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들에게 넘을 수 없는 현실의 턱

이훈길 논설주간(ㄱ_studio 대표)
라펜트l이훈길 대표l기사입력2014-11-27
사람에게 걷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일이 익숙해 보이는 인류를 일으켜 세워 걷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일어서서 평생을 걷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걸을 수 없게 되면서는 죽음을 항한 걸음이 시작된다. 걷는다는 것은 생명의 움직임이면서 삶의 순환이다.


장애인은 현관에 들어서면서부터 보이지 않는 일상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이훈길


물론 이러한 예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걷는다는 것은 희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 이웃 열 명 가운데 한 명인 장애인들이다. 비장애인의 비일상을 일상으로 사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럼 모든 사람이 행복을 꿈꾸는 도시 안에서 태어난 장애인에게 걷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평면으로 여기는 거의 모든 일상 공간의 바닥이 계단에서 응용된 다양한 형태의 각진 높낮이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일상의 벽은 시작된다. 설계 도면을 그릴 때 평면에 그은 한 선이 때로는 물리적인 벽이 되지만, 때로는 우리가 턱이라고 부르는 높이를 가진 요철이 된다. 턱이 되는 그 선은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일상의 벽이 되는 것이며, 기능적 편의가 보이지 않는 벽이 되는 순간 세상은 거대한 장애공간으로 바뀐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현관이라고 부르는 바닥과 거실의 경계가 장애의 시작이다. 5cm의 그 작은 턱이 실제 장애인이나 노령자에게는 올라가지 못하는 거대한 벽이 되기도 한다. 

특히 거동이 힘든 중증장애인에게 아홉의 편의와 미감에 충실한 세상은 장애물로 가득찬 공간이다. 인도와 건물 사이의 턱이나 계단, 보행자의 편의와 도시 미간을 위해 울퉁불퉁 모양을 낸 보도블록. 지하철을 타려면 역사의 엘리베이터 유무를 먼저 확인해야 하고, 버스는 혼자 탈 염두를 내지 못한다. 제 집과 달리 마음대로 고치거나 바꿀 수도 없는, 피하거나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모멸적 폭력의 공간. 뇌병변 장애인인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희정 팀장은 “휠체어에 앉으면 문지방 높이의 작은 턱도 넘기 힘든 장애물”이라며 “세상이 온통 우리를 가둔 벽 같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최윤필, 겹겹의 공간들, 2014, p80) 뇌병변 장애는 뇌성마비, 외상성 뇌손상, 뇌졸중 등 뇌의 기질적 병변으로 인하여 발생한 신체적 장애이다. 팔, 다리의 기능 저하로 인하여 앉기, 서기, 걷기 등의 이동 능력이나 일상생활(동작)의 수행이 불편한 분들이다. 그러므로 문지방의 작은 턱은 그들에게 넘을 수 없는 현실의 턱인 것이다.


어쩌면 한옥은 장애인에게 특히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수많은 장벽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훈길


그 현실의 턱은 어쩌면 한옥에서 더 잘 드러난다. 한옥은 누구나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거주의 공간이다. 일반 성인에게는 한없이 동경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당이 있는 집이 될 수 있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한없이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거주의 공간이 된다. 장애인의 입장에서는 모든 바닥과 지면이 분리된 수많은 턱이라는 장벽이 존재하는 곳이며, 어느 한 곳 편하게 움직일 수 없는 공간이 한옥인 것이다. 한옥은 장애인에게 특히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꿈의 공간인지도 모른다.

장애인에게 편한 것은 모두에게 편하다는 것은 진리이다.(이훈길, 도시를 걷다, 2013, p18) 그러나 그 불편한 사정은 다 알지만, 아니 안다고 생각하지만 당장 ‘나’부터 그건 남의 사정이다. 그래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어쩌다 장애인을 위해 뭘 좀 손보겠다고 하면 나서서 반대하지는 않지만 제 일처럼 신경 써주는 이는 드물다.(최윤필, 2014)

우리 삶의 복잡한 모습을 보여주듯 건물들은 제멋대로 도시를 점령해가고 있다. 한 번 세워진 것을 다시 만들기는 어렵다. 그러기에 짓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짓고 나서 두 번 더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먼저이지 돈이 먼저가 아니다. 사람이 다니기 좋은 길, 편한 길, 포근하게 감싸주는 그런 길과 그런 건축을 만나보고 싶다. 언젠가 우리도 늙고 병들고 아플 수가 있다. 그 때 느끼면 늦는다.

선(LINE)을 그을 때 다시 한 번 고민해야 된다. 과연 그 선은 누구를 위한 선인가? 행복한 공간의 시작은 보이지 않는 일상의 벽이 사라지는 그 순간부터이다.

글·사진 _ 이훈길 대표  ·  ㄱ_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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