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단과 함께 ‘수원화성’ 거닐어보자

한국환경조경학회연합·한국도시설계학회 ‘제2회 도시산책단’ 실시
라펜트l전지은 기자l기사입력2017-06-13


한국환경조경학회연합(한국조경학회, 한국전통조경학회, 한국경관학회, 한국정원디자인학회)에서는 한국도시설계학회와 연합으로 ‘제2회 도시산책단’ 행사를 지난 2일(금) 실시했다.

도시산책단은 학술적 이론 발표와 토론을 벗어나 사례지 대상지를 선정하고 도보로 산책하며 도시설계 이슈와 의미를 현상 속에서 찾는 프로그램이다.

안승홍 한경대 교수를 단장으로 꾸려진 이번 도시산책단의 산책 대상지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계획도시 ‘수원 화성’이다. 정조와 실학자들이 지은 성곽 도시로, 조선 후기 토목 건축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산책단은 이상숙 문화해설사와 함께 연무대를 시작으로 화홍문과 수원천을 지나 수원화성박물관을 관람하고, 행궁동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에서 도시재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공방거리를 거쳐 지동시장에서 답사를 마무리했다.

사진과 함께 수원화성을 거닐어보자.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신도시계획과 함께 축조된 성이 수원화성이다. 읍성과 산성을 모두 갖춘 성곽 도시로, 생활공간이면서 적군을 상대로 전쟁도 치를 수 있었다. 우리 전통 성곽과 서양의 도시 개념을 접목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도시이다.

1794년 착공한 수원화성은 당초 10년을 계획했으나 최첨단 기계, 체계적인 기획, 규격화, 실명제, 급여제 도입으로 2년 9개월 만에 완공됐다. 둘레가 약 5.7㎞, 성곽 높이는 4~6m로, 실학자 유형원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약용이 설계했다.

수원화성에는 큰 문이 4개가 있는데 동쪽 창룡문, 북쪽 장안문, 서쪽 화서문, 남쪽 팔달문이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2층 문으로 크다. 보통 성곽은 북쪽에는 음기운이 들어온다 해서 문을 작게 짓는데 장안문은 북문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임금이 올 때 맞이하는 문이기 때문에 정문으로 쓰고 있다. 크기는 숭례문과 같다고 하며, 면적은 숭례문보다 크다. 남쪽의 팔달문은 정조가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가실 때 남문을 통하기 때문에 크게 지었다. 그리고 사통발달 다 통해서 교통, 군사, 시장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팔달문이라 지었다.

수원화성은 선조들의 뛰어난 자연관과 통치 이념이 반영된 것은 물론이고 예술성과 과학, 경제까지 생각하고 건설됐다. 자연환경을 적절히 이용한 것은 물론, 설계부터 공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이용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동북공심돈

ⓒWikimedia Commons

수원화성에는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이 동쪽과 서쪽에 2개소 설치되어 있다. 그중 동북공심돈은 수원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중 하나로 중국 요동지방에 있는 평돈을 모방해 벽돌로 동그랗게 돈대를 쌓아 만들었다. 애초에 서쪽을 중심으로 행궁과 성곽이 들어섰기에 동쪽이 마지막에 축조되는데, 서쪽부터 벽돌로 지어오면서 기술이 그만큼 발달해 동그란 형태로 쌓을 수 있었다. 서장대에서 군사 지휘를 하면 이곳에서 받아들이고, 목어나 깃발로 신호를 보낸다.


동장대(연무대)


동장대(연무대)는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방이 트여 있어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펴보기에 좋은 군사요충지이다. 서쪽산에는 군사훈련 지휘소인 서쪽에 있는 장대, 서장대가 있다. 당시에는 화성장대가 불렀다. 서장대에서 전체적인 지휘를 하면 동쪽에 있는 이곳에서는 군사훈련을 했다. 당초 연무대 지역은 광교산과 연결이 되어있어서 험악했기에 터를 닦는데 있어서 시일과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저 멀리 동북공심돈이 보이고, 이곳에서는 국궁체험을 할 수 있다.




정조가 1795년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수원에서 하는데, 한양에서 군사 6천 여명을 데리고 내려와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하기도 했다. 성곽을 짓는 2년 9개월간 총 11번의 회식을 열었는데, 그중 6번이 이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참여하는 개인 개인에게 상을 내려주고, 군사들에게는 종3품 이상만 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털모자나 솜옷을 내렸다. 

당시 성곽을 지을 때 국가 예산의 1/10이 들어갔다고 한다. 자금 회전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었는데,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정조는 임금을 지불하면서, 장안문 바깥쪽에 시장을 여는 방법으로 자금을 돌리기도 했다.





연무대 뒤쪽에는 영롱담이 세워져있다. 영롱담은 기와로 꽃문양을 세워놓은 담장으로, 마치 구슬이 울리는 소리가 날 듯한 꽃문양의 담이라는 뜻이다. 연무대 뒤쪽에는 이중담으로 쳐 바깥쪽에는 군사들이 있고 안쪽에 있는 정조를 보호한다. 담장 밑부분은 무늬가 있는 문석대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영롱담을 쌓아 아름다움을 더했다.



말이나 가마에서 내릴 때 디딤돌로 사용하는 노둣돌 혹은 하마석. 정조는 연무대에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말을 타고 오기도 했다. 아래에 난 구멍은 6·25 당시 총탄의 흔적이다. 성곽에 보물이 4개가 지정되어 있는데, 연무대는 훼손됐다가 복원된 건물이기에 보물은 아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개혁을 꿈꿨지만 이루지 못하고 49세에 생을 마감했다. 정권 바뀌면서 이곳이 훼손되고,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더욱 많은 훼손이 일어났다. 특히 625때 연무대에 북한군이 많이 주둔했다고 한다.

수원화성의 가장 아름다운 길








동북포루까지 이르는 선이 갓끈을 맸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라 ‘갓끈대’라고도 한다. 기존 지형에 따라 성을 축조한 선조들의 자연관이 드러난다.

외국 성곽들은 사각으로 되어 있고 밖에 해자가 있다. 그러나 수원화성에는 해자를 조성하지 않았다. 당시 해자를 파야하지 않느냐는 건의가 있었지만, 정조는 성곽을 짓기 전에 이곳의 봉토를 다 보았기에 해자는 굳이 만들지 말고, 성곽은 지형을 살려서 그대로 축조할 것을 요구했다. 건축물의 외형에도 신경을 많이 썼는데 비판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


동북포루


포루는 치성 위에 설치한 누로, 성벽을 밖으로 쌓고 누각이 없으면 치라고 하고, 누각을 쌓으면 포루라고 한다. 군사들의 대기 및 휴식 장소이자 유사시엔 감시와 공격을 위해 쓰이기도 한다. 아래쪽은 돌로 쌓고 중간 부분부터 벽돌로 축조했다. 그 위에 집을 짓고 판자를 깔아 문루를 만들고 좌우에는 활을 쏘는 구멍을 만들었다.

성벽시설물에는 포루, 암문(비밀문), 연무대가 있는데 시설물과 시설물 사이의 간격은 화살을 쏘았을 때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거리와 거의 비슷하다.



판문에는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코에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총알을 쏴 총알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게끔 했다.




성벽 위에는 성을 쌓아서 총구멍을 냈다. 3개가 한 세트인데, 중간 구멍은 아래에 오는 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근총안으로 몸을 은신하고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경사가 졌다. 양쪽은 멀리 있는 적을 제거하기 위해 원총안으로 멀리 내다보니 총안의 각도가 수평에 가깝다.



세트의 중간에 패인 곳은 화살을 쏘는 타구이다. 성곽을 짓기 전까지는 타구가 일자형이었는데,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타구를 오히려 밖에서 오는 적들이 공격용으로 사용해 사선으로 뚫게 됐다.



성곽을 걷다보면 깃발색깔이 바뀐다. 깃발은 오방색으로, 동쪽은 좌청룡 청색, 북쪽은 북현무 흑색, 남쪽은 남주작 적색, 서쪽은 우백호 백색, 중앙에는 임금을 나타내는 황색이다. 당시 군사도시 수원은 주둔했던 군인이 수가 모자라 예비군 제도를 뒀다. 과천시나 평택시 쪽에서 온 예비군들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깃발과 표지석으로 표시를 해두었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




각루는 군사적 요새지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이다. 수원화성에는 총 4개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중 동북각루는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뜻의 방화수류정이라고도 불린다. 정조는 이곳에서 시도 한 수 짓고, 활을 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성곽의 용머리에 해당해서 용두각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천을 따라 남수문으로 가면 거북모양을 띠어 용과 거북이 다 갖추어진 성곽이 되었다.

성곽을 지을 때 당시 재정적으로 많이 힘들었기에 정조는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되 화려하게 하지 말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우 화려하게 축조됐고, 정조가 1795년 어머니 회갑연으로 이곳에 들렀을 때는 화려하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1797년 아버지 참배를 위해 다시 들렀을 때는 매우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다.

서까래가 부챗살로 지붕 3개가 연결이 되어 화려하며, 건축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의 뛰어난 조화를 이룬다. 원래 문이 달려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때 가장 많이 훼손됐다. 피난민들이 문을 떼어 가고, 성벽의 돌을 빼다가 썼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을 다 이주시키고 썼던 돌들을 다 회수해서 복원한 상태이다.



용연이라는 못은 당시 둘레 250m, 수심 1.5m 전후의 반달형으로, 기록에 의하면 2m, 7m의 배가 두 척이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다 메워지고 현재는 축소된 원형으로 복원했다. 수원은 광교산으로 물이 흘러들러 용연을 맴돌고 수원천으로 흘러가는 길이었는데 지금은 그 역할을 못해 가물면 물을 다시 채운다.

당시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염분이 많아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성곽을 지으면서 3년 동안 거름을 주면서 개간을 하고 저수지를 지어 농사를 짓게 했다. 제일 먼저 길을 뚫고, 그 다음 연못을 뚫었다. 수원천변이 당시 24m 넓이였고, 물 깊이 1.5~3m 정도로 준설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준설해서 나오는 하얀 조각돌을 이용해서 성벽을 쌓을 때 기초공사를 했다고 한다. 기초공사는 1m를 뚫고 긴 돌을 박아서 그 돌을 고정시켜서 흙, 모래, 자갈, 소금을 넣고 다져가며 성곽을 쌓았다.



다른 지역에는 없는 수원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인 ‘벽체석연’은 돌로 네모난 틀을 짜고 틀 안은 벽돌로 면을 채워 마치 액자 같이 보이는 표현방식이다. 행궁의 낙남헌에 훼손이 되지 않고 문양이 들어간 게 있다. 왼쪽은 난방을 위해 불을 떼던 곳. 벽돌을 사용했기에 가능했던 아치형태이다.



십자문양은 벽돌과 회벽을 이용해서 문양을 냈다. 역시 벽돌을 활용했기에 문양 표현이 가능했다. 이 건물은 다른 건물과 달리 주춧돌을 크게 했는데, 그만큼 위엄이 있다는 뜻이다.


동북각루에서 본 동북포루




동북각루에서 내려다본 수원천


북암문


장안문을 지키기 위한 암문(비밀문)으로 북암문이라 한다. 다른 암문에 비해서 작게 설계가 됐고, 넓이가 한보 한치다. 조선시대 한보는 어른 걸음의 오른쪽 왼쪽 다 뗀 것이라 한다. 높이는 말을 타고 엎드려서 나갈 수 있는 높이이며, 당시 말은 몽고의 작은 말이었다. 



암문의 위쪽. 위쪽에 돌을 쌓아놓고 있다가 발각이 되면 돌로 다 메꿔버렸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거나 할 때 가까운 암문으로 많이 이용해서 다녔다.


성벽


당시 조선의 성곽은 흙이나 돌로 쌓았다. 조선은 돌이 너무 좋아 굳이 벽돌을 연구할 필요가 없었으며, 벽돌성곽이 태풍에 무너졌던 역사가 있어 더더욱 그러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 때 다시 건의가 되면서 수원화성은 돌과 벽돌이 혼용됐다.

돌을 캐는 법이 재미있다. 추울 때 돌맥이 있는 곳에 구멍을 뚫고 물푸레나무를 마른 것을 넣은 뒤 거기에 물을 부르면 얼면서 물푸레나무가 부피를 팽창한다. 그것을 반복하면 돌에 금이 가고, 그때 돌을 깬 뒤 작게 규격화 해 운반했다.

성벽은 밑에 큰 돌, 위에는 작은 돌을 원칙으로 했지만 막 섞인 부분도 있는데 공사감독에 따라 시공이 다르다고 한다.


오른쪽이 규형을 드러내고 있는 성벽. 북암문에서 볼 수 있다.

성벽을 쌓는데 있어 중국성이나 일본성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벽돌성은 중국의 평요고성, 규형은 일본의 히메지 성을 참조했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중국에서 오는 ‘도서고금집성’이라는 책의 만권 중 오천권을 수입해온 게 있었었는데, 이것을 정약용에게 건네며 3년간 아버지 시묘살이를 하면서 책을 연구하고 성곽축조계획을 잡으라고 언질을 준 것이다. 그래서 정약용이 수원화성을 계획하고 기계를 연구하게 됐다.

정약용 선생이 성벽설계를 할 때 2/3는 안쪽으로 들어가고 1/3은 바깥쪽으로 쌓으면서 규형으로 만들라고 지시했으나, 규형으로 쌓은 곳은 거의 없다. 당시 곡성 부사로 있던 정약용은 성곽이 다 축조된 뒤에 와서 보고 한탄을 했다고 전해진다. 직접 시공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쌓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 못하고 똑바로 쌓았던 것이다.




용연
방화수류정 밖 용머리바위 아래에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살려 연못을 파고 작은 섬을 만들어 용연이라 했다.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연은 남쪽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과 어우러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화홍문


수원화성의 북수문이며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 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화강암으로 쌓은 다리 위에 지은 문이다. 7개의 수문을 통해 맑은 물이 넘쳐흘러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현란한 무지개가 화홍문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 이를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8경 중 하나로 꼽는다.


화홍문의 바깥쪽

총 7개의 홍예문 중에 중앙의 1칸만이 높이와 폭이 크고 나머지는 모두 같다. 수문의 바깥쪽에는 철전문을 설치해 적의 침투를 막았으며, 홍수시에는 위로 올려 쇠사슬로 묶었다.


수원천


화성성역의궤
조선시대 화성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의식 등을 기록한 책으로, 2007년 7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공사 일정, 공사 감독관의 인적 사항, 그림을 곁들인 각 건물에 대한 설명, 자재 운반용 기구, 건물의 세부 설명글부터 공사 수행 중에 오간 공문서와 왕의 명령, 의식, 공사에 참여한 장인의 이름과 각 건물별로 소요된 자재 수량, 전체 공사비용의 수입과 지출 내역도 꼼꼼히 수록되어 있다.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하고, 프랑스군이 강화도로 쳐들어왔을 당시다. 프랑스군은 규장각에 노란 비단으로 싸인 책들이 많아 장수에게 보고했는데, 책을 무조건 실어서 보내라 하고, 나머지는 다 불태워버렸다. 그때 프랑스로 실려 갔던 책 중에 이것이 있었다. 1897년도에 프랑스의 판화 학자가 이 책을 접하고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출간하면서 서구에 알려졌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힘든 시기였기에 관심이 없었다. 이후 1997년에 파리에서 유네스코 회의가 열렸는데 그때야 비로소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책에는 그림과 글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 그대로 복원이 가능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글·사진 _ 전지은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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