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스마트도시 – 푸코의 감시와 처벌 2

진양교 논설위원(㈜CA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
라펜트l진양교 대표l기사입력2019-06-25
스마트도시 – 푸코의 감시와 처벌 2




_진양교(㈜CA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
홍익대 건축도시대학원 조경설계전공 교수)



지난 번 얘기를 좀 더 계속해보자. 빅브라더(Big Brother)의 존재는 아마도 조지 오웰 (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서 처음 소개되었을 것이다. 소설 속,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꿈과 무의식까지 통제하는 초(超)전체주의의 머리이다. 빅브라더는 사회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회에 질서를 제공하지만 혼돈은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질서와 혼돈, 안전과 자유는 서로 등가(等價)인 동시에 상반되는 어휘이다. 오웰의 소설은―아마 원래 의도는 스탈린이 지배하던 소련의 공산주의나 2차 대전을 촉발한 파시즘을 비판하려 한 것이겠지만―누구라도 빅브라더의 통제된 사회가 잘못된 것이며, 당연히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처럼 저항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란 생각을 갖게 한다.

오웰이 묘사한 빅브라더 사회와 ‘감시와 처벌’에 대한 푸코의 걱정이 투사된 근, 현대사회와의 다른 점은 오웰의 사회는 빅브라더에 의한 통제가 노골적이고 의도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그런 통제가 강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푸코가 묘사한 근, 현대의 현실사회는 통제를 강제하지 않으며, 확실한 보상 때문에 사회구성원인 우리 자신이 그런 통제를 자율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매트릭스]에서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과 불편함보다 차라리 다시 매트릭스의 기계가 관장하는 피딩케이지로 돌아가려는 배신자 사이퍼─배우이름은 모르겠다─의 말도 안 되는 선택처럼 말이다.

때문에 푸코의 사회는 오웰의 사회보다 교묘하고 은근하며, 어느 면에서는 교활하다고 볼 수 있다. 오웰의 사회는 파시즘이나 코뮤니즘의 사회처럼 감시나 통제가 선명하고 따라서 부정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반면, 푸코의 사회는 우리가 우리 의지로 선택한 사회이기 때문에 뭔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부정할 수가 없다. 사실 푸코는 근현대사회에서 파놉티콘의 공간체계가 감옥에서 학교로, 병원으로, 그리고 공장으로 확대되어 결국 사회전반의 기저를 이루게 되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그런데 푸코가 우려한 것과는 달리 현대사회에서 파놉티콘과 같은 감시의 공간적 체계가 그대로 사회전반에 답습되지는 않았다. 학교는 학교 나름대로, 병원은 병원 나름대로 권력주체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전달하고 학습시키는 수동적 자세와는 달리 자유로운 상태를 어느 정도 유지함으로써 평형을 이루어 냈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해서라도 학교의 리더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학생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는 게 현대사회의 학교들이다.

지금의 현대사회는 푸코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푸코 자신도 말년에 감시와 처벌을 쓸 당시 자신의 관점이 지나치게 단순했다고 후회했을 정도였다. 최근의 현대사회에서 푸코가 걱정한 감시의 강제적 공간적 장치인 파놉티콘은 사라졌지만―혹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데올로기 전달의 장치가 아니고 다른 이유에서 만들어진―공간을 초월한 다른 형태의 관찰 또는 감시가 가능해질 줄은 푸코조차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위성과 휴대폰, CCTV의 발전은 굳이 파놉티콘 같은 공간적 장치 없이도 충분히 어디에서나 또 언제나 기술을 소유한 주체가 다른 사람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게다가 그 관찰의 장치들은 파놉티콘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큰 범위로 상상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관찰’은, 지난번에 얘기한대로, 그것이 일방적이건 아니건 간에, 우리의 편리함을 보상으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에 우리가 선택하고 양해한 것들이다. 만약 푸코의 주장대로 일방적인 관찰은 감시이고 일방적인 감시는 감금에 다름없다면, 파놉티콘같은 물리적이며 가시적인 장치가 없더라도 현대사회에서 푸코의 감시와 감금모델은 아직 유효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다. 요약한다면 현대의 우리는 오웰의 사회와는 거리를 둘 수 있어도 푸코의 사회와는 어쩔 수 없이 더불어 살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어떨까. 이정도면 오늘 비 내리는 아침에 잘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우울한 얘기인지. 그런데 이 우울한 얘기는 이것으로 끝일까. 아니다. 반전이 아직 남아있다.
_ 진양교 대표  ·  CA조경기술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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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yk@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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