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환대의 공간이란

사람, 장소, 환대
라펜트l오정학 과장l기사입력2015-12-01

환대의 공간이란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지음, 도서출판 문학과지성사(2015)

오정학  박사 경기도시공사(ohjhak@daum.net)



“어떤 곳이 사람을 환대하는 공간일까요?” 이 책을 보다가 주변의 20대 후배에게 물어보았다. 잠시 후 “놀이동산 같은 곳이 아닐까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아마도 꿈과 환상을 내세우는 프로모션 때문인 듯하다. 가족들이나 연인들끼리 가면 꽤 즐거운 곳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놀이동산은 환대의 공간인가? 입장권을 사야 들어갈 수 있고 자유이용권을 더 대접하며 스페셜 프로그램이 더 나은 서비스를 받는다. 경제력에 따른 진입 문턱과 소비 단위를 기준으로 차별이 제도화되어 있는 곳이다. 결국 놀이동산의 환대는 조건부이고 엄밀히 보면 환대라기보다 교환(화폐와 상품)이다. 


원래 환대는 모든 문화권에서 중시되어 왔다. 그 사회의 기본 덕목이자 사회화와 문명화의 핵심 장치였다. 그리스 신화에는 나그네로 가장한 제우스와 헤르메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초라한 모습에 많은 마을사람들이 무시했으나 딱 한 집의 어떤 부부가 이들을 환대했다. 그 결과 심판의 때가 되었을 때 그들 부부만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낯선 곳에서 나그네가 식사와 잠자리를 얻는 서구의 의례적 전통을 잘 보여준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리 오너라~” 하며 길손이 하룻밤을 청할 때 맞아들이는 일은 양반가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음식과 잠자리는 물론이고 약간의 노자 돈까지 줄 때도 있어 당시 양반가 수입의 삼분의 일이 손님 접대비로 나갔다는 기록까지 전해 온다.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오두막집 노부부의 환대를 받고 있는데 부부는 딱 한 마리 있던 거위까지 대접하려 하고 있다(Adam Elsheimer, 1608) 


저자는 환대를 ‘사람에게 자리/장소를 내어주는 행위’로 재정의 한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그 사회 구성원으로써의 인정이다. 그런데 이 책은 오늘날 이러한 성원권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거나 그 수명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즉 사람을 환대하여 사회 내부로 받아들이는 경계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나날의 인정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그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 자기 자리를 갖거나 또는 계속 지키는 일은 오늘날 매우 고단하며, 그 때문에 도처에서 장소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난민들과 구조조정에 저항하며 연좌 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의 몸짓은 서로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들의 자리 혹은 공간을 얻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장소를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었던 과거의 (해방된)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생각해보자. 법적으로는 똑같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들과의 사귐이나 결혼, 교류 등의 유대는 터부시되었고 투표행위는 방해받았다. 행동과 공간의 이용도 제약을 받아 공공시설물인 마을 광장을 지나갈 수도 없었고 공동우물과 저수지를 사용하지도 못했다. 그뿐 아니라 돈이 있어도 이발소, 호텔, 상점을 이용할 수 없었다. 공적 영역 혹은 사회적 영역에서 자기 자리를 인정받지 못한 상태, 즉 환대 받지 못한 존재였고 그 사회의 진정한 성원이 아니었다. 


저자의 말처럼 분명히 환대란 자리를 내어주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자리를 내어 주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적ㆍ개인적인 측면의 자리 내줌도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제도화한다는 측면에서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204쪽)”는 정의는 공감이 간다. 그런 관점에서 현재 전지구적으로 겪고 있는 공공성의 위기는 곧 환대의 위기이자 인간됨의 위기이며, 공간의 위기를 예고한다. 따라서 저자는 문제의 해법으로써 “절대적인 환대”를 강조한다. 절대적 환대는 증여와 답례가 켤레로 이루어지는 칸트의 상호주의적 환대가 아니다. 대가를 바라는 뇌물이 아니라 주고 나서 잊어버리는 선물이자 조건 없는 증여라는 점에서 레비나스의 환대와 가깝다. 


이러한 환대는 자못 이상적이다. 그런데 낯선 자가 어떤 사람인줄 알고 함부로 나의 공간으로 맞아들인단 말인가? 그에 뒤따르는 위험이 경시된 것이 아닌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결국 나의 가치체계와 일치하는 나와 동질적인 사람만을 선별하겠다는 것이기에 본래적인 의미의 타자에 대한 환대로 보기 힘들다. 우리는 일상에서 주인이자 손님이다. 집의 주인이나 특정 장소의 주인도 원래부터 주인이었던 것은 아니며 본래는 손님이었다. 즉 자신이 받아들여졌듯이 새로운 낯선 이에게도 수용의 기회는 필요하다. 자크 데리다는 이를 일러 “누구도 호스트일 수만은 없고 게스트일 수만도 없다”고 했으며, 대안으로서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의 상호작용’을 규범적 이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과 승자독식 체계에서 자리를 갖거나 지키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환대)는커녕 자리 뺏기-의자 뺏기-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환대의 약화는 공공 조경에도 부정적인 파급을 예상할 수 있다. 사회는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전까지 사회 성원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신분 질서가 와해되면서 공적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146쪽)”는 측면에서 근대의 부산물로 볼 수 있다. 그 시점은 고작 개인과 특정 집단의 소유물이라는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던 정원이 모두의 정원인 공공공원으로 분화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공적 공간으로써의 조경은 시민권 향상에 의한 시민 공간의 확장이었다. 사적인 행위가 공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공원은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이해력을 키운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환대’의 개념과 조응된다. 


환대가 사라지는 시대, 공공성이 줄어드는 시대는 나와 다른 존재, 타자에 대한 수용성과 공생개념이 줄어드는 시대이다. 자기 동네에 공공임대주택이나 사회복지시설 조성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도시공간적 차원에서 단편적인 사례들이다.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근원적인 해법을 찾지 않고 공간적으로 선을 그어버리는 것은 그들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는 것인데 누구에게도 그럴 권한은 없다. 환대는 주체가 객체를 대상으로 하는 우월적 행동이다. 사회적 약자인 타자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주체의 여유를 전제로 한다. 개인적인 차원의 지나친 탐욕, 사회적인 차원의 정치ㆍ경제적 불안은 이러한 여유를 좀먹고, 이어서 타자에 대한 환대가 사라지는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 타자에 대한 관심과 공공영역의 유지, 그리고 그와 함께 공공조경의 확충을 기대해 본다. 

_ 오정학 과장  ·  경기도시공사 사업기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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