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물리적 공간과 사회적 경계

『공간, 장소, 경계』마르쿠스 슈뢰르 지음
라펜트l오정학 박사l기사입력2015-05-10
물리적 공간과 사회적 경계

글_오정학 경기도시공사(ohjhak@daum.net)

 

엑소더스가 한창이다. 람세스 때와 달리 아프리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1차 목적지로는 지중해가 많이 꼽힌다. 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곳이다. 대개 서유럽으로 많이 향한다. 그들이 자라온 곳과 달리 집단이 개인을 억누르지 않고, 단일한 가치를 강요하지 않고, 무엇보다 빵과 우유가 넉넉할 것이라는 기대가 클 것이다. 지금의 엑소더스는 종교와 분쟁탓이 크다. 막다른 길에 몰린 이들은 결국 자라온 장소를 뒤로 했고 모국을 떠났다.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를 벗어난 그들에게 공간적 경계는 의미가 없어졌고, 이제 세계인으로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사실 셈이 빠른 자본은 이미 다국적 기업을 꾸려 앞서 나간 지 오래되었다. 자본에겐 이제 공간의 경계가 없다. 국가는 아직도 굳건한 경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WTO, FTA 등으로 일원화되는 질서는 그 벽을 점차 허물고 있다. 


공간은 옛적부터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모든 것을 담거나 보호하는 ‘공간’이 없다면 어떠한 물체도 생성될 수 없다. 세계 생성에 뺄 수 없는 존재였으니, 공간을 빼고서는 세계관 정립 자체가 힘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플라톤은 공간을 ‘존재(파르메니데스)’와 ‘생성(헤라클레이토스)’과 함께 이 세계를 기술하는 제3의 카테고리로 인식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너무 일반적이라 생각하여, 공간을 “몸으로 점유하는 모든 장소의 총합”으로 정리했다. 장소 자체가 공간의 부분이며, 공간의 경계는 공간을 받아들이는 몸체의 경계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공간을 자기 속에 있는 사물을 담고 그 사물을 위한 주머니로 보는, 용기적(容器的) 절대공간 개념의 출발이었다. 


그 뒤 공간은 무한한 공간(르네상스), 절대공간(뉴턴), 상대적 공간(라이프니츠), 직관의 순수형상으로서의 공간(칸트)을 거쳐 상대적 공간(아인슈타인)으로 발전한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절대공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가정했다. 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물질이 차지하는 영역만이 공간이며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공간과 그 속의 물체가 결코 분리된 단위가 아니라고 보았다. 공간이 어떤 단순한 사실(所與性)이 아니라 사회적 조작을 통해 비로소 한 공간이 구성된다는 ‘상대 공간’에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마르쿠스 슈뢰르(1954∼ )는 용기적 공간관에 다시 주목한다. 영토나 물리적 공간과 다른 사회학적 공간 개념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물론 이는 자연과학적 관점이 아닌 사회학적 관점의 ‘공간’이다. 철학과 물리학을 덧댄 새로운 프레임으로 기존의 공간 이론을 비평했다. 이를 위해 그는 에밀 뒤르켕, 게오르크 짐멜, 피에르 부르디외, 앤서니 기든스, 니클라스 루만을 호출해 가며, 공간의 정치성, 도시성, 가상성, 신체성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공간, 권력, 사회적 불평등의 연관성을 탁월하게 다룬 부르디외의 공간은 사회적 불평등과 공간의 불평등을 잘 보여준다. 그는 “공간적으로 접촉은 하지만 사회적으로 거리가 먼 사람들만큼 우리가 더 멀게 느끼는 사람은 없다”고 보았다. 단순히 공간적 접근을 통한 사회적 소통 추구를 ‘환상’으로 평가절하 했다. 이는 공간적 근접과 사회적 근접의 상호관계 테제와는 상반된 입장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꽤 시도되었던 공동주택단지의 소셜 믹스에 대해, 막상 거주자들의 불만족도가 높다는 보도는 부르디외의 이론을 되씹어보게 한다. 상하위 계층이 모두 불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계급에 따른 문화의 차이, 이에 따른 일상의 차이를 간과했다. 복잡한 오늘날의 사회는 상이한 가족구조, 종교, 문화 등을 만들어 낸다. 이 모든 복잡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화분에 틀어넣어 공동체라는 싹을 기대한다는 것은 정치적인 억압이자, 부족적 통일성의 추구일 수 있다. 경제적 차이는 문화적 차이를 낳고, 그것은 자연스레 일상에 경계를 만든다. ‘사회적 거리’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경계(boundary)를 접경(border)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좀 더 섬세한 기획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담장이 없어진 주택 정원이다. 물리적인 공간은 그대로이지만 사회적인 크기는 훨씬 커졌다. 

경계는 사라졌고 이제 상호작용이 활발한 접경으로서의 역할이 기대된다. 

정원일의 개인적 즐거움(work)을 넘어선, 이웃을 향한 ‘행위(action)’의 의지가 엿보인다. 


“사회적 접근이란 공간적 접근을 통해 만들어질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작동한다. 사회적 공간 내의 근접은 물리적 공간 내의 접근이 일어나게끔 만들어준다.”  왜냐 하면, “사회적 공간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같은 물리적 공간에 놓여 있더라도 공동의 길과 목적 장소에 가지는 못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간의 극복은 쉽지 않다. 전통적인 지역사회보다 이질적 요소가 많은 도시공간에서 한층 더 그렇다. 슈뢰르는 실용적 공동체주의자로 볼 수 있는 리처드 세넷까지 굳이 비판해 가며 섣부른 공동체주의를 경계한다. “시골마을 생활의 공동체 테러”란 표현까지 쓰면서 지나친 공동체 주의는 거리두기와 관용에서 나온 도시인의 예의상 무관심을 사랑과 동정심으로 뒤바꾸려 한다고 평한다. 


슈뢰르는 공간을 사회학적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그러한 관점으로 공간의 의미를 조명했고 현대의 공간을 평했다. 얼핏 이러한 접근이 이상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의 낭만적 공동체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대목에 가면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다가온다. 많은 전거와 사례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오늘날 공간은 인문학, 예술학, 자연과학, 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루고 있다. 당연히 소속 분야와 관점에 따라 천차만별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한 공간에 대해 슈뢰르의 프레임은 상당한 균형감각을 갖게 해 준다. 그는 보다 냉철히 공간을 들여다 볼 것을 주문한다. 


_ 오정학 박사  ·  경기도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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