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답사기] 2016년 하계학술답사를 다녀와서… (1)

이승연 우석대학교 조경토목공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라펜트l이승연l기사입력2016-10-07
(사)한국전통조경학회 2016 하계학술답사기


2016년 하계학술답사를 다녀와서… (1)
- 2016. 7. 14 ~ 7. 17. 북경·승덕·당산 -


글_이승연 우석대학교 조경토목공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여행이든 답사든 목적지가 해외라면 보통은 설렘에 가슴이 부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통조경학회 여름답사는 목적지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기대 반에 나머지는 걱정과 각오로 채웠다. 13살과 7살 아들들을 데리고 답사를 나선 것이다. 큰 아들은 먹거리가, 작은 아들은 잘 걸을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우리는 하루 일찍 집을 나섰다. 막상 출발하니 이게 더 행복한가 싶기도 하다.

7월 14일 이른 아침. 공항이다. 반가운 인사들을 건넨다. 반년 만에 뵙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서먹하지 않다. 여행에의 기대와 이런저런 흥분 탓인지 모두들 환해 보인다. 긴긴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북경공항에서 원명원으로 이동하는 동안 타국에 온 것을 실감한다. 다양한 탈 것들이 도로를 달리고 있다. 배를 내놓은 아저씨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북경은 강수량이 아주 적다고 했는데, 나무들이 무척 성하다. 가로수로 많이 심겨진 회화나무도 한국에서 보던 것보다 크고 풍성하다. 북경의 여름은 전반적으로 무덥고, 종종 35°C를 넘는 고온현상도 나타나며 연강수량 571 중 423가 6~8월에 내린다고 한다(서울 연강수량 1,450). 강수량이 적고 큰 강도 없는데, 지하수가 풍부하여 어디를 파도 물이 솟는다고 하니 신기하다.


북경 (출처 : 위키백과)

첫 번째 답사지는 원명원(圓明園)이다. 1709년 강희제가 넷째 아들 윤진에게 준 별장으로 윤진이 후에 청나라 제5대 옹정제(생애: 1678~1735, 재위: 1722~1735)로 즉위한 후 여러 건물을 증축하고 정원도 확장하였다. 이후에도 원명원은 계속 확장되어 서북 교외지역의 원림구에서 가장 큰 황가원림이 되었고,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해 전소되기 전, 제9대 황제 함풍제까지 약 140년 동안 청나라 황제들은 대부분 이곳에 기거하며정무를 보았다. 원명원 근처에는 산도 없고 흐르는 강도 없다. 하지만 90cm만 땅을 파면 물이 나올 정도로 지하 수원이 풍부하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평지에 지어졌지만 가산과 연못이 모두 함께 하는 산수 원림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다음은 월드클래스 김혜인 기자의 원명원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다.


원명원 서양루 지구 (출처 : 이승연)

정원의 각 풍경과 건물은 천하의 이름난 정원들과 역대 황제의 정원을 모방해 만든 것으로, 당시 중국 조경예술의 최고 수준을 반영한 매우 아름다운 조경 유산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50여 년에 걸쳐 완성된 원명원의 최종 모습은 1천여 개의 궁전과 100여 개의 경관, 600여 개의 크고 작은 축구장 등이 있었고 총 면적은 약 100만평 정도에 달하는 크기였다고 한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겨울에만 자금성에 들어가 머물렀을 뿐, 제의와 경전, 국사 집행 등 대부분의 시간을 이 원명원에서 보냈고, 고로 당시 황실의 주 무대는 자금성이 아니라 원명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명원은 19세기 세계 최고의 정원으로 일컬어지며, 외국인들 사이에서 ‘만원지원(萬園之園: Garden of Gardens)'이라고 불렸다.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성당의 보물 전부를 모아도 원명원에는 견줄 수 없다”라고 칭송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1860년, 아편전쟁 이후 영국ㆍ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3일 밤낮 내내 태워져 현재는 아주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정원 내 소장된 150만점 가량의 유물도 불에 태워지거나 약탈 당해, 현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원명원 약탈 소식을 전해들은 빅토르 위고는, “두 강도가 박물관을 부수고, 물건을 약탈하고, 그곳에 불을 지른 뒤 가방에 한 가득 보물을 담아 손을 잡고 낄낄대며 나왔다. 한 강도의 이름은 영국이고, 다른 강도는 프랑스”라고 이들의 처사를 강하게 비난했다. 우리가 보았던 빅토르 위고의 흉상은 원명원 약탈 150주년을 맞아 특별히 제작한 것이었다.


원명원 호수 (출처 : 이승연)

원명원연구회의 고진 부위원장과 문화재청 조운연 과장의 강의가 있었다. 원명원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그닥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여성이 높은 직책에 올라 있다는 것이 신선했고 중국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했다. 조운연 과장께서는 ‘창덕궁을 중심으로 한 조선궁궐의 복원과 정비’를 주제로 한글파일과 ppt파일을 준비하셨다. 정비되기 전의 궁궐 모습과 과장의 우리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이 인상적이었다.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 아들들은 아빠와 함께 원명원을 20여분 주유했다고 한다. 재미있었던지 표정이 아주 밝다. 아들이 건넨 시원한 음료가 기대 이상으로 맛있다.

세미나 (문화재청 과장 조운연) (출처 : 이승연)

답사를 다니다 보면 처음 방문했을 때 강렬한 인상을 받을 때도 있고, 여러 번 가 본 곳이라 별 기대 없던 곳에서 깊은 감동을 느낄 때도 있다. 원명원은 전자는 아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생각해내기 전에 이미 정신을 팔렸다고 해야 할까. 뜨겁게 달궈진 대기 속, 다른 언어를 쓰는 그 많은 사람들이 경관을 압도했다. 내 기억이 요 모양이라서, 원명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들에게 물었다. 사람이 많았던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남원시가 면적은 서울보다 넓고 인구는 8만이라지 아마. 원명원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내 아이들의 환한 얼굴이다. 명색이 학술답사인데 정신 좀 바짝 차려야겠다.


북경 내 답사지 위치 (출처: 구글지도 수정)

5시 50분. 이화원으로 출발했다. 이화원은 1153년 금나라 완안량 황제가 행궁을 설치한 것이 시초가 되었던 곳으로, 1764년 청나라 건륭제가 개축하여 청의원(淸漪園)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750년(건륭제15년)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항주 서호를 모방하여 공사를 진행했다. 건륭제는 6번에 걸쳐 강남을 순행했고 그때마다 소주, 양주, 항주 일대를 방문하였다. 또 항상 화공을 대동해 마음에 드는 경관이나 건물을 그리게 하였다. 그 그림들을 참고하여 청의원의 여러 건축물과 경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건륭제는 원림의 이상적 조감도 같은 것이 강남지역에 있었나보다. 곤명호는 이화원 면적 2.9평방킬로미터 중 3/4에 해당하며, 사람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완전 수작업 호수이다. 파낸 흙은 만수산을 쌓는 데 사용되었다.

최고의 장인들이 조성한 아름다운 청의원은 원명원과 같이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해 모두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그 후 1888년 서태후가 해군 예산 30만은을 유용하여 재건·확장하였고, 이화원(頤和園)이라 이름 붙였다. 다시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일본과 서양 8개국 연합군에 의해 부서진 것을 1902년 서태후가 파괴된 부분을 재건하였다. 1998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이화원은 황궁이 아니므로 용마루가 없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동문(정문)으로 들어섰다. 행궁형 황가원림, 즉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기 위해 세운 이화원은 원명원과 마찬가지로 정문 바로 앞에 궁정구가 있다. 정문이 동쪽에 있는 것은 원명원과 이화원을 오가는데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이화원과 원명원 (출처: http://desert.tistory.com 수정)

인수전(仁壽殿)에 이르렀다. 원래는 근정전이었으나 서태후가 정권을 잡은 후 주로 이화원에 머물며 정무를 보자 이름을 바꾼 것이다. 청동으로 만든 미끈하게 빠진 봉황과 5개의 발톱을 자랑하는 황룡이 건물 앞에 서있다.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정면에 기린상이 있는데,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같은 상상 속 동물인데도 그 구체성으로 인해서인지 기린은 귀엽지가 않다.

인수전을 지나면 서태후의 침전건물인 낙수당(樂壽堂)이 있다. 전정에 커다란 태호석이 있는데 가이드가 계속 사진 찍지 말라 주의를 준다. 이 돌을 놓고 청이 망조가 들었다나. 이름도 ‘청지수’가 아닌 ‘폐가석’으로 불린단다. 청왕조의 몰락을 덤터기 쓰다니, 태호석으로서는 억울할 일이다. 서태후는 장수를 상징하는 박쥐 문양과 壽라는 글자에 집착했다고 한다. 실제로 궁궐 곳곳에 정교한 박쥐 장식이 많이 보인다. ‘壽’자 붓글씨도 액자로 걸려 있는데 그녀가 가장 많이 쓴 글자란다.


인수전 기린상, 이화원 곤명호 (출처 : 이승연)

많은 인파 속에서 아들을 놓치면 큰일이다. 손 꼭 붙잡고 다시 부지런히 가이드를 따르는데, 헉! 저게 뭐지? 왼쪽으로 언뜻 바다 같은 게 보인다. “태윤아 태윤아 저거 봐봐.” 곤명호다. 건축물에 큰 흥미를 못 느끼던 아들도 흥분한다. 옆에 계시던 서동일 박사께서 한마디 하신다. “이래서 중국 경관을 억경이라고 하는 거예요. ‘억’하고 숨이 막히거든. 하하.” 장랑에 들어섰다. 이 호수를 어떻게 봐야 하나. 우리는 이 어마어마한 호수가 사람이 판 거 란걸 알고 있다. 낭창낭창 늘어진 수양버들이 아릿하고, 출렁이는 물결이 눈부셔서 몽롱해진다. ‘내가 이걸 보려고 이곳에 왔구나.’ “엄마! 엄마! 이 호수가 군사 15만 명이 10년 동안 판거래!” 어디선가 귀동냥을 한 아들이 흥분해서 외친다.

다음 일정 때문에 장랑 초입에서 돌아 나왔다. 그러고 보니 원명원도 이화원도 바닥포장에 큰 공을 들이지 않았다. 소주·항주 지역의 정원들은 하나같이 바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책에서도 중국조경의 큰 특징이 바닥포장이라 읽은 것 같았는데 사가원림의 특징이었나 보다.

7시 북해공원에 도착했다. 자금성의 서쪽 정원에 해당하는 북해공원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건설되고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황성어원이라 한다. 태액지라는 이름이 그다지 실감 나지 않았었다. 시간이 늦어 영안사 입구에서 돌아 나왔는데, 나중에 지도를 보니 호수의 크기를 가늠하기가 힘든 위치였다. 영안사 산문 앞 양쪽으로 오래 된 측백나무가 있다. 신선의 나무로 알려져 특히 중국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던 나무로, 열매를 오래 먹고 신선이 되었다는 여러 고사가 전한다. 봉래선산이라고 만들어 놓은 만수산에 꼭 있어야 할 나무인 것이다. 신상섭교수께서 “사자가 왜 안쪽을 보고 있는 거야” 툭 던지신다(신교수께서는 질문을 하실 때 끝을 올리지 않으신다. 질문인지, 말씀을 계속 하실 건지 가끔 헷갈린다.). 그러고 보니 영안교 건너기 전, 바깥쪽을 보고 있던 석사자 두 마리가, 다리 건너서는 등을 보인 체 안쪽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왜 안쪽을 보고 있지? 왜일까? 일단 섬에서 신선이 되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건가? 모르겠다. 북해공원 북쪽의 스차하이는 북경과 항주는 잇는 1,800km 길이 경항대운하의 종착점이라고 한다.


북해공원 (출처 : 이승연)

7시 35분 밥 먹으러 출발이다. 배고프고 발바닥 아프다. 큰 아들은 점심 메뉴가 중식이라니까 짜장면인줄 알고 좋아했다가 통 못 먹었었다. 배가 고픈지 저녁을 많이 기다리는 눈치다. 저녁식사도, 숙소도 기대가 된다. 시장함과 피곤함이 적당히 머리를 맑게 한다. 많이 먹고 푹 쉬어야지. 그러고 보니 차량이 현저하게 줄었다. 3차선까지 나오는 자전거들이 아슬아슬해 보인다. 화려했던 상해와는 많이 다른 야경이다. 가로등도 7시 45분 현재 켜지지 않았고 라이트를 켜지 않은 오토바이들도 많다. 상당히 어두운데. 북경은 비 오는 날이 10여일이라고 가이드께서 말씀했었는데,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글·사진 _ 이승연  ·  우석대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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