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정원의 의미 – 브라이드헤드를 다시 방문하다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19-09-20
정원의 의미 – 브라이드헤드를 다시 방문하다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정원과 영화

“Bridehead Revisited(브라이드헤드를 다시 방문하다)”는 정원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1945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찰스 라이더라는 인물이 귀족인 친구의 영지, 브라이드헤드를 방문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상의 장소, 브라이드헤드는 17세기 영국 최고의 건축가이자 조경가였던 존 반부르(John Vanbrugh)가 설계한 하워드 성(Castle Howard)과 정원에서 촬영되었다. 17세기 영국식 정원을 대표하는 걸작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정원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하워드 성의 정원 외에도 영화 속에는 다양한 정원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정원은 단순한 배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정원은 이야기를 이끄는 또 다른 화자이며 배우이다.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를 때 즈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 찰스 라이더가 아니라 브라이드헤드라는 공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오히려 인간의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장소와 그 안에 담긴 정신을 드러내기 위한 해설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정원이라는 주제로 영화를 다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브라이드헤드 정원(Howard Castle Garden)의 풍경 


세바스찬의 정원

찰스가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한 첫날, 술에 취한 세바스찬은 그의 방을 실수로 침범한다. 사과하는 의미로 찰스를 사교 모임에 초대한 세바스찬은 동료들의 비아냥거림에도 담담하게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하는 그에게 매료된다. 어느 날 세바스찬은 찰스를 한적한 시냇가의 나무 아래로 찰스를 데리고 간다. 


세바스찬의 안식처


여기는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소중한 장소야. 내가 늙고, 추하고, 비참해졌을 때 돌아와서 낮잠을 자고 기억을 할 수 있는 장소지.

나른한 오후의 목가적 풍경은 세바스찬의 마음속 이상적 정원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그날 세바스찬은 가문의 영지인 브라이드헤드로 찰스를 데려간다. 첫 방문에서 영지의 규모에 감탄하며 가족에 관해 묻는 찰스에게 세바스찬은 대답을 회피한다. 여름에 다시 초대를 받아 세바스찬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찰스는 플라이트 가문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찰스는 왜 세바스찬이 가족들을 소개해주기를 꺼렸는지를 알게 된다. 독실한 카톨린 신자인 그의 어머니, 마치메인 부인(Lady Marchmain)은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동성애적 성향을 보이는 아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찰스에게 세바스찬이 절제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며 찰스는 그 역할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브라이드헤드의 아름다운 풍경은 두 남자의 우정과 사랑의 기억으로만 남을 수 없게 된다. 바로크풍의 정원에서 가족과 이야기하는 찰스를 혼자서 바라보는 세바스찬의 모습에서 파국의 전조가 드리운다.

동생 줄리아를 사랑하는 찰스에 대한 질투의 감정과 함께, 친구가 이제 어머니의 감시자가 되었다고 생각한 세바스찬의 실망감은 더욱 그를 일탈하게 만든다. 줄리아와 찰스의 관계를 허락할 수 없는 마치메인 부인은 찰스가 세바스찬의 일탈을 용인했다는 이유로 그를 브라이드헤드로부터 추방한다. 한참이 지난 후 부인은 찰스를 다시 찾아와 사라진 세바스찬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찰스는 모로코에서 알콜 중독으로 피폐해진 옛 친구를 찾아낸다. 녹음이 무성한 작은 요양원의 정원에서 찰스는 세바스찬에게 이렇게 끝내지 말라며 돌아올 것을 부탁한다. 세바스찬은 그 부탁을 정중히 거절한다.


세바스찬과 찰스가 다시 만나는 모로코의 정원


이게 지금 나의 삶이야. 나는 여기서 행복해. 찰스, 너를 브라이드헤드로 데리고 간 것이 내 잘못이야. 도망쳐. 멀리 도망쳐서 다시는 돌아보지마.

작은 오아시스와 같은 이슬람 풍의 정원은 둘이 브라이드헤드로 떠나기 직전 피크닉을 즐기던 냇가의 모습과 중첩이 된다. 마치 예언이 실현되듯 세바스찬이 늙고, 추하고, 비참해졌을 때 그가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브라이드헤드의 정원이 아니라 작은 나무 몇 그루와 물이 있는 소박한 정원이었다. 평생 그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브라이드헤드부터 도망치려 애썼던 세바스찬은 긴 고통의 여정 끝에 그가 소망했던 모든 것을 버린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쉴 수 있는 작은 정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마치메인 경의 정원

세바스찬의 아버지이자 플라이트 가문의 주인인 마치메인 경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개종까지 했지만 결국 신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아내를 버리고 베니스에 남아 브라이드헤드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바스찬과 줄리아는 아버지를 만나러 베니스를 방문하며 찰스와 동행한다. 아버지는 브라이드헤드의 정원과 대비가 되는 작은 도심 속의 정원에서 아들과 딸을 맞이한다. 브라이드헤드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아들과 달리 마치메인 경은 그만의 작은 정원에서 안식을 찾은 듯 보인다.


마치메인 경의 베니스 정원

하지만 죽음이 임박하여 마치메인 경은 그가 거부했던 신에 대한 믿음과 귀족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브라이드헤드로 돌아온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한 안식을 맞이해야 할 순간에 그는 평생 도망쳤던 정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찰스는 죽음의 목전에서만은 강요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마치메인 경을 도와주려 한다. 하지만 결국 가족들의 의지에 따라 마치메인 경은 가톨릭의 교리에 따라 임종을 맞이한다. 믿음의 삶과 세속적 행복의 간격을 극복하지 못했던 세바스찬은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브라이드헤드에서 온전히 벗어났다. 마치메인 경은 베니스의 작은 정원에서 자신의 세속적인 행복을 찾았지만, 마지막에는 운명처럼 다시 브라이드헤드의 기독교적인 이상향으로 돌아간다. 영화에서 그의 죽음은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브라이드헤드 정원의 숭고한 이미지와 교차된다.


마치메인 후작 부인의 정원

마치메인 경이 떠난 이후 브라이드헤드의 실질적 주인은 마치메인 부인이 된다. 브라이드헤드의 정원은 귀족적 품위와 흔들림 없는 신에 대한 믿음을 지닌 마치메인 부인의 공간적 자아이다. 마치메인 부인은 브라이드헤드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무신론자인 찰스에게 물어본다. 신앙이 없다면 도대체 현세를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찰스는 당신처럼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부인은 다시 물어본다. 믿음이 없다면 삶의 목적이 무엇이 될 수 있냐고. 찰스는 잠시 생각을 한 뒤에 대답한다. 내가 삶을 돌아봤을 때 매순간 내가 행복했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에 부인은 단호히 현세적 행복은 무의미하며 오로지 내세의 행복만이 의미가 있다고 대답한다. 그녀에게 신을 향한 믿음과 내세의 행복은 브라이드헤드의 정원과 같다. 신앙과 내세는 언제나 그곳에 고귀하게 있으며 일탈 후에라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낙원이다. 찰스에게 삶과 행복은 끊임없이 작은 정원을 찾아가며 만들어가야 하는 그런 것이다. 그 낙원은 화려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때로는 고생스럽고, 초라할지도 모르며, 쉽게 사라질지도 모를 하찮은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을 시험이라도 하듯이 신은 그녀에게 현세의 행복을 주지 않는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와 신앙을 함께 저버렸으며, 세바스찬은 성경의 돌아온 탕자처럼 다시 그녀와 신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장 충실했던 큰 아들 브라이디(Bridey)은 이혼녀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 교리는 물론 상속권마저 포기하며, 딸 줄리아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살아가지만 결국 거짓 신앙을 가진 남편을 만나 불행해진다. 마치메인 부인에게 단 한 번도 행복을 주지 못한 브라이헤드 정원의 아름다움은 마치 내세의 낙원처럼 영원불멸하게 남아있을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녀의 현세와 내세의 행복과 불행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으로.


브라이드헤드의 바로크 정원의 전경

   
줄리아의 정원

줄리아에게 브라이드헤드의 정원은 동경의 대상이며 동시에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다. 그녀는 브라이드헤드를 지배하는 어머니의 뜻에 따르며 살아가지만, 아들이 아니어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열등감으로 고통 받는다. 아무리 자신을 브라이드헤드와 동화시키려 노력해도 브라이드헤드는 상속권을 지닌 오빠들의 낙원일 수밖에 없다. 찰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결국 어머니의 뜻에 따라 무신론자인 찰스 대신 가톨릭 신자인 유력가문의 약혼자와 결혼을 한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던 줄리아는 후일 찰스를 다시 만나 종교적 신념을 거스르고 이혼을 결심한다. 찰스와 남편의 대화를 엿듣게 된 줄리아는 남편이 단지 결혼을 위해 개종을 했을 뿐 거짓 신앙으로 살아왔으며 자신을 정치적 도구로 여겨왔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까지의 삶에 심한 회의를 느낀다. 또한, 찰스가 자신의 이혼 조건으로 그림을 남편에게 주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한다. 그녀를 평생 옭아매던 이상향 브라이드헤드를 떠나기로 한 결심조차도 결국 자신의 결정이 아니라 또 다른 남자들의 의지에 따른 결정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후 그녀는 찰스에게 그를 따라 브라이드헤드를 떠나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살아가겠다고 선언한다. 항상 타인에 의지에 따라, 타인의 그늘에서 살아온 줄리아는 처음으로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이상향을 선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플라이트 집안의 모든 남성들은 상속권을 잃고 줄리아가 합법적인 브라이드헤드 정원의 합법적 상속인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유일하게 현세의 행복을 줄 수 있는 찰스가 존재하지 않는 브라이드헤드의 아름다움이 줄리아가 스스로 선택한 구속이 될지 신을 향한 안식이 될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줄리아의 약혼식이 있던 밤의 브라이드헤드


정원이 없는 자의 정원

영화의 주인공 찰스는 중산층의 평범한 평민 출신이다. 그는 홀아버지와 함께 전형적인 런던의 아파트에서 산다. 그의 집에는 정원이 없다. 정원이 없는 찰스는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무신론자이다. 찰스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진 귀족 가문의 세바스찬과 줄리아에게 매료되듯이, 브라이헤드 성과 정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브라이헤드의 정원은 신의 낙원을 상징하며 그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신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 신앙이 없는 찰스는 브라이헤드 정원에 속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실 찰스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브라이헤드의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정원을 갖지 못한 자이기 때문에 신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정원을 갖지 못한 자의 숙명이다. 이야기에서 찰스는 한 번도 무신론자로서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세바스찬의 가톨릭 예법을 흉내 내며, 무신론자임을 확인하려는 마치메인 부인의 질문에 명확한 답을 회피한다. 가톨릭 예배에 참석하라는 플라이트 가족의 요청도 딱히 거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무신론자의 위치를 계속 확인시켜주고 강화하는 이들은 정원을 가진 자들이며 신을 믿는 자들인 플라이트 가문의 사람들이다.

마지막에 찰스는 줄리아에게 고백을 한다. 어쩌면 자신은 브라이드헤드의 일부가 되고 싶어서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찰스는 정원을 가진 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정원을 갖고자 노력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무신론자로 남는다. 이는 강한 신념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을 믿는다 하더라도 그에게 정원은 주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가 가톨릭 신자였다 하더라도 줄리아와의 결혼을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원을 갖지 못한 자이었기 때문이다. 화가를 꿈꾸는 찰스는 브라이드헤드에서 정원을 그린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재현으로서의 정원일 뿐이다. 브라이드헤드 정원에서 추방된 이후 그는 자신의 정원을 창조한다. 찰스가 유명해진 후 연 전시회를 가득 채운 것은 야생의 밀림을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가 찾은 이상향은 인간이 신의 뜻을 해석해 만들어낸 제3의 자연인 브라이드헤드 정원이 아니라, 신이 직접 창조한 제1의 자연인 야생의 에덴이었다. 그러나 그의 에덴 역시 재현으로서의 이미지였다.


찰스의 밀림 그림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장교가 된 찰스는 다시는 야전사령부로 전용된 브라이드헤드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영원할 것 같던 브라이드헤드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라버린 분수에는 잡동사니들만이 쌓여있다. 한 병사가 쇠락한 정원을 보고 말한다. “우리는 그저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거죠.” 마치메인 부인이 현세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신의 가치는 사라지고, 결국 신이 없는 시대가 도래 했다. 찰스는 가족 예배당에서 불이 켜져 있는 것 발견하고 불을 끄려다, 잠시 망설인 뒤 그대로 켜둔 채로 다시 햇빛 가득한 정원으로 나간다. 평론가들은 이를 황폐해진 시대에 정신적 가치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이제 영원한 신의 이상향에 대한 하나의 답을 주던 브라이드헤드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신이 없는 시대에도 신의 정원인 브라이드헤드는 여전히 하나의 안식이 된다. 이제는 선택해야 할 수많은 안식 중 하나로써 말이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브라이드헤드 정원


영화의 마지막 장면, 브라이드헤드 정원으로 나가는 찰스


정원의 의미

정원이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정원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막상 정원의 의미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정원이 삶의 일부였던 적이 없던 우리에게 아직 정원은 낯선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정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쁜 사진인가? 관광자원인가? 조경가들의 실험적 무대인가? 취미인가? 문화인가? 아니면 국가의 정책인가? 정원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선 이상이며, 문화이며, 정신의 자기반영일 수도 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아직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글·사진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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