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철학자와 건축가가 본 도시 건조물

『건축과 철학』 장 보드리야르 / 장 누벨 지음(2003)
라펜트l오정학 과장l기사입력2019-02-20
철학자와 건축가가 본 도시 건조물


_오정학 경기도시공사 과장
(ohjhak@daum.net)


서  명 : 건축과 철학
   : 장 보드리야르 / 장 누벨 
펴낸 곳 : 동문선(2003)

 

바벨탑은 과연 실존했을까? 고고학자들은 신화 속 바벨탑을 메소포타미아 지역 바빌로니아의 지구라트(zigurat)로 추정한다. 폭과 높이가 100m에 가까웠고 옥상정원까지 갖춘 크나큰 건조물이었다. 이스라엘 왕국을 함락시킨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로니아는 높은 경제력을 갖춘 국제 교역지였다. 당연히 여러 언어를 쓰는 이방인들의 왕래가 잦았다. 피정복민으로 끌려와 바빌로니아의 폭압적 통치를 받던 유태인들에게는 부조리한 풍경으로서 이질감과 위압감을 주었을 법하다. 

도시 건조물은 도시의 기본 요소이다. 신이 만든 자연과 비교되는 인간 문명의 결집체인 것이다. 주목적 외에 도시기반시설, 가족제도, 공동체의 특성, 도시구조, 지역경제 등의 영향을 폭넓게 받는다. 즉, 건조물은 당대의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토대로 한다. 그러므로 시대적 산물이자 사회적 구축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서구에서 건조물은 오랜 기간 인문·사회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때 건조물(architecture)은 집이나 빌딩과 같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일정 공간에 여러 재료를 합리적인 체계성을 갖고 쌓아올린 하나의 구축물로써, 보편적인 질서와 창의적인 미학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칸트가 사유의 능력을 ‘이성의 건축술’이라 한 것과, 가라타니 고진이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그가 가진 사유의 세계를 건조물에 빗대어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건축과 철학>은 건축가 장 누벨과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대담집이다. 보드리야르는 현대 문화와 예술전반에 대해 사회학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평가했고, 장 누벨은 현대 건축과 도시로 좀 더 초점을 좁히며 건축가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물론 이 책에서의 건축은 미학적·조형적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라, 현대의 문화적 생산물이자 사회를 보여주는 특이한 존재로서의 건조물이며 그것이 펼쳐 보이는 세계이다. 

보드리야르는 기본적으로 현대의 건조물을 ‘허구의 구축’으로 정의한다. 현대인이 믿는 여러 허구의 세계를 공간적·물질적으로 구축해 주는 까닭이다. 대표 사례로 미국의 디즈니랜드가 있다. 미키마우스는 분명히 허구의 존재이지만 디즈니랜드는 엄연히 실재하는 장소로 미국에 있다. 그렇다면 가상의 존재인 미키마우스와 디즈니랜드가 상품화되어 곳곳에서 다양한 이미지로 실재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현대 사회가 상징화되고 이미지화된 세계, 가상현실일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에게 현대의 건조물은 이미 설계자의 의도와 통제를 벗어났고, 그것의 집합체인 메트로폴리스는 거대한 스펙터클로 받아들여짐을 알 수 있다. 

<건축과 철학>에는 보드리야르가 파고들었던 특이성, 가상성, 유혹, 사라짐의 미학, 유토피아 등의 개념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의 부제인 ‘특이한 대상’에서 알 수 있듯이, ‘특이성’개념을 많이 볼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현대 건조물의 특징을 기이함 혹은 특이성(singularity)으로 정의했다. 이때 그의 특이성은 보편적이거나 중립적이고 국제주의적이며 전지구적인 것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좀 더 상세히 본다면, 구조 및 형태와 같은 외형적 특이성과 전통 및 맥락과의 단절로 대표되는 내용적 특이성을 포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그는 퐁피두센터(1977), 구겐하임 미술관 등을 들었다. 


보드리야르는 퐁피두센터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괴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특이성을 가진 형태”라 비평했다. ⓒ남윤승(namnar)

미래주의, 구성주의에 영향 받은 퐁피두센터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괴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특이성을 가진 형태”라고 주장하며, 퐁피두센터의 특이성을 예찬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은 기존의 건조물적 형태나 구조적 특성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의 특이성 개념은 대지에 내재된 역사성과 같은 기존 권위를 무화시킨다는 점에서 해체주의와도 연결된다. 이와 같은 보드리야르의 특이성 개념은 유럽 사상에서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를 통해 그 맥락이 이어져온 것이자 슬라보예 지젝의 현대정신분석 담론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특이성을 렌즈로 한 보드리야르의 관점은 일정한 보편성을 확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 누벨 또한 그의 건축의 기본 개념으로 ‘특이성’을 내세웠다. 그러한 입장에서 “20여 년 전부터 나는 대상을 구성하는 유형론적·이데올로기적·독단적인 모든 여건들과 상반되는, 대상의 ‘초특성(hyperspecificite)이라는 개념을 옹호하고 있습니다(113쪽).”라고 밝혔다. 물론 이러한 장 누벨의 건축관이 단순히 타 건축가와 차별화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내 작품은 항상 주어진 상황의 논리적 결과이다(1996)”라는 말과 함께, 그가 관찰자로써 바라보는 건축물의 외피와 사용자로써 인식하는 내부공간의 체험을 재료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살려 타 건축가와 다른 독특한 디자인을 발표해 온 이력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의외로 장 누벨은 보드리야르 못지 않게 ‘가상성’이라는 용어를 많이 썼다. “나는 자신을 마술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공간, 보이는 것을 상상으로 연장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려고 애씁니다. 유혹의 이 공간, 즉 환상이라는 이 가상 공간은 명확한 전략과, 자주 그 자체가 방향 전환이 되는 전략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가상성’이 그의 주된 디자인 언어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내가 스스로 실상과 허상을 뒤섞어 놓은 카르티에 재단 건물 같은 어떤 건물에서는, 이는 동일한 평면에서 내가 허상을 보는지 실상을 보는지 결코 모른다는 것을 뜻합니다”라고 하여 실제 그의 작품에서 ‘가상성’이 많이 활용되었음을 밝혔다. 결국 그가 주로 사용하는 빛, 이미지, 텍스트 프린트와 영화의 방식을 차용한 이미지 영사 등이 대부분 가상성 구현을 위한 전략으로 평가된다. 

건축과 철학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따라서 둘의 대담에서는 상당한 생각의 차이가 드러났고, 어떤 부분에서는 공통된 관점이 확인되기도 했다. 특히 보드리야르의 ‘특이성’ 과 ‘가상성’ 개념은 이미 장 누벨이 실재의 공간으로 재현코자 한 디자인 철학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둘의 대화는 공학과 인문학이 서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주고 받는 협력관계임을 잘 보여주었다. 
_ 오정학 과장  ·  경기도시공사 사업기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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