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답사기] 2016년 하계학술답사를 다녀와서… (完)

이승연 우석대학교 조경토목공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라펜트l이승연l기사입력2016-10-28
(사)한국전통조경학회 2016 하계학술답사기


2016년 하계학술답사를 다녀와서… (完)
- 2016. 7. 14 ~ 7. 17. 북경·승덕·당산 -


글_이승연 우석대학교 조경토목공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7월 17일 일요일. 벌써 답사 마지막 날이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3박4일은 좀 서운하다. 호텔에서 편하게 먹는 아침도 마지막이구나. 기름기 가득한 페스추리가 오늘따라 더 맛있다. 김묘정 박사께서는 대만에서 유학하실 때 10kg이 쪘다고 하시던데, 나도 이곳에 오래 머물면 그렇게 될 것 같다. 3박4일인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오늘 답사는 원림박물관과 자금성으로 팀을 나눠 출발한다.

중국원림박물관은 중국에서 조성한 첫 번째 원림박물관이다. 2013년 5월 18일 개관하였고, 중국에서 처음으로 원림만을 주제로 조성한 박물관이다. 중국 수 천년의 원림문화를 전시하고 살아있는 교과서로서 역할을 하고자 국가 차원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 원림 양식뿐만 아니라 세계의 대표적인 원림 양식들이 설명되어 있다. 원림박물관의 공간 구성은 크게 본관과 실내전시장, 실외전시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본관에는 원명원 복원모형을 형상화한 전시관이 있으며,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실내전시장에는 중국 원림의 역사가 문헌자료와 모형으로 설치되어 있다.

또한, 세계 각 국의 원림 양식을 패널, 모형으로 설명되어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원림으로는 북한의 안학궁과 남한의 동궁과 월지가 소개되어 있다. 다른 국가의 체계적인 설명과 달리 한국은 패널 하나와 짧은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국내에서 K-Garden 등 한국만의 콘텐츠의 발전과 관심이 증대되는 것과 반대로 대외적으로는 한국정원의 홍보가 미비한 실정이다.

이번 하계 학술답사 이전에는 중국의 이화원, 자금성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하지만, 원림박물관을 견학한 이후에는 원림에 대한 생각이 확대되었다. 앞으로는 학회 교수님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들도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 즉, 한국 정원만의 콘텐츠를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림박물관 조감도(출처 베이징관광국), 한국원림 패널(동궁과 월지, 포석정)

원림박물관 앞에서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자금성. 현존하는 궁궐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1421년 명나라 3대 영락제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해 1924년 선통제(부의)가 여기서 쫓겨날 때까지 5백 년 동안 명나라"E청나라 두 왕조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중국을 통치했다. 동서 760m, 남북 960m, 980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곳은 공안의 검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인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여기만큼은 아니었다.


자금성 배치도, 천안문 광장, 오문(좌부터 시계방향)

지하도를 통해 천안문(天安門) 광장으로 올라갔다. 황성의 정문이다. 왕조 시대에는 새로운 법률의 반포와 출전 또는 개선하는 군대가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 문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이래 신중국의 상징이 되어 현재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정말 넓은 광장이다. 큰아들에게 혹시나 엄마아빠와 헤어지면 마오쩌둥 사진 아래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럴 일이 있어선 안되겠지만... 계속 직진이다. 상당히 걸음이 빠른 가이드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천안문과 같은 모양의 다음 문은 단문(端門). 조회 시 만조백관들이 이 문 앞에서 꿇어앉아 대기하다가 황명이 내리면 들어갔다고 한다. 역시 붉은색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음 문인 오문까지는 상당히 멀다. 진입로 좌우로 회화나무가 열식되어 있다. 원래부터 있던 건 아닐 것 같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에 이르렀다. 어마어마하게 높은 붉은색 직벽이 위압감을 준다. 저 아래 뚫려있는 몇 개의 구멍이 아니라면 이걸 누가 문으로 볼까. 문이 열리지 않는 한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다. 남문정중앙에 있는 전루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이 건물과 함께 자리한 4개의 다른 전각의 배치가 봉황이 날개를 편 것과 비슷하다 해서 속칭 오봉루(五鳳樓)라 부른다. 황제가 새 달력을 반포하거나 명절에 신하들에게 물품을 하사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5개의 문 중 가운데의 문은 황제 전용이다. 황제 아닌 사람이 여길 지나갈 수 있는 경우는 국혼날 가마를 탄 황후가 입궁할 때와 과거 전시에서 진사급제한 장원"E방안"E탐화가 퇴궐할 때 뿐이었다. 서태후가 황제 이상의 권력을 휘두를 때도 끝내 가운데 문은 한 번도 이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태화문

오문을 통과하면 다음은 태화전의 전문인 태화문(太和門) 공간이다. 넓은 전정에는 명당수 역할을 하는 내금수하(內金水河)가 흐르고 있고, 5개의 다리(金水橋)를 놓았다. 정면 9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태화문 오른쪽의 소덕문을 통해 태화전 공간으로 들어섰다.


태화전, 태화전 기단부 용머리모양 배수시설, 출처 sbs 뉴스 화면 촬영

이 공간에 진입하면서 대부분의 초행자들은 한 번은 멈춰선다. 물론 사진을 찍으려 멈추는 거지만, 놀라서도 멈춘다.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太和殿). 정면 11칸, 측면 5칸, 한백옥으로 된 3단의 기단 높이 8.13m, 기단까지 합친 건축물 높이 35.05m로 중국에 현존하는 궁전 건축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목구조물이다. 태화전이 자리한 월대에는 황제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일구(日晷)와 가량(嘉量), 장수를 상징하는 청동거북과 청동학, 그리고 동정(銅鼎) 18개가 놓여 있다. 자금성에서 가장 넓은 마당을 가진 이곳에서 황제의 즉위식, 국혼, 황후 책봉, 조회 등 국가적인 중대사가 이루어졌다. 태화전 좌우의 담장은 원래 회랑이 있었던 자리였으나 청나라 때 화재를 막기 위해 지금과 같은 담장으로 바꿨다. 태화전의 규모와 더불어 인상적인 것이 용머리모양의 배수구이다. 태화‧중화‧보화전 월대에 이런 배수구가 1,142개라고 한다. 일제히 물을 내뱉는다면 장관이리라 생각했는데, 답사에서 돌아와서 얼마 안지나 뉴스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물폭탄에도 끄떡없는 자금성’이라는 제목으로 자금성의 배수시설에 대한 보도가 쏟아졌다. 중국 북구 지방에서 55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져 116명이 숨지는 등 수도 북경이 18년 만에 물난리를 겪고 있지만 자금성은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자금성이 피해를 보지 않은 이유는 명나라 영락제 때부터 600년 역사를 지닌 배수시설 덕분으로 건축물, 경사진 지표면, 외부로의 배출 3단계가 정교하게 갖춰져 있어 해자(垓子)도 물이 넘치지 않았다고 전했다. 현재 북경의 배수시설이 그 옛날에 미치지 못하여 물난리가 났으니, 자금성 외조천여 개의 용두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장관이라고 차마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중화전(中和殿)과 보화전(保和殿)을 지나 건청문 앞에 섰다. 날이 정말 뜨겁다. 자금성을 직진으로 통과하고 있는데도 작은 아들은 업히기를 반복한다. 아이스크림으로 열기를 한 번 식히고, 다시 출발. 이제부터는 황제들의 사적인 공간이다.


건청궁 정대광명 편액, 교태전 무위 편액, 만춘정

건청문을 지나 건청궁(乾淸宮)에 이르렀다. 이곳은 황제들이 거처했던 곳으로 서재와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황제가 업무를 보았던 보좌 위로 순치제가 썼다는 ‘正大光明’ 편액이 보인다. 강희제 이후 황제가 살아생전에 후계자를 선포하지 않고, 이름을 적은 종이를 작은 함에 넣어 이 편액 뒤에 보관했다가 황제가 죽은 후 계승자 이름을 적은 다른 종이와 일치해야 다음 황제를 선포했다고 한다. 태화전과 마찬가지로 황제를 상징하는 다양한 물건들이 건청궁 주변에 놓여있다. 그중 가장 신기했던 것은 건청궁 양쪽 월대 아래에 놓인 금전(金殿)이었다. 금색의 전각모형인데, 국토와 국가를 상징하는 금전을 이곳에 둠으로써 강산사직(江山社稷)이 황제의 관할하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라고 한다.

건청궁 뒷편으로 지금까지 보았던 스케일에 견주어 대단히 아담한 3칸"~3칸의 교태전(交泰殿)이 있다. 명나라 때는 택일을 받아 황제와 황후가 합방하는 곳이었지만, 청나라 때는 명절이나 생일을 맞아 황후가 인사를 받고 옥새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황후의 보좌 위로 강희제의 글씨인 ‘無爲’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는 도교의 정치적 이상을 말하는 거지만, 편액이 걸린 장소가 장소인지라,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걸었나 싶기도 하다.

교태전 바로 뒤의 곤녕궁(坤寧宮)은 명나라 때 황후가 거주하는 곳이었지만, 청나라 때는 만주족의 전통종교인 살만교의 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황제가 황후를 맞이했을 때 곤녕궁의 동방(洞房)에서 3일간 신방을 차렸다고 한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 바로 옆에 신방을 차리다니..


건청궁 금전, 퇴수산 어경정

곤녕문을 지나자 갑자기 수목이 울창하다. 황궁의 휴식장소인 어화원(御花園) 공간이다. 아름다운 정자와 누각, 가산과 괴석이 적정한 자리에서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다. 원형과 다각형의 중층 지붕을 얹은 만춘정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만춘정 사방으로 두 다리로 선 듯한 향나무가 있는데 인자백(人字柏)이라고 부른단다. 부벽정에 앉아 짧게나마 여유를 부려본다. 어화원 북동쪽 가산(堆秀山) 꼭대기에 있는 어경정(御景亭)은 추석이나 중양절에 황제가 달을 감상하기 위해 찾았다고 하는데, 화원 전체는 물론 궁성 내외의 경치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순정문과 경산

어화원의 북문인 순정문(順貞門)과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나선다. 저 앞으로 황궁 해자와 근처 인공연못들을 만들면서 퍼낸 흙을 쌓아 만든 경산(景山)과 만춘정(万春亭)이 보인다. 답사의 끝을 알리는 경관이다.

답사를 무사히, 우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겨울 답사는 어디로 갈 것인지 얘기도 나오고, 떠나있을 때는 잊고 있었던 자잘한 집안일도 생각난다. 어쨌든지 간에 귀국하는 비행기 안이 벌써 편안하다. 타국이라고 나도 모르게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던가 보다.


청동릉 유릉 능은전 앞에서

상당한 시간 동안 이 글을 쓰면서 계속 궁금했던 것 중 한가지. 북해공원의 석사자가 왜 섬 안쪽을 지키고 있었을까.. 신선이 섬 밖으로 못나가게 지킨다는 건 그냥 해 본 소리였고. 왜 안쪽을 지킬까? 그러다 퍼뜩 든 생각. 이 섬 지천에 널려 있을 불로초의 밀반출을 막으려는 거구나! 삼신산이니 불로초가 있을게다. 불로초를 지키는 서수(瑞獸)도 있어야 구성이 맞지 않을까? 그게 내 결론이다. 상당히 마음에 드는 그럴듯한 결론이어서 지도교수께 여쭙지 않고 있다. 아니라는 대답을 들을까 우려되어...

참, 서태후가 궁금했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중국에서 돌아오고 며칠 있으니, 펄벅 여사가 쓴 「연인 서태후가 도착했다.
글·사진 _ 이승연  ·  우석대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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