물에 다 잠기게 된다.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은 간과된 채 경제논리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근시안적 견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의 다리는 콘크리트 다리로 하부에는 평소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수마가 한번 할키고 지나가면 더욱이나 오폐물들이 여기저기 쌓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사촌 김윤제가 미역감던 정철을 만났다고 하는 용소(龍沼)는 퇴적물이 쌓여 용소로서의 기능을 잃었고, 조대와 주변으로는 수목이 많이 고사함으로써 옛날의 풍치가 나지 않는다. 이제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감한 복원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무지개다리와 용소, 조대등이 복원되고 소나무와 배롱나무, 버드나무 등의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 충효마을에는 김윤제의 본제건물이 복원되고, 환벽당과 연결되는 소로를 만들어야 한다. 내원의 작은 연못은 고증을 거쳐 정비하고 김창흡(金昌翕)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서 축석하여 수백칸이 되었다고 하는 낚시터를 복원해 주어야 한다.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에 관한 전설에 대해서는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홍보하고 소쇄원, 가사문학관,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독수정으로 연결되는 올레 탐사길을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무등산아래 원효계곡, 창암천을 중심으로 한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등 정자원림 문화권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환벽당 위치도환벽당을 중심으로 주변의 정자원림과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영산강까지의 수체계(水體系)를 그렸다.


이재근 교수(전)의 '자연과 철학을 담은 정원, 한국의 별서'는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헤리티지채널의 '명사칼럼'을 통해 기사전문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헤리티지채널은 국민의 문화유산 애호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한 고품격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문화유산 전문 채널입니다. 라펜트 조경뉴스는 이재근 교수의 조경명사특강을 헤리티지채널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씩 게재하고 있습니다.

_ 이재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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