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학범 한경대학교 교수

″우공이산의 자세로 우직하고 끈기 있는 삶의 길을 개척하길…″
라펜트l신혜정 기자l기사입력2017-09-29
김학범 한경대학교 교수의 퇴임식이 지난 7일 열렸다. 어느덧 조경 외길을 걸어온 지 4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김 교수는 원예학과를 시작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 진학하면서 조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시작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한국종합조경에 입사하면서 부터이다. 최연소 조경기술사 취득에 이어 일찍이 임원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 그는 고려대학교 박사과정을 거쳐 지금의 교직을 맡게 됐다.

김 교수는 한경대학교 조경학과를 개설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는가 하면, 후학양성에 열의를 발휘해 20여 년간 한경대학교를 어느 대학보다도 빠른 성장으로 일궈낸다. 특히 김 교수는 문화재 조경과 명승에 큰 업적들을 남겼다. 2003년 7개에 불가하던 명승을 10여 년의 노력으로 110개소로 급격히 증가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 결실로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하는 영광을 맞기도 했다. 현재 「조경기본법」의 뼈대가 되는 「조경법」신설을 공언하기도 했다. 제2의 서막을 준비하고 있는 김학범 교수를 만나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김학범 한경대학교 조경학과 명예교수


오랜 세월의 교직생활을 마치시고 퇴임했다. 기분이 어떠신지?

조경분야에 종사한 지 40년 정도가 지나왔다. 큰 문제없이 무난히 지나왔다는 안도감이 있고, 시원섭섭한 기분이 든다. 정년퇴임까지 건강도 허락됐고, 사람들과의 인연과 모든 것들이 잘 이루어졌다. 늦깎이로 천주교 신자가 됐는데 이게 다 하느님의 은총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1995년 안성산업대학교(현 한경대학교)에 부임한 이래 조경설계 및 조경사 분야의 교육과 연구 활동을 해오셨다. 처음 교수의 꿈을 품게 되신 계기는?

개인적으로 자연과학자로서의 성향보다는 인문학자의 성향을 갖고 있다. 안성향교의 전교(典校)를 지낸 유학자의 막내로 태어나 그런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고등학교와 초급대학 과정이 합쳐진 5년제 과정을 졸업하고, 선택의 여지없이 전공에 맞춰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로 편입학을 하게 됐다. 원예에 관심이 없던 터라 한 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해 3년간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학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조경학과가 신설되어 있었고, 조경 관련 강좌를 듣다보니 굉장히 관심이 생겼다. 특히 경관과 관련된 인문학적 내용들에 사로잡혔다. 역사, 지리 등을 특별히 좋아해서 경관과 관련된 조경학의 인문학적 내용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 입학했다.

교수에 대한 생각을 처음부터 가진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한 제약회사에 취업했다. 그해에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시험이 12월 초에 치러졌는데, 무작정 응시한 시험에 합격했다. 회사의 배려로 학업과 병행하면서 밤낮으로 시간을 아껴가며 주경야독의 바쁜 생활이 이어졌다. 잘 다니던 좋은 회사를 그만두고 학위 논문을 제출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긴 준비기간 끝에 한국종합조경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조경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회사에 입사한 후에도 아침 일찍 6시 이전에 집을 나와 공부를 하는 습관은 변치 않았다. 문화재수리조경기술자, 조경기술사 등을 모두 단번에 합격하고, 특히 조경기술사는 84년도에 최연소로 취득했다. 그러고 나서 88년까지 조경설계팀의 부장을 맡게 됐다. 조경 기술사를 취득하고 2년이 지난 후에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일찍 회사 임원이 되다 보니 무엇인가 더욱 불안한 느낌이 항상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그때 마침 천안에 있는 연암대학교 교수로 가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대학에서 4년을 봉직한 후 95년도에 한경대학교 조경학과가 만들어지고 드디어 내 직장의 종착역이 된 현재의 자리로 안착하게 됐다. 


지난 날들을 회고해본다면?

내 인생에서 아주 열심히 한 분야가 조경 분야와 문화재 분야이다. 조경 분야는 건축, 토목, 건설 관련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입장이다. 그래서 아주 맹렬하지 않으면 우리 자리를 확보할 수 없는 분야였는데, 내 인생도 이와 비슷했다. 크고 작은 일들과 수없이 부딪치며 마치 전투하듯 적극적으로 헤쳐 온 나날이었다. 조금만 가능성이 보이면 마구 밀어붙였다.

한경대학교에 조경학과가 만들어졌을 때도 그랬다. 대학 구성원도 아닌 상태에서 무작정 교육부에 찾아가 담당자에게 조경학과를 만들어달라고 생떼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당연히 대학교 내에서 공식적으로 진행된 절차에 의해 조경학과가 설립된 것이지만, 당시 총장으로 계셨던 한기영 총장님은 내가 얼마나 큰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인가를 시험하고 있었다. 

95년도에 전국 4년제 대학 중 25번째로 한경대학교에 조경학과가 인가됐다. 당연히 25등 꼴찌로 시작하는 학과였다. 교수로 부임하고 나서 학과의 발전에 큰 기대를 갖고 10년 안에는 10등 안에 들게 하겠다는 열정으로 온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당시 교육법 상 산업대학이었던 한경대학교는 산업체와 협약을 통해 운영할 수 있는 ‘산업체 위탁교육’ 제도가 있었다. 적극적으로 계약학과를 만들어 기존의 조경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인력을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초기 한 해에는 주간, 야간, 위탁교육과정까지 한 학년에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수업을 들었다. 서울시와 경기도 등 조경 담당 공무원을 대상으로 별도의 과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제 20주년을 넘어 성년의 나이에 접어든 한경대학교 조경학과는 국내 다른 어느 대학의 조경학과보다도 빠른 성장을 해가고 있다. 

2000년대 후반에는 한국조경학회 회장이라는 큰일을 맡게 되었다. 회장에 취임하면서 조경 분야의 독립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조경법」신설을 공언했고, 환경조경발전재단 이사장을 겸하면서 조경 분야의 발전을 위한 기금을 확충하기도 했다. 후대 회장들의 노력을 거쳐 현재 「조경기본법」이란 법률로 제정되었다. 

일을 시작하면 거기에 몰두하거나 아주 적극적인 성격 탓에 중간 중간 조금 어려운 일도 생기기는 했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다시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전투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마이너 그룹 조경 분야에 속해 있는, 마이너리그의 선수일 뿐이니까. 


조경분야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셨습니다. 한국조경분야가 현재 안고 있는 문제점과 해결책이 있다면?

조경분야는 다른 분야와 달리 사회 수요에 의해 스스로 자생적으로 학과가 생기거나 협회, 단체가 생기지 않았다. 조경 분야는 정부의 필요에 의해 관제로 만들어졌다. 국토개발을 지휘했던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관련 면허와 제도가 만들어졌고, 국가나 공공기관에서 수행하는 분야로 육성됐다. 지금까지 SOC 사업이 워낙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정부나 공공기관 주도의 일거리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게 됐다. 

조경분야는 근본적인 부분부터 환골탈태되어야 한다. 우선, 도시재생과 같은 정부 투자에 의한 공공의 조경부분은 잘 육성되어야 하지만, 또 일반적으로는 관 주도형 시스템에서 탈피해 민간부분에서 자생할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가드닝을 아주 잘 하는 집단이나 회사가 만들어진다던지 조경분야의 생태를 중심으로 특별한 기술을 가진다던가 하는 차별화된 형태로 업종과 인력이 양성되어야 한다. 현재 단계에서는 정부에서 발주하는 공사를 따서 운영하거나 도급을 주고받는 식의 조경은 이제 끝나지 않았나싶다. 우리 조경분야는 관 주도형에서 빨리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전문형의 업종으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김학범 한경대학교 조경학과 명예교수

문화재와 관련된 조경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화재 조경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한국종합조경을 다닐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고정원 100개를 선정해서 외국에 알리는 책자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전국 전통마을을 다니면서 마을숲을 보게 됐는데, 그 안의 장승, 돌탑 등 조경적인 요소들에 재미를 느꼈다. 이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고 싶어 역사서, 향토지, 문헌, 고지도를 찾아보기도 했다. 조경학과 학과장을 마무리할 즈음 문화재 분야와 인연이 생겼다. 80년대 중반 우연히 시작한 전통 마을숲에 대한 연구를 10년간 지속하여 각고의 결실을 맺어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해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열화당이란 출판사에서 ‘마을숲’이란 제목으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이 책을 보고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해왔다. 문화재청에서는 마을숲 전문가가 없어서 마을숲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싶어도 지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여러 해 마을숲 문화재 자원조사를 진행하여 다수의 마을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명승에 관한 연구는 2003년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터이다. 2003년까지는 우리 국토 전체에 단 7개의 명승만이 지정된 상황이었다. 이웃 나라 일본은 360개소, 북한도 320개소 명승을 보유하고 있었다. 새롭게 법규를 개정해 역사문화 명승과 자연명승 두 가지 카테고리로 정리하고, 역사문화 명승 쪽에는 고정원 옛길을 비롯해서 조경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 확대했다. 일본의 경우, 360개소의 명승 중 200개소 이상이 고정원이다. 옛 정원을 명승의 주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10여 년의 노력으로 현재 국가지정명승이 110개소로 급격히 증가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 결실의 열매는 다시 내게도 돌아와 국가로부터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하는 영광을 맞기도 했다. 


최근 정원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뜨거운데, 전통정원의 계승발전 또는 한국정원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교수님의 고견을 듣고 싶다.

한국정원은 옛날 것을 그대로 똑같이 만들 필요는 없다. 다만 거기에 들어 있는 정신이나 모티브 같은 것을 찾아 새롭게 해석해서 쓰되, 의미나 상징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약에 한국정원을 만들었는데 분수를 집어 넣는 다던지 일본이나 중국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면 큰 오류를 범한 것이다. 한국적인 특성을 한국성이라고 하는데, 한국성을 살리는 범위 내에서 새롭게 창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디자인하는 사람은 한국성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갖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갖고 있는 재능을 살려 사회에 봉사를 하거나 기여하면서 살고 싶다. 인생 후반기에는 대부분 마을숲과 명승 분야를 주로 연구했는데, 특히 명승에 관한 글을 많이 쓰면서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책으로 내기도 했다.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을 발간한 다음에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위탁한 프로그램에 초청돼 ‘한국의 고정원’이란 강의를 5강에 걸쳐 한 적이 있다. 공무원,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원연수나 큰 회사에서 교양강좌로 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정규 학교 학생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할 생각이다.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명승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한다면 기꺼이 나서고 싶다. 업계나 학계에서 자문을 해달라고 하던지 특별히 특강을 요청한다면 열심히 할 생각이 있다. 


조경인 및 조경학도들에게 한 마디.

어느 날 동료 교수로부터 10년간 조경설계 회사에 잘 다니고 있던 젊은이가 이직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경 분야를 아주 떠나 다른 일로 전업해 볼까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 조경 회사를 운영하는 분들을 만나면 건설시장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회사 경영의 어려움을 말한다. 근래에 갑자기 밀어닥친 건설 경기 불황의 여파가 이러한 상황을 가져 온 것이다. 그러나 답답하고 다소 미련하지만 좀 더 끈기를 가지고 버티는 방안을 선택하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유명한 고사가 있다. 중국 기주의 남쪽에 태행산과 왕옥산이 있는데 그 산 아래 90세가 된 우공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이 두 산이 그의 집을 가로막아 큰 불편을 주는 장애물이었다. 우공은 90세의 나이로 이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우공은 자기가 죽으면 아들이, 그 다음에 손자가, 또 그 손자의 아들이 자자손손 일을 계속한다면 이 산을 평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웬만하면 우공이산의 자세로 우직하고 끈기 있는 삶의 길을 계속 개척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험한 산을 넘으면 반드시 평평한 들이 나오는 게 세상 이치인 것처럼, 지금의 건설 경기 침체 국면도 얼마 후에는 반드시 나아질 것이다. 묵묵히 노력하는 우공의 자세로 일관한다면 어떠한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젊은 조경인들이 조금 더 강한 의지로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조경 분야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이 될 때가지 간다는 ‘마부작침(마부작침)’처럼. 

대학에 학생들이 입학하면 새내기들에게 두 가지를 강조한다. 그 하나는 전공과 관련이 없더라도 문사철을 비롯해 소설까지 가능한 많은 책을 읽으라고 강권한다. 또 하나는 여행을 많이 하라고 주문한다. 그중에서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은 여행이다. 그것도 가능하다면 해외여행을 꼭 한번 해보라고 하고, 반드시 배낭여행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단다. 학창시절의 배움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지식은 강좌를 통해, 책을 통해, 교수와 선배를 통해 충분하게 완성할 수 있다. 지식을 얻는 것 외에 또 다른 하나는 지혜에 대한 배움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식은 당연히 매우 중요한 바탕이 된다. 지혜는 지식과 달리 대부분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험의 산물이다. 지혜를 얻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자신을 조건 없이 도와주지 않는 위치에서 스스로 크고 작은 어려움을 집약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여행이기 때문이다. 젊은 조경학도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책이 있다. 한비야의 단행본 중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그건 사랑이었네’라는 책이다. 인생의 길을 찾는 젊은이에게 여행은 한비야의 여행처럼 반드시 지도 밖의 여행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사진 _ 신혜정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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