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선생(先生)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18-06-03
선생(先生)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어릴 적 선생의 한자어 뜻을 알고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먼저 태어난 사람” 남들보다 학식이나 인품이 뛰어나 모범이 되는 사람도 아니고 누군가를 가르쳐 바른길로 이끄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보니 먼저 태어난 사람이 선생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선생이 되는 것을 진지한 목표로 삼은 적이 없다. 과외선생을 여러 번 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미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을 때도 나쁘지 않은 부업 정도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막연히 교수가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굳이 설계가의 삶보다 열망하거나 우위에 두지는 않았다. 그래서 막상 선생이 될 기회가 왔을 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내 삶에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조경가로서의 노력과 확신이었지 선생이라는 자리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남들로부터 이래라 저래라 조언을 듣는 것도 싫었고, 조언을 해주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다. 선입견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조언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서 몇 가지 전형적인 특징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들은 조언을 해줌으로써 조언을 듣는 이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여긴다. 둘, 그들은 대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한다. 셋, 그래서 그들의 조언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파악하는 데는 유용할지도 모르나 정작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조언을 하려는 이들을 경멸했고, 같은 이유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조언을 구해도 대개는 무시했다. 다행히도 나의 부모는 늘 잔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선생들과 친구들의 조언은 그냥 한귀로 듣고 흘려버리면 되었다. 가끔 특이하다거나 싸가지가 없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인간관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선생이 되어보니 선생이란 끊임없이 남에게 조언을 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나는 처음 학교로 와서 1학년 설계스튜디오를 맡았다. 나도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학생들이 낯설었고, 학생들도 대학교에서 처음 경험하는 설계 수업을 가르치는 내가 낯설었다. 시행착오를 거쳤다. 학생들을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하는 팀원처럼 대하여 보기도 했다. 지식과 경험을 전달해주면 알아서 이를 소화해야할 강의 수강생으로 여겨보기도 했다. 학생들 개개인을 내가 발전시키고 성공시켜야할 프로젝트로서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나의 학생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놀라운 발전을 보이며 감탄하게 만드는 학생들과 도대체 왜 이 수업을 듣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의지도, 성취도 미약한 학생들. 그러려니 했다. 이제 성인이었고 알아서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그들의 인생에 비집고 들어가 설계의 가치가 중요하다느니 열심히 하다가보면 재미가 생긴다니, 먹히지도 않을 조언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나 나는 이 두 그룹의 학생들 사이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우수하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고 어쩌면 내가 포기했던 학생들은 나와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나와 어떠한 식으로든 연결고리가 존재해서 나를 잘 이해했던 학생들은 나를 잘 따라올 수 있었고 나와 많이 달라 교감하는데 실패한 학생들은 나를 싫어하고 무서워했던 것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 역시 철저히 나의 입장에서만 타인을 판단하고 행동했으며 그들의 입장에 서려고 시도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내 주변의 선생들을 보며 그들과 나는 다른척했지만 사실은 나도 똑같은 꼰대였다. 그들이 아집에 차고 위선적인 뜨거운 꼰대였다면 나는 무책임하고 냉소적인 차가운 꼰대였을 뿐이었다. 

나의 입장에서 벗어나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단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선생이라고 해서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나는 그들을 타인으로 보지 않기로 했다. 학생 한명, 한명을 스무 살의 나로 보기로 했다. 지금 와서 스무 살의 나를 떠올려보니 그 당시 나는 어찌할 바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새로웠다. 대학생이 되어 알 수 없는 꿈에 부풀었었고 그만큼 좌절도 했었다. 조경학과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제대로 몰랐고 내가 설계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조경에 대한 확신은 먼지만큼도 없었고 내일 전공을 바꾸거나 다른 진로를 선택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스무 살의 나였다. 교실에는 각기 다른 얼굴과 성격을 가진 30명이 스무 살의 내가 앉아있었다. 어떤 스무 살의 나는 소심해서 말을 꺼내기가 무척 어려운 여자 아이였고, 어떤 나는 수업보다도 이번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하는 삶이 버거운 청년이었다. 어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조경가가 되고 싶었지만 형편없는 그림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은 좌절한 몽상가였다. 어떤 나는 성적에 맞춰 조경학과에 들어왔지만 하루빨리 전과를 하고 싶은 아웃사이더였다. 내가 나에게 조언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지시나 논의가 아닌 조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대화를 시작할 때 “나라면...”이라는 말을 붙이는 버릇이 생겼다. 일종의 주문이다. 지금의 내가 지금과는 다른 나였을 수도 있는 스무 살 즈음의 나를 소환하는 주문과 같은 말이다.    

사실 이 역시도 자기 암시에 불과한 헛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다고 갑자기 내가 타인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질 리도 없고 나를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가 달라질 리도 없다. 나는 소심한 여자 아이였던 한 번도 적이 없기 때문에 소심한 여자 아이가 될 수 없다.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하는 고학생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삶은 알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그림 재주가 없는 이들이 설계 수업을 들을 때 겪는 당혹감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을 떠나서 나의 스무 살은 1990년대 끝자락이었고 이들의 스무 살은 2010년대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저들은 모든 것이 뜨겁고 불확실한 스무 살이고 나는 수치스러울 것과 잃을 것이 너무나 많아져버린 사십 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주문과도 같은 말버릇을 반복하는데, 최소한 이기적인 내가 나 스스로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보잘 것 없고 인정을 못 받는다 하더라도 나만큼은 나를 놓아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이라는 직업을 갖게 된지 6년이 되었다. 아직도 선생일이 낯설고 어렵다. 

선생(先生), 먼저 태어났다는 것에는 무슨 이유가 있고 나름의 역할이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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