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동문(東門), 하얀 이상의 검은 정원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18-08-02
동문(東門), 하얀 이상의 검은 정원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청주에 정원 박람회를 위한 정원 설계를 의뢰받았다. 청주의 자연과 문화를 담은 정원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청주와 충주조차 제대로 분간 못했던 무지한 나는 뻔뻔하게도 청주 사람들을 위해 청주를 담은 정원을 만들겠다고 했다.

신동문(辛東門)은 청주에서 나서 자란 시인이다. 1963년 문인지 「시대」는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의 대립구도를 설정한 세미나 개최했을 때 신동문은 참여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초청되어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서정주와 논쟁을 벌인다. 그 뒤로 신동문에게는 항상 저항시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실제로 신동문은 독재정권의 시대상황을 비판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나는 그의 참여시에서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했다. 그것이 시 자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4.19나 5.16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나와 너무 멀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의 첫 작품 「풍선기」를 좋아한다. 한때 공군으로 복무한 그의 주된 업무는 풍선을 띄워서 기상을 관측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신동문은 그 때의 경험을 무척 긴 장편의 시로 썼다. 그 시에는 정치적인 의도도 목적도 없었다. 나는 두 번째 풍선기의 다음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오늘은 오월이 베풀고 있는 서정이 있지만 불모풍경의 나의 벌판에는 서서 부를 슬픈 노래는 없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하루 종일 풍선을 띠우고 바라보아야했던 황량한 경험에서도 서정을 찾을 수 있었고, 부를 노래는 찾을 수 없었던 청년의 시심이 부럽고 슬펐다.
 
신동문은 1960년대 경향신문의 부장으로 일을 할 때 쌀값 폭등에 관한 글을 썼다가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다. 모진 고문 끝에 다시는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그는 평생 이를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신동문은 1967년 「내 노동으로」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어떠한 시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절필을 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시를 다시는 쓸 수 없게 된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시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문학을 통해서 더 낳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시인은 마지막 시를 쓰고 귀향을 한다. 그는 여생을 충북 단양에서 농사를 지으며 침으로 주민들을 치료하면서 보냈다. 시를 다시 내라는 권유에 그는 지금 자기가 시를 쓴다면 쓰레기를 하나 더하는 것일 뿐이라며 끝내 고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신동문은 젊은 시절 결핵 때문에 청주도립병원에 입원을 했었다. 그 때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이 동쪽 문이어서 동문이라고 아호를 정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그의 이름이 어떠한 시보다도 강렬한 시로 다가왔다. 신동문은 우리의 가장 어두운 시대를 살아간 시인으로서 그 누구보다 뜨거운 시와 같은 삶을 살았다. 굳이 시인이기 때문에 시처럼 살아야할 이유는 없겠지만 시인이 시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은 분명 저주임과 동시에 축복이다. 신동문과 서정주 사이에 벌어진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에 대한 논쟁은 시인의 슬픈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신동문은 부조리한 현실에 극렬하게 시로서 저항했고 작은 변명조차 한없이 부끄러워했던 이였다. 서정주는 시로 친일을 하였고 해방 후에는 독재자들을 찬양했다. 역설적이게도 추한 삶을 살았던 서정주의 시는 신동문의 시보다 아름답다. 시의 자리는, 예술의 가치는 정치의 도구가 되는 순간 오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참여의 시는 순수의 시보다 치명적 결여를 수반해야 한다. 나는 신동문이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첫 시 풍선기에서 만난 신동문은, 그리고 그의 마지막 시 「내 노동으로」에서 작별한 신동문은 그 어떤 시인보다도 다른 예술이 아닌 시라는 형식이 드러낼 수 있는 순수한 진리를 보여줄 수 있던 시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미당보다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없었던 것은 선택의 문제였을 것이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야만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서동문은 서정시를 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샤르트르의 희곡에 나오는 한 젊은 레지스탕스는 고문을 당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누군가 뼈가 부서지도록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도대체 왜 살아야하냐고. 그래서 서동문은 저항시를 써야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아무런 시도 쓸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원이 없어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정원은 잉여 공간이다. 동시에 가장 근원적이며 원초적인 공간이다. 건축가이자 시인인 함성호는 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시는 불필요한 잉여의 언어로 만들어진 의미의 집합이다. 하지만 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하기 때문에 언어의 근원에 물음을 던지고 존재 자체에 다가서려 한다. 물자체를 환히 밝히지는 못하지만 불가능의 영역에서 모순을 통해서 물자체를 엿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낸다. 잉여의 공간이면서 원초적인 공간인 정원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공간 중에 가장 시적인 공간이다. 시적인 정원은 공간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표현하려는 공간이다. 정원은 현실과 괴리된 모순을 내포해야하며 이는 이성이 아닌 감성의 정동으로 포착되어야 한다. 나는 청주의 문화를 담아달라는 요청에 청주에서 나고 자란 신동문이라는 시인의 정원을 만들겠다는 회답을 하였다. 하얀 이상의 검은 정원. 시를 쓸 수 없었던 시인 신동문의 삶은 아름다운 모순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시적이었다. 동쪽에 난 문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그는 그 문을 열고 더 낳은 세상으로 한걸음도 내딛지 못했으며 시의 순수함을 끝까지 쫓지도 못했다. 그 문은 애초부터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그러나 열리지 않는 문이라도 분명 문이 있었기에 그 문고리를 붙잡고 “나는 이런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주정이라도 했다.   
 
더운 여름 아침 나는 대상지를 가보았다. 나는 대상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에는 아무도 찾을 것 같지 않은 외진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농촌을 테마로 한 공원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토속성을 쥐어짜는 듯한 정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등 위험해보이지 않는 물가로 접근을 금지한 과한 울타리와 경고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입구임을 알리려는 시설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여백의 공간을 꾸역꾸역 채워야하는 정원의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담당 공무원은 이 정원이 청주 “생명축제”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생명축제는 친환경 농축산물을 판매하는 축제라고 했다. 주로 어르신들이 많이 찾아오시니 이해가 쉬운 정원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시를 끊고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가난한 농민들에게 침을 놓아주던 신동문이 떠올랐다. 무료로 침을 놓아준다는 소문을 듣고 하루 꼬박 걸어 찾아온 어르신에게 침 값으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넉살 좋게 말하고, 어설픈 노래를 다 듣고 나서 식사를 대접하고 잠도 재워서 보냈던 신동문의 삶이 생각났다. 이 공원이라면 촌부들과 어울리며 농부로 생을 마감한 시인 신동문의 정원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대상지를 둘러보고 떠나면서 나는 신동문이 남긴 마지막 시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절반을 더 살고도 / 절반을 다 못 깨친 /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 미련을 되씹는 /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 내 노동으로 / 오늘을 살자고 /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농사꾼이 되어 노동으로 살기로 결심한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은 슬픈 미련과 어리석은 마음을 어디에 두고 간 것일까? 숨 막히는 열기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독한 여름에 가을의 하얗고 검은 정원을 생각한다.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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