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락원’ 명승으로서의 가치, 객관적 평가 필요

문화재청, 별서정원 21건 전수조사 실시할 것
라펜트l전지은 기자l기사입력2019-08-25



문화재청은 최근 논란인 명승 ‘성락원’에 대해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그외 별서정원 21건에 대해서 전수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김영주 국회의원은 ‘성락원 명승지정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를 지난 23일(금)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했다. 명승 제35호 성락원은 서울 성북구에 있는 문화재로 1992년 12월 23일 사적으로 지정됐으며, 2008년 1월 8일 사적에서 명승으로 재분류 지정됐다.


성락원은 조선 순조 때 황지사의 별장으로 조성됐으며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으로 알려져 왔으나 황지사와 심상응은 실존인물이 아니며, 정원을 조영하고 경영을 했다는 근거가 부재하다는 것이 알려지며 논란이 됐다.


쟁점이 된 사안은 문화재적 가치가 미흡하다는 조사결과에도 문화재로 지정한 점과 성락원이 실재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점이다.


즉, 성락원은 1983년 6월 서울시, 1992년 3월 문화재청의 1차 조사시 문화재적 가치가 미흡하다는 조사자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1992년 12월 사적으로 지정됐다는 점이 지적됐다.


당시 서울시의 경우 조사자는 ▲본체의 원형이 거의 변형, 개조되어 있음 ▲정자 ‘송석정’이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적 방식 결여 ▲바위글씨와 추사 김정희의 역사적 연계성 미확인 등으로 지방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미흡하다는 의견이었으며, 문화재청 조사자는 각자가 있는 영벽지 주변은 문화재로서 보존가지가 있으나 다른 부분은 가치를 상실했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성락원 명칭에도 문제가 있었다. 조선시대 문헌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이름이며 1961년 현대식 종합공원 시범 관광지역 조성 추진과정에서 명명된 것으로, 1992년 지정당시 소유자가 명명한 명칭으로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점을 비판받았다. 성락원 일대는 1921년 조선총독부 발행 지형도에 ‘이강공별저’로 표기돼있고, 이강공의 5녀 이해경 선생의 저서에는 ‘이강공별저’, ‘성북동별장’으로 불렸다고 증언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성락원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소유자의 증언과 현대 기록에만 의존해 국가지정문화재가 됐다. 고증이 미흡했다는 점을 사과드린다”며 “과오를 반성하며 원점으로 돌아가 성락원의 명승지위를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 재검토할 것이며 명승으로 지정된 나머지 별서정원 21건에 대해서도 전수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김영주 국회의원



정재숙 문화재청장


새로운 근거, 내관 황윤명의 별장


이원호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성락원이 조선 고종 당시 내관인 황윤명이 1884년 이전부터 조성한 별서로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근거는 국립중앙도시관에 소장된 <춘파유고>에 수록된 시문의 내용이 성락원 영벽지 서측 바위글씨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수위소지’라는 시는 중국고사에 출전이 없는 고유 창작시라고 한다.


또한 고종의 총애를 받은 중인 오횡묵의 <총쇄록>에 황윤명 별서에 두 차례 방문한 정황이 남아있어 황윤명이 별서의 소유자라는 근거를 찾았다.


황윤명은 고종을 모신 호종내관으로 고종이 윤명(胤明), 윤명(允明), 수연(壽延) 3차례에 걸쳐 어사명을 내려주는 등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 시서화삼절로 불릴 만큼 학문과 서예, 그림에 뛰어났으며 육교시사(1870년대 후반 위항문인들의 모임)의 일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지난 6월, 7월 두 차례에 걸친 ‘문화재 가치 원점 재검토 전문가 자문회의’를 개최한 결과, 조선시대 정원의 구성요소와 당시 모습이 확인됐고, 성락원 일대가 황윤명이 별서를 조성하기 이전에도 경승지였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총쇄록>에 ‘아름다운 나무가 무더기로 빽빽하다’, ‘기이한 새와 꽃들’, ‘소나무 ’, ‘취병’, ‘정자’ 등 황윤명 별서의 경관에 대한 묘사가 기록돼있고, 황윤명의 <춘파유고>에는 ‘쌍괴당’, ‘쌍괴누옥’, ‘쌍괴실’, ‘삼가루’ 등 건조물과 석가산, 영벽지 등의 정원시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16.2.22.)에는 황윤명의 산정에 ‘추성각’이라는 정서각이 확인됐고, 1921년 조선총독부 발행 1/10,000 지형도에는 ‘이강공별저’로 표기돼 영벽지와 3동의 건조물, 노거수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성락원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1884년 이전인 것으로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김규복의 발문>에서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황윤명의 별서를 피난처로 사용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명성황후는 갑신정변 이후 측근인 김규복, 김규석, 황윤명에게 직접 유묵을 써서 <일편단충>을 나눠줬고, 그중에 김규복이 발문을 붙인 것이다. 발문을 보면 ‘액례 대여섯 명이 어가를 호위해 혜화문으로 나가 성북동 황윤명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중략) 태후, 왕비, 세자께서 벌써 도착해 계셨다’라는 것에 근거한다.


성락원에 있는 6기의 바위글씨도 또한 주요 논의사항으로, ‘추사체’인가 아닌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다. 이원호 학예연구사는 전문가 회의 결과 동시대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정원 조성 또는 정원조성 이전부터 오랜 기간 동안 개별적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밝히며, 영벽지 일원의 ‘장빙가’는 추사의 글씨로 추정되며 ‘쌍류동천’과 ‘영벽지’는 황윤명과 관련된 글씨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이에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 소장은 “‘장빙가’의 장빙의 유래는 확인할 수 없으며 황윤명의 ‘영벽지’를 중심으로 한 시 각자가 제일 마지막에 새겨진 것으로 본다. 장빙각은 그 이전, 쌍류동천은 더 이전으로 추정된다”며 “장빙가가 추사의 것으로 확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원호 학예연구사는 “성락원은 황윤명의 인물적 가치뿐만 아니라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로 사용됐으며, 이강公의 별저로도 사용되는 등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춘파유고>, <총쇄록>에 기록된 정원의 가치를 성락원 복원화사업(2008-2009)을 통해 회복하는 중이다. 1930년대 이후 나타난 성락원의 변화 또한 정원의 ‘순서적 진화단계’로 보는 게 타당하다”며 성북동 일원은 <동국여지승람>, <추재집>, <유북저동기> 등에 조선후기 도성 내 유람처로 각광받는 곳임이 확인되고, 황윤명의 춘파유고에도 경관을 주제로 읊은 시가 다수 수록돼있어 명승적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명승으로서의 가치는 갑론을박


이어진 토론회에서는 성락원이 명승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정기호 전 문화재위원은 문화재청 1차 조사시 각자가 있는 영벽지 주변부와 일부 신축건물, 조잡한 조경으로 표현된 잔디로 덮인 60-70년대 저택정원으로 구분되며, “전자는 문화재로서 보존가치가 있고, 후자는 가치를 상실했다는 내용이다. 2차 조사 보고서를 보면 문화재 가치에 따라 명확하게 갈라지며 시비를 가려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곳에 대해서 지정을 한 걸로 나온다”고 말했다.


문화재로 지정된 곳 중 훼손된 지역을 명승의 가치로 볼 수 있냐는 사안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별서정원의 특이성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 자연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인공적 자연인 해외의 정원과 달리 주변의 자연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별서정원의 특징이다. 권력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닌 문인들이 계류, 바위 등 특정 자연물에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지으며 더불어 왔다는 것”이라 설명하며, “성락원은 전통정원 요소가 없는 게 아니라 문인들의 정원이 갖춰야 할 문집 등의 근거들을 갖추고 있어 가치가 충분하다”고 피력했다. 아울러 다른 별서정원 또한 이러한 잣대로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 소장은 황윤명의 인물을 조명하며 역사적 사건보다도 문화적 차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내시가 본인의 책을 간행한다는 것은 특이한 점이며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적을 모은 <난운관법첩> 간행은 서예사적으로도 조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유적이 사대부 관련이라는 점에서 고종 내시 황윤명의 별서라는 점이 성락원이 가진 의미”라고 말했다.


반면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환관의 정원이나 명성황후의 피난처가 문화재라면 환관의 집단묘지인 이말산과 인근, 명성황후 퇴각로는 모두 문화재로 지정돼야 하나? 성락원은 20세기에 불타 없어졌고, 20세기 중반에 문화재 복원이 아닌 관광차원에서 개발했다. 그렇다면 용민 민속촌과 호암미술관 희원도 문화재여야 하는가?”라며 반박했다.


명성황후의 피난처라는 점에 대해서도 “<승정원일기>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북묘비>에 의하면 명성황후가 피한 곳은 ‘북묘’”라며 개인의 자료인 <일편단충>을 근거로 들고 있음을 비판했다. 유고집이기에 확대해석, 재편집의 가능성이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원호 학예연구사는 “고종과 명성황후와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고 추정되는 근거들이 있으며, 난리가 났을 때는 세자와 왕이 함께 움직이지는 않기도 하다”며 자료수집 중이라고 말했다. 좌장을 맡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도 “두 가지 기록이 있을 때 공문서를 우선시하는 것만은 아니”라며 확정적이지는 않기에 더욱 연구해야할 것이라 말했다.


함평우 소장은 “성락원의 명승 지정은 취소해야 하지만 70여년의 가꿈을 인정하고, 막대한 시민세금이 투입된 점을 감안해 ‘서울시기념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재 지정, 고증 명확하게 해야


한편 이날 토론에서는 명확하지 않은 고증에도 문화재로 지정한 점에 대해서 한 목소리로 비판했다.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는 “문화재 지정과정에서의 의혹은 철저하게 파헤쳐야 하고, 새롭게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는 정말로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지를 재평가를 해야 한다. 이런 사례는 많을 것이며, 최소한 문제제기가 된 문화재만이라도 제대로 검증하고 후속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추사체와 관련한 서로 다른 전문가들의 평가가 있는 사안이나 성락원의 명칭, 내시라는 신분의 흔적을 문화재로서의 가치로 인정할 것이냐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논의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영이 상명대 박사 또한 “명승지정 당시 조사과정의 검증이 철저했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명승지정 뿐만 아니라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도 전반적 제도, 시스템 등 구조적 문제를 들여다보고 국민의 세금이 무자비하게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주 의원은 “제대로된 검증에 기초해 성락원이 국가지정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확인해달라. 성락원 문제를 바로잡는데 있어 이해관계나 개인의 역사적 관점이 아닌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생각하며 풀어가주길 바란다. 문화재청이 전수조사를 한다고 했으니 국비를 낭비하지 않는 용역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글·사진 _ 전지은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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