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아우라 상실의 시대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지음(2017)
라펜트l오정학 과장l기사입력2019-01-16
아우라 상실의 시대


_오정학 경기도시공사 과장
(ohjhak@daum.net)


서  명 :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
   : 발터 벤야민 (신우승 역)
펴낸 곳 : 전기가오리(2017)

 

2014년에 개봉되었던 <와일드>는 장거리 트레일 코스 여성 참가자를 그린 영화이다. 서바이벌 방식이라 미대륙 남서쪽에서 북서쪽까지 4,300㎞를 혼자 걸어가야 한다. 주인공은 텐트와 먹을 것 등을 모두 짊어지고 사막, 고산지대,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른다.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길과 부랑자들의 위협을 이겨내야 했다. 오염된 웅덩이 물을 정수해 먹어가며 목표지점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갔다. 마약중독과 문란한 삶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전환을 고대하는 여주인공은 천신만고 끝에 중간 캠프에 겨우 도착하게 된다.

중간 캠프에서는 안전한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제공된다. 갈증, 배고픔, 공포를 잠시 잊고 고단한 몸을 쉴 수 있는 그야말로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그날 저녁 그녀는 다른 여성 참가자와 함께 캔 맥주를 하나씩 들고 느긋하게 벤치에 기대어 석양을 즐긴다. 그들 앞에 눈부신 저녁놀이 펼쳐진다. 그것을 보며 누군가 말했다. “보세요, 보고만 있어도 재충전되는 풍경이에요”. 목숨의 위험을 극복하고 도착한 캠프에서 맥주를 즐기며 바라보는 석양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또 그 감동은 얼마나 컸을까?

그녀는 결국 대회를 완주했고 삶의 자신감을 되찾았다. 고된 경험과 그것을 이겨낸 승리감을 잊지 못해서일까, 훗날 그는 대회종착점을 찾아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의 삶에서도 종종 그 때의 일들을 떠올릴 것이다. 기념사진을 보면서, 때로는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그날의 고통과 감동을 회상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찍은 사진을 통해 과연 그날 느꼈던 석양의 아름다움과 감동이 그대로 재현될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다만, 그때 자신의 감동이 얼마나 컸던가를 생각해 볼 뿐이다. 사진은 그때의 광경을 그대로 재현한다. 그러나 그 감동이 그대로 남겨졌다고는 볼 수 없다. 이후에도 그녀는 비슷비슷한 곳에서 저녁놀을 볼 수 있겠지만, 캠프에서의 그 느낌과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시간과 장소, 그리고 스스로의 상황이 바뀐 까닭이다. 


해무가 잔뜩 낀 이 새벽 바다의 장엄한 광경은 이때 이곳이 아닌 어떤 곳에서도 같은 감정을 느끼기 힘들 것이다. 바로 모방할 수 없는 원본의 아우라이다. ⓒ이석

20세기 초의 독일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원본이 가지는 이러한 느낌을 ‘아우라’로 명명했다. ‘아우라’는 어떤 예술품이나 대상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즉 다른 것과 구별되는 그것만의 독특한 특성을 뜻한다. 벤야민은 모든 예술작품의 품격과 예술성이 바로 아우라에 있다는 사실을 정립했다. 예술작품의 품격이 아우라에 있다는 것은 예술의 본래적 기능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예술품이 본래 신을 경배하고 받드는 제례의식에 사용된 점이 이를 입증한다. 

이 책은 이러한 아우라가 현대에 와서 상실되고 있음을 다뤘다. 인류는 그동안의 목판, 활판, 석판인쇄술을 거쳐 사진 영상 등의 첨단기술로 마침내 쉽게 복제가 가능한 시대를 맞았다. 벤야민은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은 본래 제의적 목적으로 생겨났으나, 현대에 와서는 정치적 실천에 토대를 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된다. 독일의 제3제국이 극성기였고, 그 때문에 마침내 목숨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그로서는 파시즘에 대응하는 예술의 전략으로서 ‘정치화’에 주목했다. 

글도 없었던 아주 먼 과거에는 그림으로 어떤 대상이 주는 경이적인 느낌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쇄술 개발로 좀 더 효율적으로 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오늘날엔 사진과 동영상 등의 첨단 기술로 온갖 경험이, 예술품이 쉽게 복제된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복제에도 한 가지는 빠져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자신이 있는 장소에 일회적으로 현존한다는 성질이다(8쪽).”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이 바로 원작의 진품성 개념을 이룬다. 발터 벤야민은, 이러한 특징들을 아우라 개념으로 집약하여 기술적으로 나날이 발전하는 복제술 때문에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위축됨을 우려했다. 

벤야민이 걱정했던 ‘아우라의 몰락’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그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복제품은 원작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권위를 가지며 원작의 권위를 압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벤야민의 복제품은 장 보드리야르가 ‘본체 없이 걷는 그림자’로 표현했던 시뮬라크르 개념으로 발전하여, ‘유일성과 지속성’을 가졌던 사물의 세계는 조금씩 ‘일시성과 반복성’을 갖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로 바뀌어갔다. 곳곳에서 아우라가 무너지고 ‘사물의 권위’가 파괴되었다. 이것이 한 세기 전에 벤야민이 포착한 현대의 징후였다. 즉, 급변하는 세계에 대해 전통적인 지역사회와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대도시 아케이드를 부유하는 현대인이 가지는 감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하이데거와 같은 문화보수주의자들은 존재의 근원에서 멀어지는 몰락의 징후로 여겼다. 하지만 벤야민은 기술의 진보로 이루어진 민주주의 문화의 특징임을 알아챘다. 현대인이 원본의 지나친 아우라일 수 있는 전통과 기성적 권위에서 풀려나와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음을 포착한 것이다. 벤야민이 우려한 아우라를 상실한 복제품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번성하고 있다. 그것들은 시뮬라크르를 거쳐 가상세계, 하이퍼 리얼, 증강현실 등의 다양한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에 훨씬 앞서 앞으로의 세계가 이미지 세계임을 예측했던 벤야민은 과연 이 시대를 얼마만큼 내다보았을까?
_ 오정학 과장  ·  경기도시공사 사업기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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