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도시를 점령한 예술

『모두를 위한 예술』 우베 레비츠키 지음
라펜트l오정학 박사l기사입력2015-07-18
도시를 점령한 예술

글_오정학 경기도시공사(ohjhak@daum.net)

『모두를 위한 예술』 
우베 레비츠키 지음│최현주 옮김두성북스 펴냄(2013)
바야흐로 “문화의 시대”이다. 모두가 예술가이고 모든 곳이 문화도시이다. 오죽하면 고문기술자 이근안 마저 스스로의 행위를 “예술”이라 항변했을까? 발달된 물질문화 속에서 도시는 더 많은 생산을 개인은 더 높은 이미지 쌓기에 골몰한다. “차별화”는 어쩔 수 없는 경쟁의 사회에서 주효한 핵심전략의 자리를 차지했다. 예술과 문화는 그 구체적인 실행방법이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문화적 자산은 개인의 필수품이 되었고, 도시의 경쟁력으로는 예술과 문화가 손꼽힌다. 투자자본과 지자체는 재빠르게 이를 포착하여 도시개발에 이용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이러한 현상에서 우베 레비츠키는 도시문화의 상품화와 도시공간의 불균등 발전의 문제점을 꿰뚫어 보았고, 현대 도시가 사회적인 맥락에서 슐체의 체험사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결핍사회에서 과잉사회로 이동했다. “당신의 삶을 즐겨라!”가 모두의 목적이 되어 흥미롭고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체험하고자 한다. 각종 프로그램이 갖춰진 ‘소비와 체험의 공간’이 도시 곳곳에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많은 공공공간들이 축제와 이벤트로 분주하다. 그것들은 대부분 문화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그 공간은 비용을 요구할 뿐 아니라,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출입을 허용한다. 그러한 점에서 그 공간들은 기본적으로 폐쇄공간이나 빗장공간과 다를 바 없다. 제한된 사람들만의 모임은 도시의 원래 특징인 다양성과 익명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상호작용 또한 한계가 있다. 우베 레비츠키는 예술이 문화의 이름으로 성장연합-투자자본과 기업적 지자체-과 기업적 도시에 협력하여 소외와 배제의 공간을 만드는데 일정한 역할을 해 왔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상업화된 소비중심적 기업 도시는 개인을 공공공간에서 조금씩 소외시켜왔다. 기업적 도시에 맞서 공동체의 이익을 지켜내려면 경제자본의 지배에 맞설 수 있을 만큼의 문화적 상징적 자본이 요구된다. 변화를 위해서는 예술가 그룹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비판적 의식도 필요하다. 문화자본과 소비자본에 복무해 온 예술에 대한 비판은 ‘개입의 미술’로부터 시작된다. 새로운 공공미술과 새로운 장르미술이다. 우베 레비츠키는 ‘개입’을 화두로 하여 공공미술과 새로운 장르미술의 역할을 적극 강조하는데, 역사적으로 이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은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다. 

미술에 대한 대중의 개입은 1989년 뉴욕 맨하탄 연방광장의 ‘기울어진 호(Tilted Arc)’의 철거가 기폭제였다. 1981년에 이 조형물을 설치한 미니멀리즘 조각가 리처드 세라는 원래 특정 시간과 장소를 고려한 작품 제작을 주로 해 왔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광장의 환경조형물을 맡아 길이 36m, 높이 3.6m의 녹슨 철판으로 벽을 설치했다. 그러나 광장 이용자들은 이 설치물에 대해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광장에 대각선으로 길게 배치되어 시야를 막고 통행불편이 크다는 이유였다. 철거 혹은 이전을 요구하는 광장 이용자들과 미술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세라는 조형물이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이며, “작품을 원래 설치된 장소에서 없애는 것은 그것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면서 반대했다. 오랜 공방 끝에 법원은 일반인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후로 ‘장소 특정성(site specificity)’은 현대 공공미술의 원칙이 되었다. 30여 년 전의 이 사건은 공공공간에서 전문가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장소 이용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장소특수성이란 장소가 이미 가진 전제 조건들에 작품이 융합하고 소극적으로 부합하는 것이며, 공공적, 즉 비제도적 공간과 사용자들의 변화된 요구를 고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장소는 물리적 장소와 사회적 장소(부르디외)로 구분할 수 있는데, 오늘날 물리적인 장소의 공공미술은 매우 활발하다. 그렇지만, 뉴욕 배터리 파크의 깔끔한 공간 디자인 속에 숨겨진 문턱과 배타성에서 보듯이 “기업적 도시들은 물리적 장소특수성과 기능적 예술이라는 관념을 포용함으로써 합리화되고 이용지향적인 도시발전정책을 은폐한다”. 자본을 받아들여 계속 변화해야 하는 도시의 특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재개발 혹은 도시재생의 이름 아래 개발주체들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급주거공간, 고층빌딩, 유명 브랜드숍으로 채우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우베 레비츠키는, 그러한 과정에서 예술이 고작 성장연합의 전위적 역할을 해왔으면서, 도시경관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해 오지는 않았는지를 조용히 되묻고 있다. 그렇다면 ‘조경’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해 왔을까?

한국에서도 십여 년 전부터 공공디자인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물리적인 도시공간의 경관은 매우 좋아졌다. 다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적 공간 또한 통합적이고 소통적이며 상호작용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기업 도시적 이데올로기를 감추고 소비문화적 축제와 이벤트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뉴욕 맨해튼 광장을 가로막은 설치물 ‘기울어진 호’ⓒWikipedia

_ 오정학 박사  ·  경기도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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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jhak@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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