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색시와 여종의 애잔한 전설, 김천의 ‘방초정(芳草亭)’

[조경명사특강]이재근의 ‘한국의 별서’ 27회
라펜트l이재근l기사입력2014-09-12


金烏山上起朝雲 금오산 위 아침 해 솟으니 
如火如綿自動雯 불인 듯 솜인 듯 스스로 구름이 움직이는구나
莫道人間引雨氣 인간이 비기운을 유인한다 말하지 마라
玉樓高處降仙君 옥루 높은 곳에 신선이 내려 왔노라
漁火螺潭竟夜明 올뱅이 도랑에 고기잡이 불 밤새도록 밝히니
鴈鴻疑月落沙平 기러기가 달인가 의심하고 모래밭에 떨어지는구나
歸時人問江南景 돌아갈 때 사람들이 강남 경치 묻거든
芳草高亭最有名 방초 높은 정자 가장 유명하다고 하여라
-작자미상. 방초정십경(芳草亭十景)중 금오조운<金烏朝雲>)과 나담어화(螺潭漁火)-


방초정 위치도방초정의 위치를 표현방초십경에 나오는 금오산 등 방초정에 영향을 주는 주변의 관련대상지들을 나타냈다.


우리 선조들은 풍광이 빼어난 곳에 자연을 즐기고자 정자를 짓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곤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부친의 안녕을 위하거나 조상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짓기도 하고 그것을 훗날 자신의 별서처로 삼기도 했다.

방초정(芳草亭)은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구성파출소를 지나 원터마을 입구 상원리에 위치하고 있다. 1625년(인조3년) 이곳 출신의 유학자 연안이씨 (延安李氏) 방초(芳草) 이정복(李廷馥, 1575-1637)이 지은 정자이다. 후에 작자미상의 한 시인은 이 주변경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방초정십경(芳草亭十景)이란 시문을 남겼다. 방초정은 주변 1km내외의 구릉지아래 원터마을이 있고 그 마을 입구에 위치하여 멀리서 보아도 부각되며, 앞의 두 개의 섬이 있는 연지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방초정원경(정면강충세.2014)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특이한 사연이 담겨져 있다. 정자 앞에 최씨담(崔氏潭)이라 부르는 네모난 연못의 사연이 바로 그것이다. 그 사연인즉, 최씨 부인의 열녀비와 최씨부인을 따라 못에 빠져 죽은 종 석이에 관한 전설이다. 방초정 옆에 있는 정자각에는 ‘절부 부호군 이정복 처증 숙부인 화순최씨지려(節婦 副護軍 李廷馥 妻贈 淑夫人 和順崔氏之閭)’라고 쓴 비각과,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婢)’라고 쓰인 작은 비석이 이 전설과 관련이 있다.

“이정복과 혼인한 새색시 최씨 부인은 꿈같은 친정에서의 신혼생활을 마치고 신랑은 벼슬임지로 간 상태에서 홀로 시댁으로 가는 신행길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왜군들에 관한 소식에 속이 타들어갔고 시댁으로 가야 할지, 친정에 머물러야 할지 걱정이었다. 부산 쪽에서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이 침략해 물밀듯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댁에서도 인편을 통해 난리 통에 위험하니 그냥 친정에 머물러 있으라는 전갈이 왔다. 그러나 친정부모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출가를 했으니 사나 죽으나 시댁 귀신이 되어야 한다며 조용히 딸에게 시댁으로 떠나도록 강요했다.

17세의 어린 신부 최씨는 마땅히 시집간 며느리로서 시댁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죽더라도 시댁에 가서 죽겠다며 몸종과 함께 신행길을 재촉했다. 최씨 부인은 몸을 숨겨가며 40여리 길을 걸어 마침내 시댁 마을 어귀에 당도했다. 이제는 도착했구나 하고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돌연 들이닥친 왜병들과 마주쳤다. 왜병들에게 잡혀 능욕을 당할 위기에 처한 최씨 부인은 결국 정절을 지키기 위해 마을 앞 웅덩이로 뛰어들고야 말았다. 이때 부인을 따르던 몸종 석이도 나 혼자 살아 왜군들에게 능멸을 당하느니 주인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의롭다 판단하고 연못에 뛰어들어 같이 죽었다.”


방초정도(김영환.2014): 여름날의 방초정과 주변의 모습을 진경산수화기법으로 표현했다.

방초정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최씨부인이 물에 빠져 죽고난후 신랑 이정복은 벼슬임지에서 돌아와 부인을 잊지 못해 여러 해 동안 웅덩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후손을 봐야한다는 문중의 권유로 훗날 재혼은 하였으나 못 옆에 정자를 지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먼저 간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정자가 방초정이며, 웅덩이를 확장하여 개축하고 최씨의 연못이라는 의미로 최씨담(崔氏潭)이라고 명명했다.”


방초정원경(우측면강충세.2014)

연안이씨(延安李氏)집성촌인 원터마을에서 방초정의 본제(本第)는 정양공종택(靖襄公宗宅)으로 마을입구에서 안으로 쭉 들어가 산자락아래에 있으며, 지금도 후손 이철응(李哲應)선생이 종택을 지키고 있다.

방초정을 지었던 이정복(李廷馥, 1575-1637)은 정양공(靖蘘公) 숙기(淑琦)의 5대손으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호는 방초(芳草)로 초야의 풀과 같은 생을 살고자 하였으며 벼슬은 부호군(副護軍: 종4품)을 역임했다. 공이 18세에 성묘를 갔는데 임진왜란이 터져 지례 능지산(陵旨山) 중에 있는 선영하(先塋下)에서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선조가 피난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 현지로 달려가 임금을 모시려 했지만 이미 적이 사방에 가득한지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난리가 끝나자 그는 십오공신희맹록(十五功臣會盟錄)에 공신으로 기록되었고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긴 나머지 나라에서는 김천승(金泉丞)이란 보직을 내렸으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후에 벼슬길에 잠시 나아갔고, 귀향한 후에는 오직 유학(儒學)에만 전념하였다. 방초정(芳草亭)은 이런 와중에 지어졌고 이정복은 이곳에서 석학들과 교류하며 학문에 전념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방초정 정자내부에서 본 방과 외원(강충세.2014)

방초정은 가마를 탄 2층 누각의 팔각지붕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건물이다. 2층에 문을 달아 이를 걷어올리면 마루가 되고 내려 닫으면 방으로 쓸 수 있게 온돌을 넣었으며, 정자사방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다. 정자의 아래층은 자연미를 살린 통나무 기둥에 2층 온돌방의 불을 지피는 아궁이, 굴뚝의 기능을 하는 호박돌을 붙인 벽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단 네 모서리 지붕 추녀에는 가느다란 둥근 활주(闊柱)가 서 있어 건축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정자 앞 연못가에는 수백 년은 되었을 뚝버들이 물가에 깊게 드리우고 있고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화사한 붉은빛이 연못에 비쳐 마치 사람이 연못에 빨려 들어갈 듯하다. 주변에는 오랜 세월 연못과 정자 곁을 지켜온 회화나무, 젓나무, 밤나무와 불두화, 사철나무, 무궁화, 작약, 원추리, 국화, 창포 등이 연못에 떠있는 개구리밥과 어우러져 정취를 더 한다.

최씨담이란 연못의 섬이 두 개인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야 어떻든 최씨 부인과 몸종 석이의 무덤형태로 축조된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우리나라 연못 안에 섬은 대개 삼신사상(三神思想)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 또는 천원지방(天圓池方) 사상을 나타내는 한 개의 섬을 조성한다. 그러나 이곳에 두 개의 섬을 조성한 것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최씨와 석이를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만든 특이한 형태라는 것이다.


방초정근경(여름http://blog.daum.net/flyyc/14679314)



방초정 연못 및 외원(강충세.2014)

1975년경에 최씨담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가 발견되어 몸종 석이를 추모하기 위해 이 빗돌도 옆에 같이 세워두었다고 한다.

방초정에는 많은 시인(時人)과 묵객(墨客)들이 누(樓)에 올라 주위의 경치를 찬미한 시와 글씨가 38편이나 남겨져 있다. 정자는 1625년 처음 지어졌고, 1689년 건물이 퇴락하여 그의 손자 이해(李該)가 중건하였고, 1727년에 다시 보수를 하였다. 1736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1788년(정조 11년) 조선후기 예법을 집대성한 <가례증해(家禮增解)>를 저술한 후손 이의조(李宜朝: 1727-1805)가 지금의 자리에 다시 건립하여 중건기문을 남겼다. 진암 이수호(進庵 李遂浩: 1744-1796)가 상량문을 지어 칭송하였으며, 현판은 김대만이 쓴 것이라고 한다.

이정복의 호 방초(芳草)는 조선후기 중국의 모화사상이 빛을 발하였을 때 유학자로서 중국 문학의 거장 최호(崔顥)의 시를 흠모하여 차음(借音)하였다. 차음한 시는「등황학루(登黃鶴樓) 즉 황학루에 올라」에 나오는「방초처처앵무주(芳草萋萋鸚鵡洲) 즉 향긋한 풀 무성한 저곳은 앵무주로다」란 시이다. 향긋한 풀이 무성한 앵무가 사는 곳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작정자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방초정외원도(김영환.2014): 방초정에 영향을 주는 외원의 모습멀리 금오산,백마산,불두산과 자연하천인 감천그리고 넓은 농경지의 모습이 보인다.



방초정 정자에서 본 정원과 외원1(강충세.2014)

작자미상의 방초정십경(芳草亭十景)은 정자의 승경을 묘사한 시로서 김천 상원리 현지 정자에 걸려 있으며, 당시의 아름다운 풍광을 잘 표현한 실증적 자료라 할 수 있다.

방초정십경은 1경 일대남호<一帶鑑湖>, 2경 십리장정<十里長亭>, 3경 금오조운 <金烏朝雲>, 4경 수도모설<修道暮雪>, 5경 나담어화<螺潭漁火>, 6경 우평목저<牛坪牧笛>, 7경 굴대단풍<窟臺丹楓>, 8경 송봉취림<松岑翠林>, 9경 응봉낙조<鷹峰落照>, 10경 미산반륜<眉山半輪>으로 이루어져 있다. 1경 일대남호<一帶鑑湖>에서는 난간 밖 감호일대의 물가풍경과 봄기운속의 고기잡이하는 모습을, 2경 십리장정<十里長亭>에서는 여정길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우뚝 솟아있는 정자의 모습을, 3경 금오조운<金烏朝雲>에서는 금오산 아래 구름이 깔릴 때 신선이 된 듯한 심정을, 4경 수도모설<修道暮雪>에서는 인근 수도산의 설산풍경을, 5경 나담어화 <螺潭漁火>에서는 물고기와 자라가 있는 연못에 불 밝히고 잡는 고기잡이풍경을 노래했다. 6경 우평목저<牛坪牧笛>에서는 정자에서 들려오는 평원에서의 목동의 피리소리를, 7경 굴대단풍<窟臺丹楓>에서는 잎새마다 떨어지는 굴대 주변의 붉은 단풍, 8경 송봉취림<松岑翠林>에서는 푸른 송산의 수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9경 응봉낙조<鷹峰落照>에서는 응봉아래의 낙조풍경을 10경 미산반륜<眉山半輪>에서는 미산에 든 조각달 풍경을 노래했다.


방초정 정자에서 본 정원과 외원2(강충세.2014)


방초정 정자 난간에서 본 외원(강충세.2014)

방초정(芳草亭)!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최씨부인과 몸종 석이의 정절과 관련한 전설이 내려져오는 조선조 정원의 대표적인 별서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마을 앞에 있어 마을사람들의 공동 정자로 변모했지만 최씨부인의 커다란 정려각과 함께 앙증맞게 서있는 몸종 석이의 빗돌은 요즘처럼 삶의 가치관이 혼란할 때 사랑과 지조, 의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정자의 형태와 구조도 다른 어느 지역의 것보다 특이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는 방초정은 스토리텔링을 이용하여 재미있는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홍보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방초정은 이제 김천시 유형문화재 차원을 넘어 국가문화재로 승격하여 관리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재근 교수(전)의 '자연과 철학을 담은 정원, 한국의 별서'는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헤리티지채널의 '명사칼럼'을 통해 기사전문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헤리티지채널은 국민의 문화유산 애호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한 고품격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문화유산 전문 채널입니다. 라펜트 조경뉴스는 이재근 교수의 조경명사특강을 헤리티지채널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씩 게재하고 있습니다.
연재필자 _ 이재근  ·  
다른기사 보기
lafent@naver.com

기획특집·연재기사

관련기사

네티즌 공감 (0)

의견쓰기

가장많이본뉴스최근주요뉴스

  • 전체
  • 종합일반
  • 동정일정
  • 교육문화예술

인기통합정보

  • 기획연재
  • 설계공모프로젝트
  • 인터뷰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