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 Z軸 斷想

강주형 (주)생각나무파트너스건축사사무소 대표
라펜트l강주형l기사입력2017-11-16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Series No.30



Z軸 斷想




강주형 (주)생각나무파트너스건축사사무소 대표



잠시 다시 여름인 듯한 10월말의 어느 날 오후, 회의실에 앉아서 건축주와의 미팅을 기다리고 있다. 북한강과 맞닿은 경사지에 여러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테라스하우스 타입의 집합주거를 건축하는 프로젝트이다. 의뢰인은 강, 하늘, 구름, 햇살, 바람 등을 모든 세대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계획안을 기대한다. 역시 자연요소와 풍광의 가치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다.

요즘은 건축설계 의뢰인들이 이미 여러 도서 및 자료를 둘러보고 수집하여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주로 인터넷이나 책에서 얻은 외국의 주택 사례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도 못지 않은 분위기의 주택과 건축물이 많은데도 굳이 그런 이미지 속의 실내공간들이 분명 남다른 느낌을 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고급 마감재료? 디테일의 품질? 그런 차이도 있겠지만 잘 살펴보면 공간 내에서 늘 꽃이 함께 하고 조경과의 교감이 한결같음을 알 수 있다. (필자도 설계안이 건축물로 완공될 때면 각 공간의 컨셉에 맞춰 꽃을 조화롭게 배치하고자 늘 훌륭한 플로리스트와의 협업을 원한다. 아예 제인 패커나 맥퀸즈 같은 과정을 직접 다녀오고 싶은 마음도 있다.) 건축과 조경이 서로 반응하는 건 지금도 어려운 일이라고들 한다. 녹색건축인증제도에서 평가점수를 획득하기 위한 실내정원이나 비오톱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좋겠다. 침실과 식당의 꽃, 거실과 테라스의 풀, 마당과 정원의 나무가 주는 삶의 차이도 충분히 소중하지 않겠는가. 

‘테라스(terrace)’는 아래층의 돌출부 상부, 즉 건축물의 일부분을 지칭하는 것으로 쓰이지만,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 원래의 기원은 녹지이자 정원이었다고 한다. 즉, 자연-건축-사람으로 연결되는 삶의 양식이자 문화였다는 뜻이다.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흔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왕비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애틋한 러브스토리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바빌론 중심부에 30층(추정) 높이로 건설된 바벨탑의 꼭대기에는 그들이 섬기는 신 중의 왕을 모셨지만, 7개의 층과 단으로 구성된 공중정원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수많은 어려움이 있음에도 굳이 들어올려진(영어로는 하늘에 매달린) 테라스를 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건축구조적 보강, 방수와 방근, 급수와 배수, 수목이식 및 운송기술 등 현재도 감탄할 기술이 필수적인데도 말이다. 왕에게는 왕비를 위하는 사랑이면 충분했겠지만 수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이 필수적인 그것이 당시엔 최고의 이상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천국과 극락 등 사후세계를 엘리시온이라고 불렀다(반대어는 하데스.) 앗시리아인들의 관념에서도 엘리시온은 마천루나 기념비적인 구조물이 가득한 모던 도시가 아니라 자연이 함께하는 무릉도원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갈구하는 파라다이스가 화려한 고층빌딩 대신 물, 풀, 꽃, 나무, 향기라는 점과 다르지 않다. 이상향에의 간절함과 절대권력은 기술적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하게 만들었고,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남다른 높이값으로 차원이 다른 신성함을 담았던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X(가로), Y(세로), Z(높이), T(시간)라는 네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타임머신이 실현되기 전까지 T축은 인간의 능력 밖이고, X와 Y축은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면서도 그 자체로 한계이다. 하늘의 신과 땅의 인간 사이에 존재하고픈 권력자들의 욕망과 권위를 표출하기에 Z축의 높이값은 가장 매력적이고 독보적인 대상이 아니었을까.

오늘날의 도시건축에서도 Z축 조경과의 연애담은 계속 된다. 20년 전 건축가 노만 포스터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63층짜리 코메르츠방크(CommerzBank) 사옥에서 고대인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의 높이로 들어올려진 공중정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비록 바벨탑보다 두 배나 높았지만 그 테라스는 신에 대한 더 높은 경외나 천국에 대한 더 깊은 동경이 아니다. 환기, 냉각, 에너지절약 등의 키워드로 축약되는 건축물의 기능 향상과 거주자의 심리적 쾌적함을 통한 업무생산성 향상이라는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 자본투입의 결과물이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보스코 베르티칼레(Bosco Verticale) 빌딩으로 주목 받은 건축가 스테파노 보에리는 최근 중국 류저우시 인근에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포레스트 시티(Forest City) 프로젝트로 그의 야심찬 도전을 확대한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전체가 거대한 숲으로 보일 정도로 건축물 외부에 테라스정원을 켜켜이 쌓은 것이다. 이 수직숲 도시는 심각해지는 공해와 오염에 대항하여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며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등 친환경 기치가 높지만, 그 역시 이미 발생한 생존의 문제에 대응하는 기능적 해결방안으로만 강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21세기에 들어 수직조경 기법의 발달과 버티칼가든의 유행으로 우리 주변에서도 낯설지는 않지만, 친환경이라는 시대의 화두가 너무 강해서 기술과 함께해야 할 가치를 돌아보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수많은 건물들의 옥상조경, 벽면녹화 등은 인공적 생태율의 수치로만 평가되고, 건립 당시 세계 최대의 면적이라고 관심을 끌었던 서울시청사의 실내 수직정원조차도 기네스의 기록으로만 기억되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2600년 전의 고대세계에서도 이미 그러했는데 첨단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미래에는 어떤 모습이 될까. 사람들의 상상을 시각적 이야기로 공유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인 영화가 발명된 이후로,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미래의 모습을 그리는 공상과학분야(SF)에서 찾을 수 있다. SF장르가 다루는 주제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물음에서부터 외계생명체, 인공지능과 로봇, 우주제국과 수퍼히어로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가까운 미래의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상상을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눈에 띄는데, 예외 없이 수직적 공간 구분과 쾌적한 환경의 정도가 사회계층의 차이를 표현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이다.

최초의 장편 SF영화라 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스>(프리츠 랑 감독, 1927년)에서는 종교, 사랑, 복제인간이라는 소재의 교반도 흥미롭지만, 지상(고층)과 지하세계로 나누어진 배경과 등장인물의 배치가 근대산업사회의 이면에 대한 솔직한 성찰뿐만 아니라 9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영향력이 여전히 유효한 메타포어라는 점에서 진정 위대하다. 

비운의 천재작가 필립 K. 딕의 원작이 바탕인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감독, 1982년)에서도 400층이 넘는 빌딩들이 가득한 2019년의 LA를 배경으로 복제인간들의 ‘추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간은 무엇으로 규정되는가라는 묵직한 주제에 걸맞게 무겁고 어두운 도시 이미지가 함께 한다. 돈이 없어 지구를 떠나지 못하는 빈민들이 사는 낮은 지상레벨은 늘 어둡고 비가 내린다. 휴머노이드의 창조자 인간은 고대세계의 지구라트(수메르인들이 지상세계의 수호신을 모시던 곳)를 본뜬 초거대 고층도시 꼭대기에 사는데 실내는 로마신전의 건축양식으로 가득하다. 지상의 뒷골목에서 쫓기던 ‘제품’들은 그가 사는 최상층을 찾아가 ‘인간’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거부당하고, 자신에게 입력된 4년짜리 운명을 받아들이며 겨우 6층짜리 건물 옥상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최후를 맞이한다. (자신이 인간인 줄 알았던 주인공 해리슨 포드는 97층에 살았다.) 이처럼 공간적 배경의 높이값에 주제를 함축하는 방식은 흔히 볼 수 있다. B급 액션영화인 <데몰리션맨>(마르코 브람빌라 감독, 1993년)에서도 2032년의 LA에는 추방당한 자들이 지하 레벨의 더러운 터널과 하수구에 사는 것으로 그려졌으며, <제5원소>(뤽 베송 감독, 1997년)에서 2215년 뉴욕의 유토피아적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작, 1726년)에는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왕국’이 나온다. 여기서 영감을 받은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1986년)에 등장하는 ‘세상을 지배했던 종족의 도시’도 이후 많은 작품들에 모티브가 되었다. <총몽>(키시로 유키토 작, 1990년)의 공중도시 자렘이 있으며 <아스트로보이>(데이빗 보워스 감독, 2010년)의 공중도시 메트로시티도 있다. <엘리시움>(닐 블룸캠프 감독, 2013년)에서는 아예 오염된 지구 밖 우주에 띄워 올린 도시 엘리시움의 선민들이 지상의 하데스에 사는 열등 인류를 감시하고 지배한다. 미래 도시가 반드시 상업영화 몇 편에 묘사된 모습으로 되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직형 설국열차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모두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은 명백하다.

유엔 경제사회국(UNDESA)의 <2017 세계 인구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현재 전세계 인구는 75억명이 넘고, 2055년에는 100억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연작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를 통해, 수렵채집인에서 지구 행성의 지배자로 떠오른 (거대육상동물의 85%가 멸종되는 과정을 거쳐)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종이 지구 단위의 자연생태계 조작을 넘어 이제는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고 썼다. 즉, 모든 인간에게 유일한 불변의 공통 사항이었던 ‘죽음’을 죽임으로써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불멸의 존재인 ‘호모데우스’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구 증가와 도시화/사막화로 공간 사유화의 욕망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삶의 유한성 극복이 공간의 수직적 확장에 투사되면 불평등의 심화는 Z축의 높이값에 녹아들 것이다. 이 지점에서 건축가와 조경가가 함께 할 선도의 역할이 시작된다. 오히려 평등, 공평, 소통, 공유의 가치가 더욱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에게는 그런 가치를 다룰 수 있는 개념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개념을 담을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을까?

언어를 학문으로 다루는 사람들 관점에 따르면 표현의 종류가 다양하고 많을수록 그 분야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언어에 비해 친척과 촌수에 관련된 용어가 상당히 발달한 것은 우리가 오래 전부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및 그 속에서의 내 위치를 비중 높게 다뤄왔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해야 생존할 수 있는 고위도 추운 지방 민족일수록 미래시제에 대한 분화가 매우 발달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더 확장해서 생각하면 어휘의 존재 유무와 다채로움이 그 대상에 대한 인식 및 이해의 깊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이 예전부터 붉고 푸른 색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하게 인식해왔지만, 초록에 대한 개념은 외부에서 수입되었기에 한자어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제, 오늘은 순우리말인데 내일은 한자어이다 보니 오래 전부터 과거를 더 중시했다는 주장도 있다. 학술적 진위를 떠나 나름 의미 있는 통찰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과 실재 사이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이론이 ‘해석학적 순환’인데, 개념(용어)이 성립되면 그에 따른 존재가 생기고 다시 그 개념을 강화하는 순환구조를 설명한다. 따라서 높다/낮다/길다/짧다/넓다/좁다 외에도 공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풍부한 어휘의 필요성은 늘 새롭다 할 것이고, 미래 흐름을 선도하는 디자이너라면 어떤 언어로라도 개념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학적 기술과 인문적 철학이 교차하지 않는 공허한 건축/도시/조경을 원하지 않는다. 한때는 ‘극락’이었고 ‘기능’이었던, 그리고 이제는 도태와 진화의 갈림길에서 ‘차별’이 되려고 하는 내러티브는 필요치 않다. 미래의 Z축 도시조경은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조금 더 맑은 가치의 내러티브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데이터 중심’이 아닌 ‘스토리 중심’의 디자인을 기대하는 이유이고, 미래의 기술과 요구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념의 변화를 이끌어 줄 디자이너가 필요한 까닭이다.

약속된 회의를 위해 건축주가 도착했다는 전언이 왔다. 오늘의 이 뜬금없고 산만한 잡설을 어찌 마무리할지 점차 난감해지는 순간에 마치 의도한 듯 참으로 절묘하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나타나셨다. 이제 다시 북한강변의 그 테라스에는 어떤 이야기를 펼쳐나갈지 설렘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라펜트는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과 함께 조경의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를 매달 1회씩 게재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현재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향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조경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논의의 장으로서 조경인 모두의 관심과 함께 연재가 이어가기를 기대해봅니다.

 

*12월 필자는 정욱주 서울대학교 교수입니다.


_ 강주형  ·  (주)생각나무파트너스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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