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조선후기 화훼의 성행과 정원조영문화

신현돈 논설위원(서안알앤디 디자인㈜ 대표)
라펜트l신현돈 대표이사l기사입력2018-11-09
조선후기 화훼의 성행과 정원조영문화



_신현돈(서안알앤디 디자인㈜ 대표)



우리나라 조선후기, 그 중에서도 18·19세기는 매우 역동적인 시기였다. 이념 중심의 사고가 해체되고 실학이 유행하면서, 이 시기 지식인들은 추상적이고 일상에 큰 관련이 없는 관념적 철학 대신 일상의 소소한 사물들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도읍지 밖의 산수가 아름다운 호젓한 곳에 삶의 공간을 두는 것이 여유 있는 삶의 공간을 꾸리는 최우선이라고 여겨졌던 기존의 인식이 이 시기에 들어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회지 조경이 유행하고 이를 반영하여 건축과 조경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지식인이 증가했다. 그들은 문예작품을 통해 조경론을 전개하고 개성과 미의식을 표현했다. 따라서 이 시기 주거 및 조경 문화는 기존과 확연히 구분 지을 수 있다. 특히 원예문화의 극적인 확대가 대표적인 특성으로 나타났다. 문인층들 사이에서 각종 화훼에 대한 수요 및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정원 경영에 많은 관심을 쏟던 시기였으며 화훼 및 분재의 유통이 크게 성행했다. 우리나라 18․19세기는 한편으로 경제 부흥기라고 볼 수 있으며, 이 때 새로운 정원 문화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 명대 이후 조원술이 급속도로 발전함과 동시에 원예재배가 유행하면서 주거공간내부나 실내에 배치된 화훼와 분재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와 더불어 꽃을 재배하는 방법과 감상을 위한 서적이 발행되었고, 이는 우리나라에 바로 수입되어 지식인층의 취미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값비싼 도자기로 만든 화분에 심겨있는 관목이나 분재는 마당의 구성물이었고, 개인 뿐 아니라 방문객들과의 모임에서 흥을 돋우는 완상물이 되기도 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비롯한 조경에 관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전기와 이 시기 지식인층들의 ‘꽃’에 대한 전반적 인식 변화의 가장 큰 차이를 살펴보면, 조선전기에는 사물에 철리를 투영한 관물론적 자세를 표명하였다면 조선후기에는 ‘꽃’이라는 사물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집중하였다는데 있다. 강세황(姜世晃,1712-1791)은 이 시기에 초목분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저술하였고,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이운지(怡雲志)」에서 실내의 다른 소품들과 어울리게 꽃과 화분을 놓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화훼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자연스레 이를 공급하는 화훼 상인들이 생겨났다. 필운대(弼雲臺) 아래 누각동(樓閣洞)과 도화동(桃花洞) 청풍계(淸風溪)등에는 아전으로 있다가 물러난 뒤 분재나 화훼 재배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기이한 등걸에 접붙인 매화나 괴석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분재, 층층이 꼬아 올려 높은 곳에 열매가 달리게 한 층석류(層石榴), 화분 하나에 서너 가지 빛깔의 꽃을 피운 국화 등이 특히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관련하여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에는 수많은 화훼와 분재를 파는 가게가 묘사되어 있다.

화훼업이 성장하면서 기술도 발전하였다. 전문 원예업자도 출현하고, 국화품종 개량의 전문가도 등장한다. 매화를 즐기는 전통적인 취미는 더욱 활발해졌다. 겨울밤에 얼음덩이를 잘라내어 그 속에 촛불을 두고 매화를 감상하는 빙등조빈연(氷燈照賓宴)이나 그림자를 이용하여 국화를 감상하는 국영법(菊影法)과 같이 다양한 감상법도 등장하였다. 화단에서 꽃을 키우지 않고 화분에서 재배하여 감상하고 꽃병에 꽂아놓고 완상하는 분경법(盆景法)과 병화법(甁花法)이 널리 활용했다. 이는 조선후기에 화훼 감상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 문화적 트렌드로 확립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조선후기 화훼의 유행과 정원조영 문화성행과의 인과관계를 살펴보면 정원 및 원림 조영문화의 성행이 화훼의 성행을 이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화훼의 성행이 정원조영이 유행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정원의 전체적인 형태보다는 화훼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졌었고, ‘예술적 형태’를 추구하기 보다는 조원자(造園者) 자신의 화훼에 대한 만족을 위한 것이 더욱 컸다. 여기에서 개개인의 취미와 추구하는 문화적 이상향에 따라 소소한 요소들이 달라졌다. 여기에는 조선후기 당시 문인들이 한양이나 그 근교에 마련한 별장과 원림에서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면서 시문, 서화와 음악을 즐기며 서책, 분재, 수석 등을 감상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후기 화훼 및 정원 관련 취미와 더불어 다양한 문화현상은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서울의 상층 사대부들 사이에서 향유된 각종 취미는 그들이 지닌 문화적 역량의 힘을 입어 일반 사람의 그것에 비해 더 많이 뚜렷하게 노출되고 있다. 취미의 향유가 신분과 지역, 경제적 수준과 사유의 개방성에 따라서 큰 차별을 보이고 있으므로 화훼와 정원조영의 성행을 조선후기의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특히 화훼 수집과 정원조영은 지식인들이 향유하는 고급 문화였기에 이들의 관념과 철학이 많이 투영되어 있어 공간조영의 실제적 문제와 괴리가 있는 경우도 많다. 당시 다양한 서적에서 당대 최신 과학기술과 함께 이상적인 정원 및 주거공간 조성방법에 대한 소개하려고 노력했지만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미신에 가까운 것도 많다.

조선후기 정원조영은 지성인들의 예술적 취미와 깊이 연계되어 현실과 이상의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따라서 한편으로 공간적 완결성에 구애 받지 않는 우리나라 정원 특성의 대표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으며, 당시의 문화 및 사회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 되기도 한다.
_ 신현돈 대표이사  ·  서안알앤디 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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