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 걷기... 일상의 따뜻한 위로

강연주 우리엔디자인펌 대표,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운영위원
라펜트l강연주 대표l기사입력2016-07-22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Series No.14


걷기... 일상의 따뜻한 위로 

: 살고 싶은 동네 길 만들기




강연주 우리엔디자인펌 대표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운영위원



사는 건 참 힘들다. 아니 참 힘들 때가 많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때론 스스로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필자는 요새 ‘디어 마이 프렌즈’(이후 디마프)라는 드라마를 열심히 본다. 극 중에서 ‘희자’는 고된 삶을 마감하고자 높은 빌딩 꼭대기에 올랐으나, 자신이 떨어질 때 밑에서 충돌하게 될지도 모를 그 누군가를 염려하며 자살을 포기한다. 그리고는... 치매 증상으로 정신을 놓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를 등에 짊어지고 끊임없이 걷는다. 오래 전 그때에도 아마 정신을 놓고 걸어갔을 바로 그 길을 찾아서 걷는다.

‘희자’의 ‘걷기’를 보며 필자는 예전에 미친 듯이 밤길을 걸었던 것을 떠올렸다. ‘멘붕’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꼈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걷기’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육체적인 피로나 도시의 매연, 밤길의 위험성 같은 것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걷기에만 집중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희자’처럼 약간 정신을 놓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무모한 걷기 이후 마음이 한결 누그러짐을 느낄 수 있었다. 걷기는 나나 ‘희자’의 지친 마음과 무기력함을 어루만져 주는 하나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그 이후로 한참동안 ‘걷기’를 잊고 있었다. 걷기 대신 간편하고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술’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 다시 걷기가 필요해진 것은 십여 년 전 임신한 몸에 이상반응이 나타나고부터이다. 두드러기 발진이 생겼는데, 독한 약을 처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한 것은 바로 걷기였다. 걷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두드러기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걷기의 효능을 경험한 후 필자는 지금까지 ‘매일 한 시간씩 걷기’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통해 건강도 많이 회복했고 그만큼 마음의 안정과 평화도 같이 찾아온 것 같다.

걷기가 가져온 또 하나의 즐거움은 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감싸고 ‘마사이워킹’을 하는 아줌마들, 구두를 신고 와이셔츠를 입은 채 열심히 걷는 ‘중년 아재’들, 가벼운 산책과 함께 커피 한 잔을 들고 옆 사람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 이면에는 또 다른 ‘나’나 ‘희자’가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필자에게 걷기는―목적지를 향해 가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이 담긴 각박한 삶이 주는 하나의 위로로 보인다.


이야기가 있는 서울 도심 보행길 계획, 동부산 관광단지 내 공원 녹지 설계공모 워터프론트 계획안 Ⓒ우리엔디자인펌

걷기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높다. 각종 걷기 프로그램과 이벤트들은 걷기를 통해 배우고, 느끼고, 기억하기를 바란다. 걷기를 사회적 자산으로 인정한 각 지자체에서는 이러한 시류에 편승하여 다양한 사업 구상안들을 내놓고 있다. 몇 년 전에 우리 회사에서는 ‘걷고 싶은 서울길 마스터플랜 용역’을 수행한 적이 있다. 서울의 외곽 산, 숲과 하천, 마을길 등을 연계하는 총 연장 157km의 서울 둘레길을 정리,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선정된 노선의 수배에 달하는 기존 길들을 조사·분석하였고, 길과 함께 하는 관광, 문화자원을 연계하여 스토리텔링하고 안내체계를 정비하였다.

최근에는 ‘서울 도심보행길 조성사업’ 용역을 수행, 많은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서울의 도심을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보행길을 통해 엮어내고자 하였다. 전체 구간 중 일부인 6.0km 구간에 대한 시범사업이 올해 시행되어 스토리텔링과 안내에 대한 계획안이 현실화될 예정이다. 서울 둘레길과 서울 도심보행길은 각각 서울의 외곽과 중심부에 위치하며 이용 주체라든지 목적 등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기존 길의 연계와 길을 통한 이야기의 공유라는 측면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반면에 길이 아닌 공원·녹지의 현상설계를 수행하면서 관 주도가 아닌 우리 회사의 차원에서 설계의 주요 개념으로 ‘순례길’을 제안한 적이 있다. 단순히 설계자가 점적인 외부 공간을 멋지게 만들어 내기보다 좋은 자연 환경과 역사, 문화 요소들을 사람들 스스로―걷기를 통해―찾고, 만들고, 누릴 수 있기를 원했다. 기존의 공간이 가지고 있는 힘은 오랜 시간을 두고 쌓아온 물성에 있으며, 이는 사람들이 꾹꾹 눌러 밟고 지나는 길 위에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설계자의 역할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담을 수 있는 장치를 제안하는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 아파트 조경설계에서도 우리는 가장 먼저 길에 주목하고 길을 중요시한다. 현재의 트렌드에 맞는 화려하고 멋진 공간과 좋은 아이템을 배치하긴 해야 하지만, 결국은 길이 그러한 공간들을 엮어 가며 더욱 풍성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물성이 존재하기 힘든 아파트 개발 방식을 고려할 때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상 새로 만들어지는 이 곳, 이 길 위에서 채워질 것이다. 시작점이 어디가 됐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가득한 동네를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다.

『동네 걷기 동네 계획』이라는 책은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동네 길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출발한다. ‘걸어서 좋고’, ‘걷기가 좋은’ 동네는 어떤 동네일까? 저자는 ‘걸어서 많은 것을 편하게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니 많이 걷게 되어 좋은 동네 만들기’를 목표로 한다. 굳이 차가 아니어도 원하는 지점으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고 각자의 많은 원하는 지점들이 서로 연계되고 교차하면서 자연스럽게 걷기가 많아지는 동네, 이를 통해 건강과 커뮤니티 등 다양한 가치가 구현되는 동네, 결국 함께 걸음으로써 ‘살기 좋은 동네’가 실현됨을 이야기한다.

논밭을 갈아엎고 만든 새 아파트가 됐든, 오랫동안 사람이 살아 온 기존 동네가 됐든, 또는 도시의 번화한 중심 공간이 됐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산 속이 됐든, 사람이 사는 곳이면 모두 다 동네라 할 수 있다. 조경가는 이러한 동네를 계획하고, 설계하고, 만들어낸다. 공간을 만들고 이를 엮어 주기도 하며, 물리적인 네트워크의 구축을 통해 새로운 공간들을 발견하고, 호흡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또한 각각의 공간과 길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 서로 이어주고 공유하고 때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사람들의 매일(일상)을 쌓아가게 하고, 때로는 위로해 주며, 배움과 깨달음도 줄 수 있는 곳은 바로 길 위라고 생각한다. ‘디마프’에서 ‘정아’가 ‘길 위에서 죽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이 단지 객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한 길이 또한 단순히 물리적으로 반듯하고 굴곡이 없어, 편안하고 안전하기만 한 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 길은 오히려 다소 험하고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항상 내재되어있는, 그래서 어느 순간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는 그런 길이다. 각자의 고된 인생길, 그 길 위에 조경가가 함께 할 수 있기를 그리고 따뜻한 위로를 건넬 수 있기를 항상 꿈꾼다. 


라펜트는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과 함께 조경의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를 매달 1회씩 게재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현재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향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조경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논의의 장으로서 조경인 모두의 관심과 함께 연재가 이어가기를 기대해봅니다.

 

*8월 필자는 안계복 교수(대구가톨릭대학교)입니다.

_ 강연주 대표  ·  우리엔디자인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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