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조경 내부의 적들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19-12-08
조경 내부의 적들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조경의 내부에는 두 적이 있다. 강박증자와 냉소주의자이다. 

강박증자들은 조경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들로써 조경의 가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신념을 가진 투사들이다. 이들은 세상이 조경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조경을 부당하게 무시하고 억압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언제나 화가 나 있다. 이들은 사석의 술자리에서도, 공적인 논의에서도 울분을 토하며 강박증적으로 “우리 조경이” 그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외친다.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여 조경의 가치를 허물어뜨리려는 건축과 토목을 향한 숭고한 성전(聖戰)을 선포하며, 악랄하지는 않지만, 조경에 무지한 도시를 비롯한 인접 분야에 조경의 참된 진리를 일깨워주려고 한다. 

강박증자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갓 조경에 입문한 학생에서부터 연배가 지극한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강박증자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대부분의 강박증자들은 해로워 보이지 않는다. 자아가 과잉되어 있어 피곤하기는 있지만, 그 열정과 추진력은 충분히 본받을만하다. 그러나 이들은 위험한 조경의 적이다. 정신분석가 부르스 핑크(Bruce Fink) 교수는 강박증자들은 “대상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며 타자의 욕망과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강박증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타자의 욕망과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조경만이 존재한다. 조경의 시선으로 본 욕망만이 세상의 가치를 규정한다. 그래서 타인의 욕망과 가치는 잘못된 것이라고 예단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강박증자의 병적인 자신감과 도덕의식이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알 수 없는 근원적인 공포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강박증자의 완벽주의적인 허세와 나르시시즘은 현실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 몰입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강박증자들이 건축과 토목을 타도해야 할 적으로 설정하는 이유는 조경에 대한 확고한 확신 때문이기보다는 자신과 동일시되는 조경의 가치를 지탱할 토대가 없다는 근원적 공포감 때문이다.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조경의 문제를 강력한 인접 분야의 탓으로 돌리고 안심한다.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 있지 않다고. 

예전에 한 강박증자가 한강에 선착장을 만들기 위한 건축 공모전의 소식을 듣고 분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왜 조경이 해결해야 할 수변 공원을 건축이 나서고 있냐고, 오히려 없애야 할 건축물을 만들어 경관을 망치느냐고 비판하며 모두의 봉기를 촉구했다. 그는 좋은 건축이 좋은 경관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자였다. 그리고 선착장이 놓이는 공원이 경합을 통해 뽑힌 최고의 조경가들이 설계를 한 지 10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아마 그는 파렴치한 건축가들이 낸 안의 내용은 읽어보지도 않았고, 그들의 설계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각 건축팀에는 조경가들이 참여하여 조경적 대안을 함께 제안했다는 사실도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박증자들은 신념이 결여된 광신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조경의 가장 큰 적이다. 거짓된 신앙을 전도하기 때문에. 신앙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며 이교도와의 무의미한 전쟁만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의 문제와 과오를 돌아보고 조금 더 발전된 내일의 나로 나아갈 기회를 박탈해버리기에.
 
냉소주의자들은 강박증자들과는 정반대의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타자의 강점과 자신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지적이며 논리적인 태도로 현실을 직시할 줄 안다.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굳이 집단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존중받고 인정받는다. 그래서 굳이 조경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을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오히려 존재감이 없는 조경이라는 분야에 속하여 득을 본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실력 없는 자들이 조경을 내세우며 패거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들은 조경의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오히려 건축가나 도시설계가, 환경전문가, 혹은 예술가로 인식되기를 원한다. 강박증자와 반대로 냉소주의자들은 타자의 욕망을 알아내려고 애쓴다. 그리고 스스로 타자의 욕망을 지속시키는 대상이 되기를 욕망한다. 이들은 건축이 원하는 조경, 도시가 원하는 조경, 예술이 원하는 조경, 과학이 원하는 조경을 욕망한다. 이런 점에서 냉소주의자들은 일종의 히스테리 환자들이다. 이들이 조경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기  때문에 해로운 것은 아니다. 조경의 정체성을 버리려는 냉소주의자들의 성향은 오히려 새로운 조경을 위한 건강한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이들이 해로운 이유는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냉소적 주체를 우리 사회의 가장 치명적인 적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가면이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허상임을 가장 먼저 깨달은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짓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거짓의 일부가 되어 위악에 동조한다.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어쩌라고. 촌스럽게 발버둥을 쳐 봤자 변화하는 것도 없을걸. 내가 굳이 왜?” 

이것이 냉소주의자의 태도이다. 이들은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해롭다. 행동하지 않는 냉소주의는 행동하려는 자의 의지도 꺾어버린다.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오히려 행동하는 자들이 실패하기를 바란다. 변화하려는 자들의 실패를 통해서만이 냉소주의자들은 스스로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냉소주의자들은 행동하지 않는 선각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조경의 가장 큰 적이다.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냉소주의자들의 최선은 현상의 유지이며 스스로가 퇴보할 때만이 자학적인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발전된 나의 모습을 충분히 그릴 수 있으면서 그 길로 나아갈 다리를 스스로 불태워버리기 때문에.
 
고백하건대, 강박증자와 냉소주의자에 대한 고발은 나에 대한 자아비판이다. 나는 강박증자였으며 냉소주의자였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모두 강박증자였을 수도 있으며 냉소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항상 그러하듯이 나의 최대의 적은 나 자신이다. 내부의 적들을 자양분으로 삼아 새로운 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여전히 나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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