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의 門]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권오병 박사의 ‘생태의 문(門)’ 14회
라펜트l권오병 대표이사l기사입력2015-03-27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5년 1월 1일 이른 새벽 나는 원단(元旦)해맞이를 위해 집을 나섰다. 동트기 전인 새벽 5시에 도봉산 입구에는 이날 원단해맞이 손님들을 위해 떡과 과일을 파는 아줌마들이 함지박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산신제에 쓸 떡과 과일을 사서 배낭에 넣고 백운대를 향했다. 일출시간인 7시 42분에 맞추려고 중간에 쉬지도 못하고 부지런히 올라가니 정확하게 7시 반이었다. 백운대 정상엔 영하 15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원단해맞이 등산객들이 10여명 벌써 와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에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는 이하인 것 같았다. 곱은 손으로 서둘러 준비해온 2절지 크기의 한지를 펼치고 “乙丑年 元旦”이라 제목을 숯검정으로 쓰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나의 기도문을 써내려갔다.
 
“을미년 삼월 보름에 한반도 동쪽 땅 강릉에서 출생한 권 오병이 30세를 맞이하는 올해부터, 부디 남은 인생을 남의 종노릇을 그만두게 하시고, 본인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남은 빈 여백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나갔다. 부모와 형제들과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과 가까운 친구들 몇 명을 적으니 한지의 여백이 메워졌다. 그 위에 떡과 사과 한 알 그리고 오징어 한 마리를 뉘어놓고 소주와 잔을 꺼내 따랐다.

먼저 동쪽을 향해 삼배하고, 이어서 북쪽을 향해 삼배하고, 마지막으로 남쪽을 향해 삼배를 하였다. 동쪽을 향한 삼배는 나의 생명을 있게 한 천지신명(自然)과 내 고향이 동쪽이므로 조상신에게 절을 한 것이고, 북향삼배는 당시 나의 간절한 염원이었던 한반도통일을 기원한 것이고, 마지막의 남향삼배는 내가 장차 뻗어나갈 나의 미래를 향한 기원이었다. 물론 어느 제례에서 따온 법도는 아니다. 그저 내 스스로 그리 의미를 둔 것일 뿐이다. 

그날 아침 원단제례를 기점으로 나는 내 사업을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30년 조금 넘는 시간을 나의 의지대로 살아왔다.

당시 27세에 입사한 어느 중소기업에 잘나가는 대리였던 나는 회사의 극구만류에도 불구하고 6번째 사직서를 연말에 내놓은 터였다. 인생의 황금시기인 30대 10년을 내다볼 때, 더는 남의 일이나 도와주면서 월급을 타먹는 나를 생각하기 싫었다. 단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운명인 인생을 생각할 때, 자신의 인생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사업실패의 두려움 따윈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해 신정연휴가 끝나던 날 1월 4일부터 나는 내 사업을 시작했다. 무작정 강남 교대근처에 사무실을 얻고, 책상과 전화기를 들여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구체적인 사업계획서 따윈 물론 없었다. 빈농의 자식이었던 처지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을 턱도 없었다. 단지 3년간의 직장생활 중 1년 반을 중동에 나가 있었던 덕에 사무실을 얻고 미국 출장을 한번 다녀올 정도의 자금이 전부였다. 

중동에서 일할 때 휴가를 얻어 유럽여행은 다녀왔으나, 세계 최대의 시장인 미국시장을 공부해야 될 것 같아서 무조건 미국비자를 신청하였다. 당시 미국비자 얻기가 하도 힘들어서 꼬박 3개월이 걸려 간신히 비자를 얻고 미국을 향했다. 두 달 동안 미국의 17개 주를 여행하며 사업아이템을 찾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시카고 어느 한국식당에서 옆자리에 당시 잘나가던 (주)대우의 김우중 회장일행을 만나 너무나 반가워서 넙죽 절하고 술 한 잔 올렸다가 퇴짜를 맞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한국에서 온 사업에 뜻을 품은 청년인데, 당신은 큰 성공을 한 사업가이니 존경의 표시로 정중히 술 한 잔 올리고 싶다.”고 했는데 그는 귀찮다는 듯이 “사람 잘못 보았소. 나는 김우중이 아니오.” 하는 싸늘한 대응이 돌아왔다. 물론 그룹 회장 쯤 되는 사람이 나 같은 미물을 상대해 줄 리 없겠지만 그래도 무안하고 화가 치밀었다. 그날 저녁 홧김에 술을 폭음을 하고 다시는 김우중을 존경하지 않기로 했다. “천하를 품겠다는 큰 뜻을 가지고 미국을 여행하는 사업지망생 청년을 어깨라도 두들기며 격려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졸장부 같으니라구.” 그 후 나는 그가 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결국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그 후 대우는 망했고, 수십조의 국민부담만 남기고 그는 무대에서 사라졌다. 

미국에서 돌아와 무역업을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수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이걸 당시에 General Merchandise라 했다), 거래를 원하는 모든 국가의 불특정다수의 바이어를 상대로 무역을 하였다. 

중동에서 쌓은 무대포정신을 바탕으로 남들이 가기 꺼려하는 위험한 전쟁터(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나, 미수교국(아프리카의 콩고, 기니, 우룬디, 르완다, 보츠와나, 카메룬 등)도 마다하지 않고 70여 개국 200개 도시를 누비고 다녔다. 1년에 180일을 해외 출장으로 보냈고, 국내에서의 절반인 60일은 하청공장을 찾아다녔다.

회사 설립 3년 만에 연 600만 달러의 수출에, 직원 수는 30명을 넘었다. 내손이 마이더스의 손이었다. 내가 손대면 모두 황금으로 변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모든 영광은 88년도에 한국경제에 불어 닥친 “3高현상”으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86항쟁이후에 집권한 노태우정부의 주택 200만호 건설정책은 급격한 인건비 폭등과 자재품귀에 따른 가격 급등을 가져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율 폭락이 수출회사들을 강타했다. 당시 최고 환율로 달러 당 888원까지 네고(negotiation)했던 것이 6개월 만에 달러 당 680원으로 떨어져 30%의 환차손이 발생했다. 제조원가 상승률이 평균 50%정도 상승 한데다가 환차손을 앉아서 30% 보게 되니, 수출업자 누구도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3년간의 화려한 영광은 1년 만에 빈털터리 거지가 되어 끝내 법인청산이라는 참담한 결말로 끝이 났다. 그리고 재기불능의 파산자가 되어 반년동안을 거지 행색으로 낚싯대를 메고 저수지와 강가에서 노숙을 하였다. 결국은 여수 앞바다의 오동도까지 흘러가 이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89년 11월 초순의 남해바다는 을씨년스럽게 바람이 불고 파도는 일렁였다. 서른다섯에 인생을 마감해야하는 사내의 가슴에는 온갖 회한이 고속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유년시절의 기억부터 지독히도 가난했던 학창시절과 뜨거운 가슴으로 민주주의 부르짖었던 대학시절의 기억들이 머리를 스치며 눈에서는 끝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이날 나는 죽지 못하고 다시 떨치고 일어났다. 그것은 음산한 겨울바다에서 들려온 천둥벽력 같은 한마디 말씀 때문이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당시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이 말씀이 성경의 한 구절임은 알고 있었다. 그길로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맨주먹이 아니라 감당키 어려운 큰 빚을 안은 채로 정면으로 다시 세상과 부딪쳐 나갔다. 어떠한 난관도 나를 더 이상 좌절시킬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1989년 11월에 나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조경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다시 25년의 세월이 흘러 오늘의 (주)아썸의 대표이사 회장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오늘 낮 어느 대학에서 석박사과정의 학생들에게 심층생태학 강의를 하던 중에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젊은 그들의 취업난에 고단한 얼굴을 연민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나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 일사천리로 이글을 쓰게 되었다. 

오늘의 강의주제는 가이아이론(지구유기체론)이었는데, 결론부분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대지의 어머니인 가이아로부터 왔고,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고, 죽음은 우주물질의 순환과정으로 이어진다고 끝을 맺었다.

살아있는 생명은 엔트로피에 역행하는 존재이고 존재와 비존재는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고리에 연결되었다는 가설..... 그래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은 존재 그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니,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며 매순간을 즐겁게 살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려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불확실하여 가늠할 수 없으니, 지금 이순간의 현재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강의 끝”하였다.

글_권오병(아썸 대표, 생태학박사)
_ 권오병 대표이사  ·  (주) 아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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