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노트] 가을볕 표범나비 벌개미취에 취한다

생물학자 이강운의 ‘24절기 생물 노트’<15> 백로
라펜트l이강운 소장l기사입력2017-09-12
생물학자 이강운의 ‘24절기 생물 노트’<15> 백로

가을볕 표범나비 벌개미취에 취한다
늦여름 습기가 밤새 쌀쌀한 날씨에 이슬로 맺혀 바지 적신다
보자마자 홀딱 반한 각시멧노랑나비의 우아한 날갯짓과 색깔


_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사)한국환경복원기술학회 부회장




초원에 사는 멸종위기종인 왕은점표범나비가 꿀을 빨고 있다.

덥다 덥다 하던 숱한 여름날을 며칠째 내린 비가 밀어냈다. 하지만 ’이대로는 여름이 끝나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올가을은 의외로 순순히 오고 있다. 마지막 따가운 햇볕을 받아 벼가 익기 시작했고 들꽃에 눈을 마주치면 따뜻한 기운을 느낀다. 

뚝 떨어진 밤 기온이 늦여름의 습기를 모아 이슬을 맺히게 하는 절기인 ‘백로’다. 수풀이 무성한 연구소에서 아침 산책을 하면 이슬 맺힌 풀잎에 바지가 척척하게 젖으며 가을을 느낀다. 서늘한 기운으로 착 가라앉아 무더위와 일에 지친 육신과 정신이 순해지고 차분해진다.


수련원의 연꽃

연잎 사이로 쏙 올라온 꽃대와 뒤늦게 핀 수천 송이의 연꽃으로 눈이 부시다. 벌써 한 달째 매일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꽃을 밀어 올린다. 꽃 보는 즐거움도 좋지만 벼 익는 소리가 정겨운 논도 보기 좋다. 올 초봄에 조성한 ‘수련원’과 ‘논’이 가뭄과 장마에 잘 견디고 꽃을 선사하고 열매를 맺고 있다. 

낮이 짧아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곤충은 주황색 바탕에 검은 무늬의 날개를 가지고 있어 표범 무늬와 똑 닮아 그 이름을 얻은 표범나비 종류다. 6월경에 어른벌레로 잠시 나왔다가 가장 뜨거운 7월 즈음부터 여름잠(하면 夏眠)을 자다가 한껏 달궈진 숲이 식는 9월쯤 서늘한 바람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활동 시기를 살짝 바꿈으로써 먹이 경쟁과 천적을 피하는 현명한 행동으로 표범나비류는 마땅히 ‘가을 나비’로 불려도 좋다. 그중에서도 왕은점표범나비는 크기도 하고 날갯짓이 힘차 금방 눈에 띈다. 마음 놓고 살 만한 곳이 몇 안 되는 멸종위기 곤충이다. 짝을 만나 알을 낳고 이 알이 부화해 애벌레로 겨울을 날 것이다.


은줄표범나비

바람과 햇빛이 만들어 낸 쪽빛과 연한 노란색이 묘하게 섞인 각시멧노랑나비가 벌개미취 꽃을 열심히 빨고 있다. 느릿느릿 나는 우아한 날갯짓과 오묘한 색 그리고 날개 끝 구부러진 예쁜 곡선은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각시멧노랑나비는 보자마자 홀딱 반한 나비로 결국 나를 곤충에 딱 꽂히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붉은빛 노란색과 흰색, 검은색 비늘 가루로 치장한 아름답고 정교한 무늬의 작은멋쟁이나비와 화려하진 않지만 검은색 바탕에 밝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푸른색 줄무늬가 선명한 청띠신선나비의 날갯짓이 힘차다. 지금까지 어디에 은둔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비로 엄동설한 겨울을 버티고 다음 해 봄에 짝짓기하고 번식을 할 것이다.


각시멧노랑나비


작은멋쟁이나비

월동(Hibernation)이나 하면(Aestivation)과 같은 휴면이나 짝짓기를 통한 번식을 극대화하는 생물의 행동학적 특성을 이해하는 학문을 계절생물학(Phenology)이라 한다. 낮의 길이나 기온 더 크게는 기후 같은 요인을 계절과 연계시키는 학문으로, 활동을 중단하는 휴면과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시간을 골라 휴면을 마치고 짝짓기, 산란과 같은 번식 행동을 한다. 다 때에 맞춰 생활사가 이루어지는 곤충의 계절생물학은 절기만큼 정확해 계절적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이 가을이다.


누리장나무

숲길을 지나다 보면 은은하고 향긋한 향기에 오감이 저절로 열려 잠시 발길을 멈춘다. 붉은빛이 도는 흰색 꽃이 은은하면서도 아름다운 누리장나무가 주인공이다. 누리장나무는 잎이나 가지의 냄새가 구려 고약한 냄새가 나지만 꽃과 꽃향기는 은은하면서 고급스러운 반전의 매력을 보여준다. 부드러운 잎을 노리는 애벌레를 쫓기 위해 비릿한 누린내를 만들어 내지만 큰쥐박각시애벌레는 오직 이 맛만 찾는다. 극히 제한된 애벌레만이 누리장나무 잎을 먹는 것을 보면 누린내는 애벌레 쫓기에 효과적이긴 한 것 같다. 푸른 남색이 빛나는 산제비나비가 누리장나무 꽃에 춤추듯 멈춰있는 멋진 모습에 심취하고, 꽃향기를 들이마시며 가을을 느낀다. 


칡꽃

보랏빛이었다가 붉어진다.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히려 모든 식물을 덮는 질기고 모진 생명력 때문에 사람들이 귀찮아하는 식물이지만 칡꽃의 진한 향기는 코를 뻥 뚫리게 한다. 향기도 좋거니와 맛도 일품이라 콩박각시, 갈고리재주나방, 구름무늬밤나방, 푸른집명나방 등 많은 애벌레가 즐겨 먹는다. 소똥구리를 위해 키우는 암소 ‘코프리스’ 나 ‘업쇠’가 방목장 초지의 풀보다 더 좋아하는 최고의 간식이기도 하다. 한가로이 풀을 뜯던 소들도 멀리서 칡을 흔들어 보이면 쏜살같이 달려온다.


칡 잎을 먹는 콩박각시 애벌레


칡 잎을 먹는 갈고리재주나방 애벌레

뭐니 뭐니 해도 가을의 전령사는 메뚜기 종류다. 풀빛과 닮은 연두색 몸통과 날개, 잘 뻗은 다리,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긴 더듬이까지 맵시 있는 벌레다. 산새의 지저귐만큼 높낮이 변화가 크진 않지만, 날개를 비벼 내는 듣기 좋은 선율은 가을을 낭만적으로 만든다. 메뚜기의 전성기인 가을, 연구소 주변에는 발 디디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전자레인지 안에서 팝콘이 튀는 것처럼 수많은 메뚜기가 튀어 정신이 없을 정도다. 

추억의 간식거리였던 벼메뚜기가 농작물의 ‘해충’으로 낙인찍혀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이제는 환경친화적인 농법을 대변해주는 대표주자가 되었으니 격세지감이 있다. 누런 들판에 메뚜기 잡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 보기 좋지 않은가! 


매부리

긴꼬리

2016년 ‘함평 자연 생태 공원 서식 곤충 모니터링 및 생태적 관리 방안 수립 연구’ 수행 중 8월 8일 이상한 여치를 채집했다. 국내 기록이 없어 보고서에 ‘함평여치’ (Palaeoagraecia lutea)로 이름을 붙였던 미기록종이 2017년 8월 국립생물자원관 김태우 박사의 확인 채집과 소리에 의한 추가 동정을 통해 국내 ‘미기록 속 및 미기록 종’으로 보고하는 논문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9월 말이면 발표될 예정으로 여치보다는 쌕새기나 매부리 무리에 가깝다는 김 박사의 의견에 따라 ‘함평매부리’로 명명될 것이다. 

관심 없는 사람들에겐 쓸데없는 하나의 벌레에 지나지 않지만 새로운 종을 발견하고 이들의 이름을 붙이는 곤충 분류학은 생물 다양성을 밝혀내는 가장 흥미 있는 과학 분야 중 하나다. 아직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자연 속 생명을 찾아내 우리 이웃으로 올려주고 생물자원을 보호할 기회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다. 또한 국가적으로도 생물 다양성을 활용한 경제적 가치를 한껏 올릴 수 있으므로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함평매부리 옆모습


함평매부리 앞모습


함평생태공원의 함평매부리. 김태우 국립생물자원관 박사

연구소 본부 앞에 계곡 물을 끌어들여 조성한 그림 같은 연못 ‘워터 월드’가 있다. 수서 곤충부터 물고기까지 완벽한 생태계를 유지하던 워터월드에 1999년 보일러실 기름통에서 기름이 유출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새어 나온 기름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결국에는 연못으로 유입되었다. 연못 기름을 없애기 위해 빨랫비누를 물에 띄워 기름을 빨아들이고 오일펜스로 기름띠 제거하고. 사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최후로 연못의 반을 메웠다. 면적을 줄이고 연못물을 완전히 빼고 1년 정도 지나자 기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20년이 지난 최근에도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스며있던 기름이 천천히 새어 나와 기름띠를 형성한다. 

요즘 살충제 달걀 파동으로 온 나라가 들썩인다. 환경친화적인 축산을 하겠다고 과수원 부지에 놓아 키운 닭이 낳은 달걀에서 디디티 성분이 검출된 생태적 재앙을 목격하고 있다. 과수나무에 뿌렸던 디디티가 초지와 토양에 흡수되었고, 오염된 풀을 먹은 닭이 농축된 디디티를 다시 흡수하는 과정이 진행됐다. 먹이사슬을 타고 올라가 다시 달걀로 내려온 것이다. 1962년 레이철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예견했던 불길한 경고가 고스란히 맞아들어가고 있다. 20년이 지나도 땅에 스며있던 기름이 연못 생태계를 망치고 40년이 흘러도 디디티는 남았으니 어찌 지금을 함부로 할 수 있는가? 묻는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강력하고 유독한 화학 물질의 잠재적 해악이나 황산화물, 질소산화물 등의 유해성분이 대부분인 희뿌연 하늘의 미세먼지 통제는 국민 먹거리와 건강을 지키는 첫 순위의 국정 과제다. 사드를 먼저 배치하고 환경영향평가는 철저히 하겠다는 환경적 궤변으로는 지켜낼 수 없다. 

무엇이든 잘하는 문재인 정부가 유독 환경 분야만 서툴다. 단숨에 해결되어 하루아침에 뭐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환경적으로 안전하고 경제적으로도 계산이 되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생태계 스스로가 자정하도록 4대강을 원상 복구하고 화석 연료 사용을 줄여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공기를 만들고, 원전 완전 폐쇄로 미래의 잠재적 대재앙을 막고 케이블카 원천 불허로 온전한 생태계를 최소한 유지하는 것. 턱없는 기대가 아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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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한겨레의 동의를 얻어 발췌한 기사이며, 이강운 소장의 주요 약력은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 한국환경복원기술학회 부회장 / 한국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 / 국립안동대학교 식물의학과 겸임교수 / 저서로는 <한국의 나방 애벌레 도감(Caterpillars of Moths in Korea)>(2015.11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캐터필러>(2016.11 도서출판 홀로세)가 있다.
이메일 : holoce@hecri.re.kr       
블로그 : http://m.blog.naver.com/holoce58
글·사진 _ 이강운 소장  ·  (사)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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