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답사기] 2016년 하계학술답사를 다녀와서… (3)

이승연 우석대학교 조경토목공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라펜트l이승연l기사입력2016-10-21
(사)한국전통조경학회 2016 하계학술답사기


2016년 하계학술답사를 다녀와서… (3)
- 2016. 7. 14 ~ 7. 17. 북경·승덕·당산 -


글_이승연 우석대학교 조경토목공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7월 16일 토요일 아침 8시 40분. 청동릉 가는 고속도로. 경관이 확 달라졌다. 산의 모양이 우리와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에 저런 산이 있다면 명승으로 지정됐을 것 같은 특이한 모양새다. 제주도에 처음 갔을 때 산의 모양이 달라서 놀랐던 기억이 새삼스레 났다.


청동릉 (출처 : 이승연)

청동릉은 청나라 황제의 능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고분군이다. 자금성 동쪽으로 100km 떨어진 하북성 준화시 창서산 기슭에 위치한다.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이 자금성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명조 황제능묘인 천수산에 좋은 자리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선정한 곳인데 정작 자신은 묻히지 못했다. 이후 청 제3대 순치제가 자신의 능묘로 이곳을 선택하면서 본격적인 청나라 황제능묘로 조성된다. 순치제의 효릉을 중심으로 15기의 왕릉이 있으며, 5명의 황제, 15명의 황후, 136명의 비빈, 2명의 공주, 3명의 왕자들이 안치되어 있다.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완벽한 제왕 능묘군이라는 설명이다. 황제가 5명인데 부인이 150명인 거냐고 아들이 놀라 묻는다.

석패방 (출처 : 이승연)

전담가이드의 인솔을 받아 버스에 올랐다. 가장 남쪽의 석패방에서 중심영역인 효릉까지 약 5km라고 한다. 능묘영역 안인 데도 과수원, 밭, 마을주민, 숲 등 참 일상적인 모습이다. 거대한 석패방, 대홍교, 신공성덕비정, 석상생, 용봉문을 버스로 지나쳤다.


능 배치(자희릉) (출처: http://blog.daum.net/_blog 수정)

유릉(건륭제)에 도착했다. 석교를 건너고, 능은문과 상서로운 문양을 정교하게 새긴 답도를 지나 능은전(陵恩殿)에 이르렀다. 건물 내부는 오히려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많이 쇠락해있다. 긴긴 진입공간이 살짝 허망해지는 순간이다. 능은전 뒤편의 방성명루(方城明樓) 공간, 능내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축물로 이곳은 사람이 드나들지 못하는 신의 영역이다. 실제로 명루(明樓)에 오르는 계단을 만들지 않아 관광객을 위한 임시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명루 뒤편의 봉분을 벽돌로 둘러싼 원형담장(寶城)과 한 구조물이다. 보성 내 지하궁전에 시신을 매장했다.

명루를 들어서자 벌써 아래서부터 찬바람이 밀려온다. 사람이 많아 거의 떠밀려서 내려가는 중에도 벽면 가득 채운 조각들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중국에서 발굴된 능묘 지하궁전 중 가장 정교한 조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러나 벽면과 바닥에 물기가 흥건하고, 천장에까지 녹색 곰팡이가 피어있다. 외부와의 온도차이 때문에 심할 때는 바닥에 물이 찰박거릴 때도 있다고 한다. 절대 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문 여는 어떤 장치도 만들지 않았던 문이 열리면서 일어난 사달이다. 조각에 홀려 내려가다가 두꺼운 두 개의 돌문을 지나니 건륭제의 관이 놓여 있다. 당혹스러웠다. 황제의 관을 아니 누군가의 관을 눈앞에서 본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 효의황후와 숙가황귀비가 같이 묻혔는데, 효의황후 관은 도난당하여 유리상자만 놓여있었다. 여기까지에 비해 막상 별게 없다고 아들이 실망했다. 관까지 도난당하는 판에 뭐가 남아있겠는가. 그나저나 건륭제께서 참 시끄러우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 내부를 공개하지 않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은 조선왕릉 뿐이라고 이창환 교수께서 설명하셨다. 다행이다.


유릉 지하궁 벽면조각, 자희릉 능은전 내부 (출처 : 이승연)

유릉을 나와 한참을 걸어 서태후의 능 자희릉에 도착했다. 서태후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직접 조성한 능묘였지만 규모는 황제를 능가할 수 없었다. 별일이다. 그녀는 법도 위에 있는 줄 알았더니, 안되는 것도 있었나 보다. 자희릉 능은전 앞 답도에는 봉황과 용의 위치가 바뀌어있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자신(봉황)의 아래에 둔 것이다. 황제보다 높이 날고 있는 그녀. 세상에 자신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었고, 아닌 척 겸손해 하지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능은전 내부에 들어서면 더이상 봉황인척 하지도 않는다. 금색 용이 기둥마다 휘감아 오르고 있다. 그녀 자신이 황제가 된 것이다. 사진에 보이는 용의 빛깔이 흐린 것은 물론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온통 금으로 도배했던 전의 내부는 국민혁명군12군장 손전영의 부대에 의해 모두 뜯겨졌다. 서태후가 평생을 모아 지하궁궐로 가져간 보석들도 모두 도굴되었다. 다음의 서태후릉 도굴 사건은 원체 유명한 이야기다.

보물을 추리는 과정에서 충격이 가해졌고, 시체가 움직이면 서 입에서 강한 쪽빛이 새어 나왔다. 더위를 막아 몸을 서늘하게 해주고 죽은 사람에게 물리면 천년이 지나도 시체가 썩지 않는다고 알려진 ‘야명주’였다. 구슬을 꺼내려다가 목구멍 뒤로 넘어가버렸고, 목구멍 깊이까지 손가락을 넣어 더듬었지만 잡히지 않자, 결국 서태후의 입속으로 칼을 쑤셔 넣고 좌우로 갈라 구슬을 꺼냈다. 그의 군사들은 서태후의 저고리, 바지, 신발, 버선까지 모조리 벗겨 보석을 뜯었고, 혹시나 야명주가 더 있을까 싶어 음부에까지 손을 넣고 훑었다. 사흘간에 걸친 청동릉 도굴로 손전영은 손수레 30대 분량의 보물을 획득했다. 퇴위한 황제 부의와 청 왕조의 유신들은 비통해했고 이틀간의 어전회의 끝에 도굴자 수배에 나섰지만, 손전영은 국민당 정부요원들에게 전방위로 뇌물을 바쳤고 결국 일은 흐지부지 없었던 일이 됐다.

명루를 지나 지하궁으로 들어가면 유릉보다 초라하다. 유릉은 벽과 천장의 아름다운 조각들이 남았지만, 보석으로만 치장했던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보성(寶城)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본다. 오른쪽으로 동태후의 자안릉이 보인다. 서태후가 동태후를 시기하여 죽어서는 자신이 동쪽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보다는 서열상 동태후가 높았으므로 함풍제의 정릉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자희릉을 나오면서 문득 궁금해진다. 그녀는 참 잘도 살았구나. 죽임당하지 않고, 어떻게 늙어서 죽었을까. 대단히 정치적인 인물이었을 거란 추측을 해본다.

북경으로 돌아간다. 고속도로로 160km. 첫날 묵었던 호텔에서 다시 묵는다. 꼭 집에 가는 기분이다.


북경, 승덕, 당산 위치 (출처: 구글지도 수정)
글·사진 _ 이승연  ·  우석대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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