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대재앙의 아이러니 : 흑사병, 런던 대화재 그리고 근대 도시의 태동

안승홍 논설위원(한경대 교수)
라펜트l안승홍 교수l기사입력2020-11-03
대재앙의 아이러니 : 흑사병, 런던 대화재 그리고 근대 도시의 태동




_안승홍(한경대 조경학과 교수)



코로나 이후 ‘봉쇄,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낯선 말들이 일상화되었다.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병이니 서로 간의 안전을 위해 예방 차원에서 공간적, 물리적 거리를 두어서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일상생활은 재택근무나 온라인 수업으로 이어가고 있으나 자유로운 활동이 제한되어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문제가 야기되고 경제 생태계가 붕괴되고 있다. 코로나 치료제가 개발되어 세계 경제 회복에 필요한 시간 예측은 점점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대면 접촉과 여행 제약이 장기화되면서 코로나 이전의 일상적 만남이나 여행에 대한 갈증은 공원 이용과 캠핑, 자전거 타기 등의 야외 비대면 활동을 증가하게 하였다. 반면 일부 항공사에서는 무착륙 관광비행 상품을 출시하여 새로운 관광 수요를 이끌고 악화된 경영난을 개선하는 혁신을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 시작한 코로나는 국가간 이동을 통해 확산되니 이 시국에 해외여행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여서 비행기 탑승과 상공에서 바다와 육지의 주요 목적지를 둘러보는 무착륙 비행 상품은 가뭄의 단비가 되어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비행기에 탑승하여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승객의 모습에서 문득 오래전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2004년 5월, 보름간의 영국, 프랑스 정원답사를 다녀왔다. 영국 런던의 첼시 플라워쇼를 필두로 큐가든, 시싱허스트 정원(Sissinghurst Castle Garden), 스투어헤드(Stourhead), 그레이트 딕스터 정원(Great Dixter House & Gardens) 등을 둘러보며 영국 정원의 낭만과 정취를 느꼈다. 쇼몽 가든페스티벌(Chaumont International Garden Festival)과 모네의 정원(Maison et Jardins de Monet), 라빌레뜨공원(Parc de Lavillette) 등 프랑스 대표 정원과 공원은 영국과는 사뭇 다른 서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정원박람회나 가든페스티벌, 가든쇼 라는 말이 지금처럼 알려지지 않은 때여서 답사 내내 호기심과 설렘이 가득 했었다.

한편 유럽의 도시에서 마주한 고풍스러운 석조건축물은 동양에서 온 이방인에게 아주 인상적이였다. 영화나 사진을 통해 본 유럽 도시의 역사와 이국적인 문화를 현장에서 바라보고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습과 비교하며 아쉬움을 느꼈다. 우리는 6․25 전쟁으로 국토의 80%가 파괴되어 도심에서 만나는 고건축물은 고궁이나 한옥촌에서나 제한적으로 볼 수 있어 도심 어디에서나 바라보는 유럽의 도시는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첼시 플라워쇼가 개최되는 런던의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에 매력을 느꼈지만 그 이면에는 흑사병과 런던 대화재의 뼈아픈 역사가 담겨 있었다.


흑사병, 런던 대역병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 Pestilence)이란 1345년에서 1840년까지 500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에서 연속된 페스트 대유행의 일부로서 14세기 유럽의 범유행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7,500만~2억 명으로 추정되는 목숨을 앗아간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재앙이며 당시 유럽 인구의 50%가 20여 년 동안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흑사병은 중국 원나라에서 시작되었는데 실크로드를 따라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 텐센산맥을 넘고 초원의 길을 따라 1343년경 흑해 북부 연안에 위치한 크림반도까지 옮겨가게 된다. 여기서 지중해를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는데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 쥐들에 기생한 동양쥐벼룩이 원인이었다.

흑사병의 병원균은 페스트균(Yersinia pestis) 박테리아로, 감염된 쥐의 혈액을 먹은 벼룩이 사람의 피를 빨면서 병을 옮겼다. 이 균에 감염된 사람은 6일간의 잠복기를 지나 흉부의 통증과 기침, 각혈, 호흡곤란, 고열을 호소하고 의식을 잃고 사망하였다. 내출혈로 인해 생기는 피부의 검은 반점 때문에 흑사병이라 하였다.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산발적으로 유행했다. 그중 런던 대역병(Great Plague of London)은 1665-1666년 잉글랜드 왕국에서 발생한 최후의 흑사병이다. 18개월 동안 런던 대역병으로 죽은 사람은 약 10만 명이며 런던 인구의 25%에 달했다. 런던 대역병은 300여 년 전의 흑사병과 비교하면 훨씬 적은 피해를 남겼지만, 400년간의 제2차례 대유행 중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최후의 대규모 전염병이여서 ‘대역병’이라 불린다.


런던 대화재와 대역병의 소멸

16세기 이후 런던의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나서 시민들은 난잡한 판잣집에 살았고 골목은 좁고 미로처럼 복잡한 중세풍이었다. 1666년 9월 02일 새벽, 인구 50만의 대도시였던 런던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왕실과 해군에 빵을 공급하던 빵 가게에서 불이 시작되었다. 당시 런던은 오랜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고, 바짝 마른 목조 주택들은 삽시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불길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 5일 동안 계속되었다. 군대가 화약으로 건물들을 철거하고 만든 방화로로 겨우 불길을 잡았다. 그러나 이미 런던에서 1만 3천여 채의 집과 90개의 교회가 사라졌다. 시민들의 80%가 길바닥에 나앉았다.

런던 대화재 이전에 몇 차례 큰 화재가 있었으며 마지막 화재가 1632년에 있었다. 당시 나무나 초가지붕은 금지되었으나 화재가 잦아서 값싼 자재들이 계속 사용되었다. 돌로 지은 석조 건축물은 주로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있었다.

대화재 이후 파괴된 런던 재건을 위해 존 이블린(John Evelyn), 로버트 훅(Robert Hooke), 발렌타인 나이트(Valentine Knight), 리처드 뉴코트(Richard Newcourt) 등이 세운 많은 계획이 쏟아졌다. 만약 이 재건 계획들 중 일부만이라도 계획대로 되었다면 런던은 파리와 같은 장엄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져 바로크의 성지가 되었을 것이다. 왕가와 런던시는 대규모 리모델링을 추진하려 했으나 토지주가 불분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런던을 떠나 노동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불에 탄 자신들의 건물이 빨리 제 위치에 복구되기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의 반대에 부딪혀 축소되고 말았다. 대신 낡은 도로와 화재의 안전, 위생 측면이 개선되었다. 거리는 넓어졌고 템즈강을 따라 들어선 부두와 강으로 가는 길을 막는 집들도 사라졌다. 새로운 공공건물들은 화재 이전 부지에 새로 지어졌고, 세인트폴 대성당 등 50개의 새 교회가 생겼다. 대화재로 목조 건축물이 금지되어 회색 석회석의 영국 바로크 건축양식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1665년 발생한 런던 대역병으로 수많은 목숨은 잃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화재는 대역병을 사라지게 했다. 화재가 페스트를 전염시키는 쥐와 벼룩을 없애 런던 시민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런던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던 흑사병은 더 이상 기록되지 않았다. 


파리 대개조사업과 근대 도시의 탄생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는 세느강과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여유로운 도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 파리의 모습은 비좁고 꼬불꼬불하며 오물과 악취로 가득 찬 더러운 도시였으며 인구 급증에 따라 환경은 점차 악화되어 갔다. 

산업혁명으로 농촌은 붕괴하고 농민들은 파리로 몰려들었다. 미로같은 좁은 길은 만성적인 교통 체증에 시달렸고 루브르궁과 같은 역사 건축물들은 무질서하게 난립한 조악한 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상․하수도는 물론 녹지가 없어 생활이 불편하고 심각한 위생 문제로 전염병이 창궐했다. 1832년 콜레라가 발생하여 인구 65만 명 중 2만여 명이 숨졌다. 1836년 인구 100만의 파리는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난개발에 몸살을 앓는 2류 도시였다. 

당시 파리보다 현대적이었던 런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나폴레옹 3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생각해 오던 파리의 도시구조 개혁을 진행했다. 주변의 반대에도 굳건하게 추진력을 발휘할 오스만 남작(Baron Haussmann)을 1853년 파리 지사에 임명했다. 오스만은 시내 비위생 구역을 정리하고 하수도 600㎞와 방사형 도로망, 철도 환상선(環狀線)을 깔았다. 오스만은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도시 기반시설부터 도로 체계, 녹지 조성, 미관 관리, 도시 행정에 이르는 도시의 건설과 운영과 관련하여 중세 도시 파리와는 전혀 다른 근대화된 파리를 창조했다.

오스만 남작이 대개조사업을 추진하며 세운 다섯 가지 원칙은 첫째, 50개의 대로를 건설하여 도시를 관통하는 교통 체계를 만들고 둘째, 루브르궁과 개선문, 콩코드 광장 같은 거대한 상징물을 가로축에 배치했다. 셋째, 파리시가 도로와 주요 관공서는 직접 개발하고 그 외 부지는 민간에 분양하여 간접개발하는 혼합방식을 취했다. 넷째, 상·하수도와 학교, 병원 등 인프라를 확보하고 다섯째, 녹지 공간 확보에 역점을 두었다.

계획 이전까지 파리에 녹지는 매우 드물었다. 런던의 거대한 공원에 매혹된 나폴레옹 3세는 공화정 때부터 기술자 알팡에게 명하여 파리 서부와 동부에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과 빈센즈 숲(Bois de Vincennes)을 만들었다. 또한 티에르가 구획한 구시가지 내에 뷔트-쇼몽 공원(Parc des Buttes-Chaumont)과 몽수리공원(Parc des Montsouris)이 조성되어 시민들은 시내에서 자연을 즐길 수 있었다. 오를레앙 왕가의 사유지였던 몽쇠공원(Parc des Monceau)은 개조사업에 따라 구획별로 분할한 후 가로수가 식재된 작은 광장과 대로가 들어섰다. 파리 시내에서는 주요 건물 500m 범위 안에 반드시 공원을 유치한다는 계획 아래 여의도 면적의 두 배가 넘는 대형 도심 숲과 28개의 중소규모 녹지를 조성했다. 따라서 파리에도 나폴레옹 3세가 부러워했던 런던의 공원에 버금가는 공원과 녹지가 생기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의 기본 개혁 방안에 더해진 오스만의 계획은 오늘의 파리를 만드는 발판이 되었으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대화재 등 정치 사회적 격변이 잇따르며 1870년 막 내렸다. 하지만 오스만의 대개조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과도한 공사비에 어려움과 불만이 많았지만 파리를 방문한 많은 외국인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파리의 도시계획은 벤치마킹되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19세기 중반에 건설된 오스만의 파리는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도시기능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흑사병과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에 이어 코로나19는 인류 역사상 3번째 팬데믹이다. 1년의 시간을 보내며 마땅한 치료약과 백신이 없어 인류는 고통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 하고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은 수렁의 늪을 헤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밀집한 도시는 코로나에 취약해 하나둘씩 떠나고 도시의 미래는 더 쓸쓸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 이후의 도시, 새로운 전염병에 대처하는 도시, 우리는 어떤 도시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 질문에 답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흑사병이 이어진 400년의 시간과 근대 도시의 탄생을 바라보며 미래세대에 물려줄 도시에 필요한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_ 안승홍 교수  ·  한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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