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옴스테드 조경철학의 계승자 찰스 엘리엇

김수봉 논설위원(계명대 생태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수봉 교수l기사입력2017-09-06
조경의 오늘을 만드신 분들(2):
옴스테드 조경철학의 계승자 찰스 엘리엇(Charles Eliot)



_김수봉 교수(계명대 생태조경학전공)



조경의 아버지 옴스테드(F. L. Olmsted)는 워낙 여기저기의 글에서 소개가 많았던 유명한 조경가라 생략하고 이번 글에서는 옴스테드의 조경 철학을 계승했던 찰스 엘리엇(Charles Eliot, 1859~1897)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미국은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민주주의의 참된 의미가 논의될 무렵 상류계급의 상징으로 비추어진 유럽식 전통 정원의 특징은 옴스테드에 의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미국의「Landscape Architecture」는 미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발전과 함께 탄생했다. 옴스테드는 통합된 조경이론서를 출판하기도 했으나 그는 조경의 이론가이기 보다는 조경을 현장을 누비는 실천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활약이 그가 조경이론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청년시절 소로우(Thoreau)와 에머슨(Emerson) 등의 자연관으로부터 공원에 관한 철학의 영향을 받고 활약했던 사상가로서의 전력을 미루어 볼 때 이론가로서 그의 능력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는 실천을 통해서 사상을 현실화시켜나가는 조경가의 직능성(職能性) 혹은 전문성(專門性)을 확실히 하려했는데 이는 우리 조경계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다. 옴스테드가 남긴 40개가 넘는 공원계획과 국립공원의 제정, 그리고 자연보호계획 등과 같은 수많은 업적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조경과 대중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이론은 실제로 옴스테드의 사무실에 근무했던 많은 후배 조경가들에게 계승되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 제자들 중의 한명이 찰스 엘리엇이다.

엘리엇(Charles Eliot)은 1859년 11월 1일 메사추세츠州 케임브리지市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96년 하버드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된 엘리엇(Charles W. Eliot)이다. 그는 옴스테드의 조경이론과 조경의 전문성을 확대시켜 민간 및 공공기관에 보급하였는데 이것은 1897년 3월 25일 38세라는 약관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죽은 3년 후인 1900년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하버드대학교(Havard University)에 조경학과가 설립되었다.


찰스 엘리엇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다리에 새겨진 글

조경가로서의 그의 길은 1882년 하버드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의 농업생명 전문기관인 부시 인스티튜트(Bussey Institute)에서 농원예학을 전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재학 중이던 1883년 그는 옴스테드 사무실의 견습생으로 채용되었고, 이 기간 중에 엘리엇은 메인(Maine)주의 쿠싱 아일랜드(Cushing Island,1883), 프랭클린파크(Franklin Park, 1884), 아놀드 수목원(the Arnold Arboretum, 1885), 그리고 보스톤의 펜스(the Fens, 1883) 디트로이트의 벨레 아일 파크(Belle Isle Park, 1884) 등의 작업에 참여하였다. 부시 인스티튜트(Bussey Institute)를 졸업 후 2년간 옴스테드로부터 완벽한 조경이론을 전수받았는데 옴스테드에게서 조경에 대한 가르침과 믿음을 배웠던 엘리엇은 행운아였다. 이 시기를 통하여 엘리엇이 받았던 옴스테드의 인상에 대하여 조경가(Landscape Architect, 1902)라는 그의 글에서 ‘옴스테드는 도시공원에는 항상 자연적인 요소를, 자연풍경지에는 인공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자연과 인공의 대비를 항상 설계의 기준으로 하였다. 특히, 도시공원은 안락한 분위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자연스러운 수목과 녹음으로 둘러싸인 잔디밭, 넓은 전원풍경, 풍부한 하초(下草), 흐르는 물, 그리고 자연석 등이 놓여있는 수림지(樹林地)가 필요하며, 역으로 교외지역에는 잘 다듬어진 식재, 화분에 심은 초목, 그리고 색이 풍부한 식물 등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1855년 옴스테드의 충고를 따라 엘리엇은 유럽을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브라운(Capability Brown), 렙턴(Humphry Repton), 팩스턴(Joseph Paxton), 그리고 헤르만 퓍클러 무스카우 왕자(Prince Hermann von Pückler-Muskau)의 조경작품들도 둘러보았다. 그가 남긴 여행 일기는 19세기 유럽의 조경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평가한 것으로 평가된다. 옴스테드가 조경가로서의 명칭을 확립하였던 1800년대 말까지 조경사는 그저 ‘경관 정원사(Landscape Gardener)’ 로 불렀으며 ‘조경사(Landscape Architect)’라는 명칭은 아직 일반화되어있지 않았다. 조경을 부르는 호칭이야 어찌되었든 엘리엇의 최대 관심사는 조경의 영역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는 1896년에 「애틀랜틱」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은 경관공학, 경관식재 그리고 삼림계획까지를 포함한다. 공원도로를 아름답게 조성하는 일도 조경이 맡아야 하며,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도록 디자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토목 및 식재 전문가는 공동으로 경관 전체의 디자인을 향상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종래의 풍경식정원을 조경의 한 분야로 취급하였으며, 그 기능을 경관식재라고 불렀다.

전통적인 정원수법이 식재계획으로 분류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 19세기후반의 풍경식정원가들이 원예 및 식물 관련학문의 부흥에 많은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경관공학을 조경의 한 분야로 중요시하였던 것은 그가 제안한 공원시스템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엘리엇에 의해 제안된 공원시스템이란 도시의 공원녹지 하나하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각 공원의 체계를 서로 연결시켰을 때 시민들에게 보다 나은 쾌적한 생활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제안으로 보통 공원도로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는 미국 보스턴을 중심으로 보스턴 광역공원계통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엘리엇은 단지계획을 조경의 중요한 한 분야로 보았으며, 건축과 조경의 영역설정에 대하여 그는 건축물과 도로, 근린지역, 그리고 해안지역 등과 그것이 위치하고 있는 부지 및 경관과의 여러 관계를 기능적 혹은 미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건축가가 해야 할 일부의 일이지 전부는 아니며 그것은 조경가의 영역이라고도 주장하였다. 엘리엇에 의하여 계승된 옴스테드의 조경 철학은 19세기를 지나 20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단 19세기까지를 조경의 확립기로 간주한다면 20세기 초 약 25년간은 조경이 전문 직능(職能)으로서 받아들여지고 그 위상이 높아진 발전기로 볼 수 있다. 특히 옴스테드 주니어(Olmsted, Jr.)와 허바드(H. V. Hubbard) 등이 이 발전기에 활약한 조경가들이다.

_ 김수봉 교수  ·  계명대학교 생태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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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kim@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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