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어휘와 사유의 깊이

성종상 논설위원(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원장)
라펜트l성종상 교수l기사입력2019-10-17
어휘와 사유의 깊이



_성종상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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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언어와 관련된 공식 통계 사이트인 에스놀로그(Ethnologue, http://www.ethnologue.com)에 의하면 지구상에는 대략 7천여 개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5천만 명 이상이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25개에 불과한데, 6개국 7700여 만 명이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는 15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60여 종족이 살고 있는 아프리카 가나의 경우 지역 방언까지 합치면 언어가 수백 개에 달하다, 인도에는 3300여 개의 언어가 존재하며 헌법에서 인정하는 공식 언어만 18개나 된다고 하니 국가적인 소통조차 염려스러운 지경이 아닌지 모르겠다. 100년 이내에 전 세계 언어 중 절반 가까운 3000여 개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고 보면 언어라는 것이 문화 따라 생성소멸하는 것임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 언어는 문화적 산물이다. 같은 나라에서도 지역마다 언어가 다른 까닭은 문화가 그만큼 다른 탓이다. 그러니 말에는 각자 고유의 문화와 사고방식이 깊이 깔려 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어휘이지만 다른 언어권에서는 유사한 어휘를 찾아보기 어려운 까닭이 거기에 있다. 예로 ‘억울하다’라거나 ‘답답하다’라는 우리말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영어 단어는 쉽게 찾기가 어렵다. 반복되거나 가중된 스트레스로 발생하는 일종의 분노증후군(Anger Syndrome)인 ‘홧병’은 한국인에게만 통용되는 문화적 산물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골뱅이’라고 하는 @를 다른 나라에서는 원숭이·강아지·새끼오리, 혹은 ‘야옹’이라고 하는 점에도 문화적 차이가 드러나 있다. 요는 지역마다 생각이나 사고방식이 다르고 그것은 곧 말과 단어의 차이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저명한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니스벳이 <생각의 지도>란 책을 쓴 것도 순전히 같은 맥락의 산물이다.(그 책에서는 동양인들이 ‘관계 지향적’이고 서양인들이 ‘주체 중심적’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한국인이 유독 관계 지향적이고 그것은 곧 생태지향적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정리한 바가 있다. 자세한 것은 라펜트 녹색시론 ‘한국인의 관계지향의식과 생태 2017-02-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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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통로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지배한다. 흔히 듣는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도 같은 뜻일 것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말, 곧 단어가 풍부하면 그만큼 생각도 풍부해지고 깊어진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낱말(단어, word)이라는 것이 어떤 뜻이나 생각, 혹은 대상을 특정하는 것이라고 보면 낱말이 풍부하다는 것은 곧 뜻이나 생각, 대상이 풍부하다는 것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문화적인 특색이 잘 살아 있다는 셈이고, 나아가 다양성이나 깊이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슷한 차원에서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말로 그 존재의 속성을 읽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사하는 언어로 우리는 그 사람의 생각의 깊이는 물론 품격까지도 짐작해 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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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쉽게 듣고 사용했던 단어로 ‘회치’라는 말이 있었다. 철자나 뜻을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으나 대략 꽃 피는 봄날이면 동네 여인들이 잔뜩 예쁘게 차려입고 함께 나가 놀던 걸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그 말에는 당시만 해도 집밖 나들이가 손쉽지 않았던 여성들의 봄나들이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문화가 깔려 있는 셈이다. 그런 말이 통용되고 생활로 받아 들여졌다는 사실 이면에는 자연 감상을 즐기고 중시하던 우리 고유의 생태미학적 사고가 깔려있지 않은가 한다. ‘소경’이란 맹인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소’란 만두소에서 보듯 ‘속’, ‘알맹이’, ‘마음’을 뜻하고, ‘경’은 ‘겨냥’, ‘겨누어 본다’는 뜻이다. 그러니 ‘소경’이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이’를 말한다. 얼마나 시적이고 근사한 말인가? 그런데도 현대 한국어 사전에는 소경을 ‘시각 장애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쩌다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어의 전도가 생긴 것일까? 모르긴 해도 우리가 이 말의 가치를 잘 몰랐거나 잘 못 사용한 데에 그 까닭이 있지 않을까 싶다. 사정이 이러니 ‘소경’과 관련된 풍부하고도 다양한 용례는 우리 일상에서 사라진지 오래이다. 예로 자신의 실수보다는 애먼 남 탓을 할 때 쓰는 ‘소경이 개천 나무라듯’이란 말이나, 무능 또는 무식한 이가 우연히 뭔가를 맞춘 경우를 말하거나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경우를 비꼬아 말하는 ‘소경 문고리 잡듯’이란 등의 표현들이 그것이다. 수년 전 초중학교 교과서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우리말이 한자어나 외래어로 바뀌어 사라지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쯤 되면 멸종위기종으로 관심을 받아야 할 대상이 식물이나 동물이 아니라 우리말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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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어증(貧語症), 즉 어휘력 부족은 말하기나 글쓰기에 있어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 듣는 이나 읽는 이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해나 소통 부족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전문분야에 있어서 어휘의 결핍은 가장 기초적인 차원으로서 정확한 개념 정립부터 어렵게 만든다. 학문의 전 분야를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다시피 한 우리나라는 각 분야의 기초 용어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당장에 우리가 늘 사용하는 ‘조경’이나 ‘정원’이란 용어만 해도 단어의 적합성이나 함의 등에서 여전히 이견이 분분한 듯하다. 정원에 한정시켜서 봐도 ‘이시구미(石組)’, ‘지와리(地割)’ 등의 조성기법과 관련된 용어에서부터, ‘챠니와, 챠테에(茶庭)’, ‘야리미즈(遺水)’ 등과 같은 요소에 관한 용어, 그리고  ‘와비(侘び)’, ‘사비(寂び)’ 등과 같은 추상적 미학의 용어에까지 다양하게 발달된 일본에 비해 우리네 정원에서 용어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 듯하다. 언어라는 것이 사고의 결정체라고 보면 그만큼 우리는 개념적 사고를 소홀히 해 온 것은 아닌가? 아마도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근래로만 한정시켜 보자면 우리가 전문 분야를 외부로부터 도입하면서 그 기초 정의나 개념을 우리 것화하는 데에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못한 채 다소 성급하게 들여온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어떤 것이든 그것의 근본 개념이나 기초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고서 우리 사정에 잘 맞도록 하려는 과정은 생략 내지 단축한 채 빨리 도입해서 당장의 의도에 맞게 사용하고 보자는 식이 많았다. 아무래도 남의 문명을 받아 들여 하루 속히 따라잡아야만 했던 우리의 근현대 과정에서는 기초적인 개념이나 원리보다는 당장에 써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같은 경향이 적어도 물질적인 문명에서는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현시점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왜?”나 “무엇?” 보다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중시한다는 지적도 같은 맥락에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어쩌다가 국가적인 관심사로까지 떠오른 학문분야 노벨상을 이웃 일본이 20여 차례 이상 받고 있는 오늘날까지 우리가 한 번도 제대로 받지 못한 데에는 그런 점들도 무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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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그 사회를 들여다보는 거울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우리말에 된소리와 센소리가 많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그만큼 살기가 힘들어지니 말부터 세지고 거칠어진 것일 터이다. 자살률이나 출산율 등의 여러 사회적 지표들이 여전히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와중에 스마트 도시, 4차 산업, 랜드스케입 어바니즘 등과 같은 모호한 용어들이 일반 대중이나 전문가를 가리지 않고서 무차별적으로 통용되는 우리 현실이다. 새로운 기술이나 외래어도 좋지만 먼저 우리 삶을 차분히 들여다보면서 ‘뭐가, 과연 왜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 삶에 어떻게 도입,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등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뭔가를 잘 따져보고, 그에 맞는 적절한 개념과 용어부터 정확하게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수단이나 방법 이전에 근본적인 목적이나 필요부터 생각하는 사람,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멋지고 좋고 선한 생각을 잘 하는 전문가가 되기…. 과연 이걸 우리가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 아무리 과학기술과 문명 조류가 초특급으로 변화하는 시대라고해도 말이다. 엊그제 한글날을 보내면서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세계 최고의 과학적 문자체계라고 칭송해 마지않은 한글의 현주소를 생각하며 언 듯 해본 하릴없는 넋두리이다.
_ 성종상 교수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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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su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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