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론] 주체에 대하여 (2)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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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펜트l기사입력2019-01-08
※이번 원고는 앞선 원고와 이어집니다.

주체에 대하여 (2)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신은 한 가지만 빼놓고 모든 것을 갖췄다. 그 한 가지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슬라예보 지젝(Slavoj Zizek) -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분열된 주체

조경이 아닌 조경을 선언한다는 것은 조경을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부정되는 것은 고정된 지점, 어떠한 행보를 계속 되돌아오게 만드는 개의 목줄과도 같은 회귀점으로서 병리적 증상과도 같은 정체성이다. 차라리 조경이라는 주체를 가정하려면 그 주체가 분열되어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윤리적인 당위성이나 진리로서의 객관성을 의미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더 바람직하다는 실용적 정당성에 가깝다. 다시 말하지만, 주체가 분열되었다고 함은 주체가 부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체를 부정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서 주체의 자리는 완전히 소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항상 주체를 가정하고 일상적으로 말을 하며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주체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인위적으로 제거되고 부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온전한 그릇이 깨지듯이, 온전한 주체가 어떠한 외적 동기에 의해서 파편화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주체가 분열된다면 마치 그릇의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이듯 깨어진 주체를 다시 회복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분열은 오히려 주체 이전에 존재한다. 주체의 성립은 분열을 전제로 한다. 분열은 주체의 구조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주체는 완결된 주체이다. 동일성에 근거한 선험적이며 초월적 주체이다. 주체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토대이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1)
라캉의 주체는 분열된 주체이다. 라캉은 생각하므로 존재한다고 언표된 데카르트적 주체 저편에 존재하는 언표 행위의 또 다른 주체를 목격한다. 주체 자체가 깨어진 허상이기 때문에 주체는 그 어떠한 것의 토대도 아닐뿐더러 주체를 확립시키는 그 어떠한 근거도 불확실해진다.  


분열의 구조2)

조경이라는 주체를 설정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조경의 타자를 설정하게 된다. 타자가 없다면 주체의 개념도 성립되지 않는다. 나 말고 아무것도 없다면 나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조경가는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조경가는 건축가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조경은 사회, 자본, 정치, 대중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하나의 동일성을 지닌 완결적인 주체와 또 다른 종류의 동일성을 지닌 완결적인 타자의 만남을 가정한다. 온전한 주체와 온전한 타자의 관계에서 분열은 없다. 

그런데 실상 타자와 관계를 하는 주체는 자기 완결적인 존재가 아니라 타자라는 거울에 비친 일종의 상(像)으로서 자아이다. 주체가 타자를 전제로 성립한다는 말은 주체는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이때 타자는 주체를 드러내주는 거울의 면과도 같다. 거울이 없이는 스스로의 모습을 알 길이 없듯이 주체는 타자와 대응되는 자아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3). 그래서 타자를 만나는 주체는 항상 허상(虛像)으로서의 자아이다. 조경가가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면, 조경가가 건축가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면, 이 두 관계 속의 조경가는 동일할 수가 없다. 클라이언트에 대응되는 조경가의 위치와 역할, 건축가가 기대하는 조경가의 의미는 당연히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대응되는 조경, 자본에 대응되는 조경, 정치에 대응되는 조경의 자아는 각자 다르게 드러난다. 하나의 완결된 정체성을 지닌 조경은 존재할 수 없다. 타자에 비친 상으로 드러난 조경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서 분열이 생긴다. 

더 당황스러운 사실은 주체를 드러나게 해주는 타자 역시 자기 완결적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타자 역시 주체처럼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밖에 없다. 이 때 타자를 반영하는 거울은 타자와 대면하고 있는 주체의 허구적 자아이다. 그래서 타자 역시 허상임이 드러난다. 모든 관계는 허구적 자아와 허구적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만이 성립된다. 또 다른 분열이 생긴다.


이중의 분열

그런데 이는 최초의 분열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분열이 존재한다. 주체와 타자 모두가 허상이라면, 분열이 성립의 조건으로 내재하고 있다면 주체와 타자 모두를 넘어서 분열을 야기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이는 주체와 타자 이전에 존재하는 또 다른 타자이다. 이 모두를 넘어선 거대한 타자의 정체는 언어이다4). 더 정확히 말하는 언어가 기원하는 기표들의 장소이다. 주체는 실재한다. 그러나 실재의 주체는 기표의 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나며 기표로 대체된 주체는 허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초의 분열은 실재의 주체가 상징의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결여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상징의 과정 외에는 실재의 주체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분열이 발생한다. 

조경은 하나의 기표가 됨으로써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다른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미는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와의 맺는 관계, 즉 기표의 자리에 의해서만 결정되기 때문이다5). 중(中)의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상(上)과 하(下)의 개념이 필요하다. 주황은 빨강과 노랑 사이에 놓이는 색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조경의 의미는 건축과 토목, 원예의 차이에서 드러날 뿐이다. 조경의 실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실체가 드러나는 방식은 기표들의 자리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런데 기표의 세계는 주체의 성립 이전에 존재한다. 따라서 주체는 스스로의 의지로 기표들을 사용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주체는 기표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다. 기표가 주체를 규정한다.  

그래서 주체와 대타자로서의 기표, 타자와 자아 사이에 두 사선이 형성된다. 기표는 주체를 규정하며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상징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허구의 자아와 허구의 타자가 관계하며 상상적 연결고리를 맺는다. 이 두 사선이 교차하면서 기표와 주체의 관계는 단절된다. 기표는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적인 형태로 주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상징의 세계는 상상의 세계와 교차하면서 주체를 분열시킨다. 그렇다면 주체는 원래의 자리에 고정되어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주체는 이 도식에서 과연 어디에 놓여있는가? 주체는 모든 자리에 있다. 타자의 자리에, 자아의 자리에, 기표의 자리에. 그 모든 자리에 존재한다.    


허무주의를 넘어서

조경이라는 주체가 필연적으로 분열되어있다면, 그리고 이 분열이 극복 불가능한 구조적 실재라면, 우리는 동일성에 근거한 완결된 하나의 주체를 탐색하는 노력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그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허무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완결된 주체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에게 드리워진 허무주의는 극복된다. 완결된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이다. 모든 것을 이루어지고 그래서 모든 것이 안정화된 상태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더 이상해야할 추구할 것도, 해야 할 일도, 그 어떠한 의지도, 역동도 사라진 존재이다. 분열은 결여를 수반한다. 결여는 욕망을 낳는다. 본질적인 주체의 분열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없는 결여이다. 그래서 욕망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 그것이 살아있음의 본질이다. 역설적으로 분열은, 결여는 삶의 근원이며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끊임없는 힘의 긍정적 원천이 된다.

이것이 조경이 아닌 조경을 추구해야하는 이유이다. 조경이 아닌 조경은 욕망에 충실한 조경이며 조경을 매체로 무한한 다자의 진리를 영원히 탐색하는 과정이다.


                                                                                                                                          

1) 자크 라캉, 권택영 외 역 (1998)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p.80
2) 자크 라캉은 L도식에서 주체(Es)와 자아(Moi), 그리고 소타자(autre), 대타자(Autre) 사이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인 자아의 상상적 관계와 타자에 대한 상징적 관계를 도해한다. 「에크리(Écrits)」에 소개된 도식은 다음과 같다. 
S는 주체에 해당하며 a는 자아이다. a'는 소타자이며 A는 대타자의 기호이다. 라캉의 L도식은 1955년 「세미나 2권: 프로이트의 이론과 정신분석 기술에서의 자아」에서 소개가 되었고 「세미나 5권」,「세미나 11권」에서도 언급된다. L도식은 「에크리」에 수록된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에 다시 수록된다.  다음을 참조. Jacques Lacan (1956) Le séminaire sur la lettre volée in J. Lacan, Écrits. (1966)  Paris: Seuil

3) 라캉은 L도식의 주체와 자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체는 a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그 때문에 그는 자아를 갖고 있다. 그는 그 자아가 자신이라고 믿을 수 있다. 모든 것이 거기에 존재하며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올 수단은 없다.” 
Jacques Lacan (1955) 「Le moi dans la théorie de Freud et dans la technique de la psychanalyse」 in Séminaires II, J. Lacan, (1978) Paris: Seuil, 조엘 도르, 홍준기, 강응섭 역 (2009) 라캉 세미나·에크리 독해 I, 아난케, p.202. 재인용.
4)  L도식에서 언어와 주체의 관계에 대해서 라캉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체는 자신과 닮은 사람들과 말할 때 주체는 상상적 자아들을 단순히 탈존(ex-sistantes)하는 사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사물로 간주하는 공통의 언어 속에서 말한다. 구체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영역 속에 있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주체는 일정 수의 사람들 즉 a-a'와 관계를 맺고 있다.” Ibid. p.204. 
5) 대타자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언어가 존재하는 장소의 의미를 갖는다. 라캉은 문자의 심급, 또는 프로이드 이후의 이성 이라는 논문에서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 개념을 차용하여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을 재정립한다. 이 때 라캉은 기의에 대한 기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라캉은 다음과 말한다.
“기표들은 모두 주체 속에 자리를 잡을 때에만 제 기능을 발휘 할수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남점은 주체가 마치 기의처럼 기능해야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기표 아래로 미끄러진다는 사실이다.”
Jacques Lacan (1957) 「 L'instance de la lettre dans l'inconscient」 in J. Lacan, Écrits. (1966)  Paris: Seuil, 권책영 외 (1993) 「욕망 이론」, 문예출판사, p.65. 재인용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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