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의 門]눈(目)의 탄생과 생명의 대폭발

권오병 박사의 ‘생태의 문(門)’ 10회
라펜트l권오병 대표이사l기사입력2014-11-27
[생태의 門]눈(目)의 탄생과 생명의 대폭발

얼마 전 40년 지기 친구와 가을 단풍을 즐기며 골프를 쳤다. 평균타수 80타 중반을 치던 친구가 그날따라 100타를 넘어서며 총체적 난국을 보였다. 최근
들어 세 번이나 그런 모습을 보이는 친구가 안쓰러워 우리는 진심으로 그를 위로하였다. 그러자 비로소 친구는 담담히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었다고 실토했다. 10여 년 전부터 진행된 황반변성 때문이라고 했다. 두 눈으로 보아야 공의 위치와 거리를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데 한쪽 시력을 상실했으니 골프공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대의학으로도 완치가 어려운 병이니 더는 골프를 즐길 수 없을 것 같아 우리는 함께 우울해했다.
 
필자도 10여 년 전에 백내장이 와서 양쪽 눈을 1년 간격으로 수술을 하였다. 수술 직전까지 3년 정도를 핵성 백내장 증세로 골프를 잘 치지 못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골프공이 3개로 보이다가, 진행되면서 6개로 보이다가 나중에는 접시 만하게 보일 때 수술을 했다. 다행히 요즘 백내장 수술은 1회 수술로 완치가 가능하여 다시 시력을 회복하였다. 만약 내가 조선시대에 살았다면 40대 후반에 심청전의 심봉사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소설에 묘사된 것을 살펴보면 심봉사는 젊은 나이에 백내장을 앓고 시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와 글쓰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시력에 장애가 왔을 때 큰 불편함과, 심지어 절망감에 우울증까지 겪었다. 눈의 중요성과 살아있는 동안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험 때문인지 그때부터 나는 사진취미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필름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시대의 변화에 주춤했던 나는 적극적으로 사진학교를 다니며 공부해서 마침내 아마추어 작가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자연의 일부인 사람을 사진으로 찍는 행위는 한시적 인생에 더 한시적 시력이라는 점 때문에 나에게는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다. 인간에게 시력은 다른 모든 감각기관을 합친 것 보다 아홉 배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에 절대 공감한다.

“百聞不如一見”이라는 속담이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듣는다는 것은 청각을 이용해서 타자가 본 것을 간접경험을 하는 것이고, 본다는 것은 시각을 이용해서 내가 직접경험을 한다는 뜻이다. 기막힌 명승지에 다녀온 백 명의 사람에게 백번을 듣는 것보다 단 한번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강렬한 이미지로 남기 때문이다. 범죄수사에서 자백이나 심증보다 물증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이 사건을 이렇게 본다.”라고 어느 수사관이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수사한 사건에 대한 다각적인 조사를 통해 수집한 증거와 정황을 종합하여 노련한 수사관으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통한 합리적 추론까지 보탠 그의 “생각”이라고 이해한다. 즉 “본다.” 의 의미는 생물학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선 뇌의 ”종합적 사유“를 의미한다. 

생명에게 있어서 눈의 탄생은 뇌의 탄생이나 다름없다. 

창세기의 첫 머리에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라는 구절로 천지창조이야기를 시작하듯이, 137억 년 전 우주 탄생 이래 빛은 존재해 왔지만 지구의 생명체들이 빛을 가시광선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지금으로부터 5억4300만 년 전에 불과하다. 생명의 역사 35억년 중에서 6/7에 해당하는 30억년동안 생물에게는 눈이 없었던 시기였다. 이시기에 얕은 바다 에 살았던 초기 생명체들도 광합성을 하거나 세포내의 화학공장에서 빛 에너지가 필수요소이기 때문에 표피에 빛을 감지하는 기능세포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빛을 감지하여 빛을 쫒아갈 수 있는 정도의 기능을 할뿐이어서 뇌는 전혀 발달하지 않았다.

지질학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캄브리아기의 시작은 5억4300만 년 전에 “눈의 탄생”과 함께 화려한 생명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초기 30억년동안 진화는 매우 더디어 동물계에서는 단지 3문의 동물들이 발생했지만, 캄브리아기 시작 이래 단 500만년 동안 순식간에 38개의 문으로 늘어났다. 생물 다양화라는 대폭발의 뇌관은 바로 “눈의 탄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기 이후의 현재까지 5억년동안 진화는 계속되었지만, 지질학적 시간 개념으로 단 하루에도 지나지 않는 5억4300만 년 전부터 5억3800만 년 전까지 500만년의 “캄브리아기 대폭발” 순간 이후 다시는 생물계에 이와 같은 역동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 이후 현재까지 동물계는 38개의 문에서 1개의 문도 추가 진화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생명의 역사에서 눈의 탄생 사건을 넘어서는 어떠한 획기적 진화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눈의 탄생은 개체가 외부환경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동물은 눈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색을 뇌가 인식하고 분별하게 되었다. 즉 눈의 탄생은 뇌의 발달의 기폭제가 되었고, 비로소 생명의 주체가 개체를 넘어서 외부세계를 인지하며 적응과 진화를 계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물학에서 눈은 외부로 돌출된 뇌라고 보고 있다. 수정란이후에 태아의 발달에서도 불과 2주 만에, 태아의 크기가 1mm 정도여서 초음파에도 잡히지 않는 이때부터 태아의 원시눈은 빠르게 발달하기 시작한다. 태아는 이 무렵 내배엽, 중배엽, 외배엽으로 발달한다. 장차 내배엽은 분화하여 소화기관(위, 간, 이자 등)과 호흡기관(폐)의 장기로 발달하고, 중배엽은 순환기관(심장과 혈액등), 비뇨생식기관, 근육과 뼈 등으로 분화하고, 외배엽은 피부와 신경계, 그리고 뇌와 눈으로 분화된다. 즉 눈과 신경과 뇌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다”는 것이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인식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것이다. 

눈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척추동물의 대부분은 인간과 같이 수정체가 있는 2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물론 무척추 동물 중에서도 오징어나 문어 등은 수정체가 있는 2개의 눈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나비나 잠자리 등 곤충들은 여러 개의 홑눈이 겹쳐져 있는 겹눈을 가지고 있다. 잠자리는 28000개 이상의 홑눈이 겹쳐져 있는 겹눈을 가지고 있어서 머리의 2/3를 눈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포유류의 눈도 육식동물과 채식동물의 눈은 다르게 진화하였다. 모두 머리의 중앙 상단부에 나란히 위치한 것은 같지만, 사자나 호랑이 등 맹수들은 인간과 같이 머리 중앙선인 코의 양옆으로 가깝게 위치하여 주로 전방을 바라보기에 편하게 진화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쫒기며 살아야 하는 소, 말, 토끼, 사슴 등 채식동물들은 머리의 양 옆에 달려있다. 전방만 주시하는 것 보다 폭넓게 양 옆이나 후방까지 살펴보고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천적과의 거리를 가늠하기 이전에 천적의 존재를 발견 즉시 도망치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눈의 거리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시야의 폭을 최대한 확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육식동물은 먹이감과의 정확한 거리를 인지하여 한방에 쓰러뜨려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코의 양옆에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도 야생에서 사고로 인해 한쪽 눈을 잃게 되면 사냥능력이 떨어져 얼마 못가서 굶어 죽게 된다. 사자나 호랑이가 평균 수명이 20년 내외인 것은 시력 저하와 이빨의 수명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한다. 사람의 마음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때 그의 눈은 흔들리고 어두운 빛을 띠고, 기쁘고 즐거울 때는 눈빛이 밝게 빛난다. 그래서 사람의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신뢰의 폭이 깊어져서 대화가 잘 풀리는 것이다. 대화중에 상대의 눈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은 무언가 마음을 숨기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 마음은 뇌에서 만들어지며, 눈은 뇌가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피부 밖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그의 뇌, 즉 마음을 보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모든 것을 다보고, 본 것을 총체적으로 객관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뇌의 상당 부분이 시각과 관련이 있는 영역이므로 보이는 것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항시 분별하게 되면 너무 과다한 에너지가 소모되어 다른 것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각기 서로 다른 시각을 갖게 되고, 따라서 다른 기억과 판단을 하게 된다. 즉 그 순간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된다. 같은 시간에 같은 네거리를 지나간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았는가 물어보면 답은 모두 제각각이다. 연애의 욕망이 마음에 가득한 청년은 예쁜 여자를 보았다고 하고, 차를 바꾸려 한 사람은 색깔 고운 자동차를 기억하고, 배가 고픈 사람은 어떤 식당이 있었는지 잘 기억할 것이다. 도둑질을 한 사람은 네거리 한편에 세워져 있던 경찰차를 유심히 보았고, 부동산 중개인은 불 꺼진 상점을 기억할 것이다. 즉 우리의 눈은 그때그때의 마음의 동향에 따라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된다. 자신에게 불필요한 것은 적당히 무시하는 엄청난 융통성을 가짐으로써, 뇌의 과다한 에너지 소모를 막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본다”는 것의 절대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주관적 시각의 객관적 오류현상이 인간사에서 다반사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한계인 것이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직후 평소에 흘려듣고 지나치던 유행가 가사가 구구절절 가슴을 때리는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물을 입체적으로 깊이 있게 보게 하려 함이다. 좌와 우를 동시에 보고 이를 종합하여 판단할 때 비로소 실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좌우갈등, 빈부갈등, 흑백갈등도 한쪽 눈에 치우친 시각에 의한 뇌의 사팔뜨기 현상이 아닐까? 생태계에서 좌우균형을 잡지 못하는 눈을 가진 종은 결코 살아남지 못했음을, 심지어는 가자미의 눈조차도 시각적 균형을 잘 잡고 있음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_권오병(아썸 대표, 생태학박사)
_ 권오병 대표이사  ·  (주) 아썸
다른기사 보기
peterkwo@naver.com

네티즌 공감 (0)

의견쓰기

가장많이본뉴스최근주요뉴스

  • 전체
  • 종합일반
  • 동정일정
  • 교육문화예술

인기통합정보

  • 기획연재
  • 설계공모프로젝트
  • 인터뷰취재

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