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 즐기는 “통합”, 창발적 협동인 “통합” - 2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라펜트l안명준l기사입력2018-08-17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Part 2: 14 통합(integration) Ⅱ



모여 즐기는 “통합”, 창발적 협동인 “통합”

 



_안명준 오피니언리더

조경시공연구소 느티 대표│조경비평가




통합Ⅱ:  모여 즐기는 “통합”, 창발적 협동인 “통합”...

통합은 융합이 아니다. 많은 논의들이 다른 두 가지가 혼성을 이룬 융합을 여전히 통합과 동일시 여긴다. 그렇지 않다. 통합에는 위계가 있으며, 척도가 있다. 깊이가 있고 갈래도 있다. 통합이 민주적인 방식인 것은 그 때문이다. 완정성은 전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통합의 가치를 정위치 시키며 혼란스럽고 혼성에 갈피 없는 움직임들을 제자리하게 해야 한다. 각자가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를 정립하였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통합은 융합이 아니다. 통합은 각자가 주인공인 모두에 대한 통찰이다.


통합(integrity)의 개념적 재정립 필요성
지난 시대 우리는 전체, 전체성에 대한 오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일종의 트라우마는 해체주의, 포스트모던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세기가 마무리되면서 다원성(plurality)과 다양성(diversity, variety)의 가치가 공유되자 우리는 드디어 하이브리드, 영역 간 넘나들기를 가로지르고 세로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우리는 ‘융복합’이라는 복합사고의 개념을 먼저 적용하기 바빴다. 과오를 잊은 듯 현상에만 몰입한 논의들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혼종만을 낳으며 혼란과 혼돈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각자를 인정하며 서로가 소통하는 태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푸코가 던지고 간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그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통합은 그렇게 구조악(structural evil)과 구조선(systemic good)을 줄다리기하는 각자 중심의 민주적인 협동(incorporation)의 개념이다. 통합을 치켜세우는 이유는 잘못된 사용으로 부정적 인식이 먼저인 이 개념에 알리바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각자의 전문성이 필수적인 현대 사회에서 주변의 각자를 인정하며 전체를 먼저 염두에 둔 수양된 전문가 의식이 통합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또한 통합의 개념은 융복합과 같이 한 번에 그간의 모든 것을 녹여 섞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의 우리를 인정하고 앞으로의 진화를 함께 공유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통합은 그러한 방법을 통해 창발적 협동을 이루게 되고 그것이 결국 예상치 못한 효율성과 이점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통합의 개념은 재정립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저간의 배경과 상황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위계 있는 통합, 척도 있는 통합”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시대 통합의 본질은 결국 생물학과 기계학의 대화를 통해 “창발적 완전체(협동체, 공동체)”를 이루어간다는 데 있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그것을 통해 구조적 효율성(structural efficiency)을 달성하고 편익과 가치를 재정립하게 한다는 것이다.


창발적 통합과 통합성의 기반
통합은 전부를 먼저 상정해야 하는 생각의 방식이다. 큰 눈이 먼저 필요하고 거기에 적합한 자기수양을 필요로 한다. 푸코식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라고 한다면 너무 앞서간 것일까? 통합은 그렇게 기본적으로 전체를 아우르고 전문분야로서 자신의 위상을 검토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전체를 어떻게 보느냐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 될 수밖에 없다. 관점은 지정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의사결정의 과정은 목적을 이루기에는 너무 지난하다. 쉽지 않지만 소통은 기초적인 사항의 공유로부터 시작됨을 잊지 않으며 우선 우리는 통합을 이야기하는 기반적 변화 단계부터 공유해 보자. 

인류사의 변화 또는 진화는 몇 가지 탁견에 의해 종합되고 구별되기 마련이다. 이 중에서 다음의 세 가지 관점은 통합을 위한 기반 변화를 잘 설명해주고 향후의 변화 방향을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 첫 번째는 브루스 매즐리쉬와 김용석의 것이다. 다섯 가지의 불연속으로 설명되는 이것은 인간 사고의 진화를 단절했던 것의 연장(extension, 연속)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 연속은 지구와 우주 사이의 단절(불연속)을 연속으로 바꾸어놓은 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과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것이다. 독단적 지구가 아니라 우주의 일원으로 지구를 우주에 통합한 셈이다. 두 번째 연속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연속을 밝힌 다윈에 의한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별개인 것이 아니라 진화적 연속선상에 놓인다는 이러한 관점은 여러 생물과 인간을 통합한 셈이다. 세 번째 연속은 인간 의식에 관한 것으로 의식적 자아와 육체 사이의 관계에서 무의식의 영향을 연장선에서 이해하게 해준 프로이트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무의식에 영향을 받으며 의식적 인간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네 번째 연속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우월적 지위에 관한 것으로 별개였던 인간과 기계가 이제 서로 연속되고 공진화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통합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피조물로만 보아왔던 기계는 이미 인간의 연장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간의 능력을 상회하며 말 그대로 공진화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철학자 김용석은 다섯 번째 연속으로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까지 통합하여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신은 인간에 대해 절대 우월한 존재였으나 이제 신 또한 인간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이 신을 닮았다는 것의 의미는 이 연속성을 인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다섯 단계로 나타나는 인간과 내외부 사이의 연속은 통합을 이해하는 기반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항들이다.

두 번째는 레이 커즈와일의 것이다. 그는 몇 가지 통계적 확장의 단계를 살펴보며 통합의 과정을 창발의 조건으로서 이해하도록 해준다. 그가 말하는 “수확 가속의 법칙(Law of Accelerating Returns)”은 핵심 개념으로 ‘특이점(singularity)’을 이루는 창발성의 핵심이다. 기술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져 인간의 생활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화된 시기를 말하는데, 창발적 진화가 발현되는 단속적 변화를 지적하는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진화의 여섯 시기는 그것을 설명해준다. 제1기는 물리 현상과 화학 반응의 시기로 정보가 원자 구조에 있음을 확인하는 시기이다. 원자의 구조는 점차 복합해지며 정보의 저장 방식으로서 DNA가 진화하게 된다. 제2기는 생물학의 시기로 정보가 DNA에 담겨 있음을 확인한다. 담긴 정보들이 복잡해지며 뇌를 기반으로 여러 생명체들이 진화한다. 제3기는 뇌의 시기로 정보가 신경의 패턴에 있음을 확인한다. 신경의 복잡성은 기술을 다룰 수 있는 수준으로 접어들게 되고 정보는 새로운 장을 만나게 된다. 제4기는 기술의 시기로 정보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설계에 있게 된다. 기술이 드디어 생물적 방법론에 의거한 정보 진화의 기법들을 창발하게 된다. 제5기는 기술과 인간 지능의 융합의 시기이다. 생물적인 방법론이 인간 기술에 기반한 기법들과 융합되는 시기이다. 정보는 이제 생물학과 기술학을 넘나들며 시공의 한계를 확장하게 된다. 제6기는 우주가 잠에서 깨어난다고 표현하고 있다.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의 패턴이 지적 과정과 지식으로 가득 찬다는 것이다. 즉 정보가 우주를 누비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이중 커즈와일은 우리는 기술이 생물적 방법론을 터득하는 제5기의 특이점을 곧 맞이할 것이라 장담한다. 오랜 문제들을 극복하고 창조성을 무한히 확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피터 왓슨의 것으로 컨버전스(convergence, 집중, 집합)를 통한 빅 히스토리(Big History)의 구축에 관한 것이다. 세분화된 학문간 결합과 통합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주는 그의 입장은 이러한 ‘합쳐짐’들이 모여서 하나의 “빅 히스토리”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닐스 보어는 원자의 구조를 전자를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물리학과 화학을 통일한 것으로 평가된다. 물리학과 화학은 각각 독자적인 방식으로 전문성을 구축해 왔는데 그 교점으로서 전자의 역할을 규명하여 보어가 “거의 통일”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원소를 예측하거나 물질간의 결합을 예상할 수 있도록 하여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것. 둘째는 앤드루 엘리커트 더글러스의 나이테연대학(dendrochronology)이 거론된다. 나무의 나이테가 11년 주기의 태양 흑점 활동과 연관됨을 발견하고서 식물학과 고고학, 나아가 천문학, 기후학 등까지를 통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건축에 사용된 목재를 연대별로 분석하면서 문화사까지 짐작할 수 있는 수준까지 확대되며 새로운 과학이 된 것이다. 셋째는 존 볼비와 에인스워스 두 사람의 공으로 보는데 ‘애착 이론(imprinting, maternal deprivation, internal working model 등 관련)’에 근거하여 소아과학과 정신분석, 동물행동학을 통합한 것으로 지적된다. 프로이트에 의해 시작된 무의식에 대한 철학적, 심리학적 입장이 드디어 확고한 생물학적 토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컨버전스 개념은 다양한 분과 학문들이 지난 150년 동안 서로 통합되어 새로운 창발적 학문으로 진화하였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여러 가지가 통일이나 단일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또는 여러 기술이나 성능이 하나로 융합되거나 합쳐지는 일”로 설명되며 “반복적으로 통합되고 서로를 뒷받침해주면서 일관성 있는 하나의 이이기” 즉, “거대한 서사(master narrative, 빅 히스토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기술된다.

이처럼 학문간, 사고체계 간 결합(incorporation)과 종합(synthesis), 복합(combination), 이합(bisociation)과 연합(association)은 창발성의 근간을 이루어왔고 앞으로의 가능성도 거기에서 모색되고 있다. 이러할 때 튼튼한 기반으로서 우리는 다만 몇 가지 입장은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요즈음 많이 알려진 방식으로 범주화 하자면 “다학제(multidisciplinary)는 단순한 조합(assemblage)으로, 간학제(interdisciplinary)는 전체적 통합(integration)으로, 초학제(transdisciplinary)는 혼성적 융합(convergence)으로” 굳건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강도에 따른 혼합(mix)의 위상 ⓒ안명준


실천으로서의 통합설계
브루스 매즐리쉬, 김용석, 레이 커즈와일, 피터 왓슨 등이 강조하는 것은 결국 해체주의, 분석적 사고를 지나 우리가 깊이가 더해진 통합의 시기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향하는 바는 통합을 통해 창발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로써 새로움, 그간 가져보지 못한 창의적인 상황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통합은 창발을 위한 방법론으로 여겨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특이점이란 결국 창발점이다, 새로운 통합(점)이다. 

이처럼 우리는 통합의 개념을 명확하게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융복합, 입체개발, 4차 산업 등 모호한 개념적 넘나들기는 실천을 오히려 방해할 뿐이다. 우리가 통합성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개념적으로 통합이 각자를 인정하며 협동의 전체를 상정하기 때문이고 또한 개념과 행동의 방식이면서 그 결과를 동시에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통합기술(converging technology), 통합설계(integrated design)는 그러한 전반적인 통합과 통합성이 잘 구현될 수 있도록 생각을 모아가는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통합설계는 그러므로 어떤 주도권을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어떤 전문성을 어떻게 작동하게 할 것이냐,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협동적 사고의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 실천으로서의 통합설계 결과는 BIM과 같은 방법론 또는 도구(tool)로 이미 구현이 어렵지 않은 상황이다. 부족한 것은 그에 대한 필요성과 생각의 교류, 그리고 그 소통과 협동의 방법론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의사결정의 과정이 주도권 싸움으로 비치는 것의 핵심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통합설계를 정위치하여 하루 빨리 패권주의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욕망과 통합의 사회를 위하여...
전통적으로 우리는 권위주의 사회를 벗어나면서 개인주의 사회와 공동체 사회로 스스로를 구분하며 그 한계와 장단점, 지향하는 바를 인정하며 살아왔다. 사회의 변하지 않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의 욕심과 욕구라는 것. 통합을 추구하는 사회의 이면에도 결국 그것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것을 명석하게 이해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익사회, 공동사회로 단순화 된 그것에 통합(참여미학)사회라는 우리시대 어바니즘의 결과물이 보여주는 새로운 유형을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그것은 우리시대 구조악 또는 그리드락에 갇힌 사회와 도시를 새롭게 통합하는 기본적 시각임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통합은 결국 협동과 다르지 않으니까 말이다.

막스 베버의 기준에 이제 하나 더 추가하여 공동체성의 세 가지 차원을 “공동사회, 이익사회, 통합(참여)사회”로 생각해 보자. 우리시대 공동체는 새로운 유형을 이미 형성하고 있고 그것을 지원할 의사결정 방법론으로서 통합설계론도 요청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동아이사를 중심으로 두드러진다. 이제 전문분야로서 우리는 이 점을 눈 밝게 짚어나가야 하리라.


* 주요 참조 문헌: 브루스 매즐리시 지음, 김희봉 옮김, 『네번째 불연속』(사이언스북스, 2001) / 김용석, 『깊이와 넓이 4막 16장』(휴머니스트, 2002) / 레이 커즈와일 지음, 김명남, 장시형 옮김, 『특이점이 온다』(김영사, 2007) / 피터 왓슨 지음, 이광일 옮김, 『컨버전스』(책과함께, 2017) / 최재목 엮음, 『융합 인문학』(이학사, 2016)
글·사진 _ 안명준  ·  조경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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