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독(毒)이 되는 친절

변재상 논설위원(신구대 환경조경과 교수)
라펜트l변재상 교수l기사입력2018-07-18
독(毒)이 되는 친절




_변재상(신구대 환경조경과 교수)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한국경관학회에서 주관하는 해외 답사를 다녀왔다. 영국의 도시재생 사례와 함께 농촌과 도시의 다양한 경관관리 사례를 살펴보기 위한 목적의 답사였다. 대학원 때부터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었던 영국의 조망관리 정책을 실제로 보고 나니, 뭔가 숙제를 해결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경관이라는 공공재를 위한 도시와 국가적 차원에서의 노력과 함께, 이를 오래도록 영위하기 위한 시민들의 합의가 돋보였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러운 점도 많고, 배울 점도 많았지만, 나름 우리나라가 앞선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었다. 다양한 해설을 덧붙인 친절한 안내표지와 함께, 다소 복잡해 보이는 시설 사용 가이드 혹은 매뉴얼, 그리고 잠재적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했던 친절한 안전장치 등은 분명 우리나라가 앞선다고 느껴졌다. ‘선진국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안내나 장치는 상당히 성의 없고, 불친절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일정이 진행되면 될수록 의구심이 더해갔다. 불친절하게 느껴질 만큼 시설에 대한 사용 안내표지도 없고, 특히 우수한 혹은 보호 경관에 대한 설명 표지판이 현장에서는 매우 부족했다. 처음엔 이런 점들이 매우 불편했다. 더군다나 안전에 대해 끔찍이도 생각하는 영국인들이 어째서 국립공원의 위험한 절벽이나 수변에 바로 접해 빠질 것 같은 산책로에 펜스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안전(?)한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필자로서는 Curbar Edge의 벼랑 끝 절벽은 매우 위험해 보였고, Brindley Place의 수변 산책로는 부실해 보이기까지 했다. 깎아지른 절벽 끝에 뾰족한 앵커를 박고, 각종 쇠막대기와 안전 체인을 둘둘 감고 있는 우리나라 자연경관과는 상이했고, 호수공원 데크 위를 안전하게 막아주는 철제 펜스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Curbar Edge의 절벽 ⓒ 한국경관학회
 

Brindley Place의 수변 산책로 ⓒ 변재상

장소에 대한 궁금증을 스스로 해결해 나아가니, 기존에 자리 잡은 안내판이나 해설판들은 오히려 경관을 저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장치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안전을 고려해 자리 잡은 설비들은 최소한의 설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과도한 규모로 시야에 들어왔다.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주겠다는 친절한 펜스들은 창의적 발상을 가두는 울타리가 되어 있었다. 친절한 설명과 안내를 통해 길들이는 것보다 스스로 이해하고 주의하라는 보이지 않는 다양한 경고들이, 불편함을 대가로 더 우수한 경관을 제공해 주겠다는 의도로 점차 해석되기 시작했다. 모르고 찾아간 장소에서 스스로 찾아내고 터득한 경관의 속내는 독특하고 개성 있게 다가왔다. 현장에서 느끼는 경관의 생생함이 전달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답사에서 얻은 최고의 소득은 지나친 친절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가로시설물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적재적소에 있는 간결한 가로시설물은 약이 되지만, 과도하게 배치된 가로시설물은 경관의 순수한 이해에는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답사 내내 친절한 해설과 안전에는 미숙함이 느껴졌지만, 이로 인해 얻게 된 경관의 잠재력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큰 수확이었다. 

모 핸드폰을 처음 사서 느꼈던 점은 참 불친절하다는 것이었다. 매뉴얼이라곤 달랑 한 장뿐이었다. 수십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다른 제품의 매뉴얼을 접해본 필자로서는 알아서 해보라는 거만한 메시지로만 느껴졌다. 처음엔 불쾌하기도 했지만, 점점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기능들을 스스로 터득해 나가면서 나만의 개인 매뉴얼과 독특한 사용법을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스스로 만든 매뉴얼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불친절함의 매력이랄까? 마찬가지로 경관은 복잡한 가로시설물들을 통해 가공되어 인지되는 것이 아니다. 넓게 펼쳐진 그러나 한정된 눈앞의 경관 속에서 구태여 설명을 듣고 길들여지기 보다는, 스스로 느끼고 창의적으로 경관을 해석하고 천천히 체험해 보자. 이것이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대가로 얻는 경관의 즐거움일 것이다.
_ 변재상 교수  ·  신구대학교 환경조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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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byeon@shing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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