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우리들의 조경이야기

김아연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기사입력2018-02-06

 


우리들의 조경이야기


_김아연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마이너리티 리포트
1.
원고 독촉을 여러 번 받고도 글을 시작하지 못했다. 연말까지 해치워야할 일의 양이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허덕거린 탓도 있지만, 도무지 “우리들의 조경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 단어부터 막힌다. 내가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누군가를 “우리”라고 묶을 수 있는 공동의 가치는 무엇일까.

일상에서 “우리”는 정겨운 단어지만 “우리”가 다수 집단이 되면 권력을 가지게 되고 이 “다수”가 잘못 휘두른 권력은 “우리”에 속하지 못한 소수를 향한 폭력이 된다. 나는 주변에서 이러한 “우리”의 폭력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는 결국 “우리”라는 테두리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에 대한 무시와 배제가 폭력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어느 사회나 주류는 비주류를 만들고 중심은 주변을 만든다. 과연 “우리 조경계”는 어떠할까.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내가 내부자로서 느끼는 것보다 조경계를 훨씬 더 배타적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끊임없이 전공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 떠나는 학생들을 보게 된다. 학생들 “대다수”가 원하는 안정적인 진로로부터 관심과 적성이 벗어나 있는 학생들은 결국 겉돌다 보란 듯이 다른 분야로 진출한다. 업계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구조화된 일의 발주 방식과 배타적인 영역성은 이 중심부가 허락하는 자격이나 스펙을 갖지 않은 자들이 낄 수 없는 성역이 된다. 이 구조적인 문제가 누구의 잘못이며 어떻게 고쳐야하는 지를 여기서 다룰 수는 없으니 대신 이러한 질문에 집중해보자. “우리”들은 무엇을 공유하는 집단인가. 과연 조경계의 중심성이 무엇이기에 끊임없이 주변인들을 만들어내는가.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너무 좁게 설정하고 그 테두리에 성벽을 치고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은 아닌가. 성벽 밖, 혹은 변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다수의 “우리”들에게 의미가 없는 현상일까.


2.
위의 문제들은 잠시 덮어두고 이제는 지겨워질 만도 한 “4차 산업혁명”이 초래할 미래에 대해 언급하기로 하자. 인공지능을 포함한 전 방위적 디지털 기술혁명은 전문가라는 근대적 개념의 직업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게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최근 출판된 몇 개의 미래 예측 서적* 중 전문직의 미래와 관련한 내용을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공지능, IT기술의 폭발적인 발전과 더불어 지식의 공유 플랫폼이 확산되면서 현재의 전문가의 역할을 컴퓨터가 대체하거나 일반인들이 정보를 쉽게 습득하여 전문가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이 확대된다. 당연히 지금의 많은 전문직은 사라질 것이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지금보다 더욱 배타적인 방식으로 지식을 재생산할 것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자기 직업의 전통적 업무 방식에 깊이 매몰되어 있어 이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투쟁을 시도할 것이다. 지적 재산권과 특허, 정보의 유료화서비스, 면허체계 강화, 전문가(혹은 사람)만이 제공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과 이에 대한 보호 및 봉쇄, 이를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관철시키려는 정치적 노력이 강화될 것이다. 셋째,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에 대한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문제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일지라도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파급력은 생산적일 수도 파괴적일 수도 있다. 전문가는 과거에 비해 더욱 더 가치 판단에 필요한 철학적 능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 세 가지의 변화 양상은 직간접적으로 우리의 전문성을 정의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조경계는 과연 이러한 변화 속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리처드 서스킨드와 대니얼 서스킨드 지음, 위대선 옮김(2016) 『4차 산업혁명 시대 전문직의 미래』, 와이즈베리, 톰 니콜스 지음, 정혜윤 옮김(2017) 『전문가와 강적들』, 오르마, 매트 리들리 지음, 조현욱 옮김(2010) 『이성적 낙관주의자』, 김영사, 박영숙과 제롬 글렌 지음(2017) 『세계미래보고서 2055』, 비즈니스북스를 참조했으며, 물론 이 책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경향성을 가늠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었다.


3.
이제는 “우리” 분야의 문제를 들여다보자. 나는 조경 분야의 속성이 매우 “갑-의존적”이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국토 개발과 근대화라는 국가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조경은 국가라는 권위적인 클라이언트를 등에 업고 출현한 전문분야이다. 지속적으로 일거리를 제공하는 안정적인 갑의 존재는 조경 분야가 성장해온 중요한 동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호황은 경쟁의 필요성을 희석시킨다. 갑의존성은 세계에 대한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시각과 태도를 훈련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반성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데 우리의 DNA가 최적화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뜨는 일, 돈이 되는 일, 주어지는 일에 예민하지만 무언가를 미리 준비하고 기획하는 자발성은 부족하다. 우리의 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동안 큰 위기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보호된 환경에서만 살아온 생명체는 다양한 외부 교란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변화에 취약하다. 늘 먹이가 주어진다면 스스로 먹이를 구하러 나갈 필요가 없는 법이다. 우리는 스스로 선제적으로 일거리를 창출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데 공격적이지 못하다.

건설업인 조경은 가치중립적인가? 역설적으로 조경은 매우 가치의존적인 분야이다. 그러나 조경의 메인스트림에서 환경윤리와 사회적 가치에 대한 담론 혹은 논쟁을 찾아보기 어렵다. 4대강과 비무장지대, 도시재생 등 국토의 중요한 이슈들을 국가 권력이 프로젝트로 만들기 전에, 그 이슈가 정치적 관심사가 되기 전에 그 중요성을 사전에 인식하고 “먼저” 연구하고 생각을 축적하고 눈치 보지 않고 책임감 있게 발언해 온 전문가가 “우리” 안에 얼마나 많았던가.

미래에 전문직으로서의 조경은 사라질 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도 조경 역시 공유 지식과 오픈 플랫폼, 인공지능에 의해 전문가가 필요 없는 분야가 될지, 자연과 시간과 감성과 스토리와 창작을 통합적으로 다루는 고도로 숙련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야로 남을지에 대한 입장 정리를 못하고 있다. 그만큼 그 문제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고 깊이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생각들은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다. 우선 관성적으로 “우리”라고 집단화하기에는 조경분야가 내부적으로 공감하는 철학과 가치가 부족하다는 점, 아니 그 자체가 부족하다기 보다 그에 대한 뜨거운 논의와 차가운 성찰이 부족하다는 점, 이익집단으로서의 배타적인 영토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점, 전문가로서의 리더십은 세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통한 비전의 제시와 새로운 일거리의 창출에 있다는 점, 그리고 건강한 전문가 생태계 구축을 위해서는 주변부를 통해 중심을 재구축해야한다는 점 등이다.

“우리”라는 집단은 하나의 목소리를 낼 때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균질성을 통해 “우리”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오만과 독재를 만들어내고 타자들의 저항으로 인해 붕괴한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배워왔다. 건강한 생태계는 다양한 유전자를 교환하면서 종다양성을 높여간다. 이질적인 서식처가 만나는 주연부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의 다양성과 비판적 논쟁을 허할 때 비로소 건강한 조경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4.
내 주위를 둘러본다. 그저 영화가 좋아서 시작한 글쓰기를 드디어 책으로 낸 서영애, 출연한 게스트가 술을 사주고 싶게 만든다는, 가난하지만 그들만의 길을 가는 팟캐스트 [꽃길사이], 조경설계사무실의 경험을 토대로 설계는 내 길이 아니라는 중요한 판단 이후 식물과 일상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담아내는 일러스트레이터 조현진, 아무도 안 시켰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평생 연구 과제로 비무장지대를 쫓아다니는 염세주의자 이수학, 조경비평 공부로 다져진 펜 끝을 독립영화로 헤쳐 나가는 [모션]의 편집장 이형관,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영상을 만드는 유청오, 지치지도 않고 자연을 탐구하는 문지방 없는 열린 모임을 이끄는 김봉찬,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사람들과 같이 공원을 만들고 싶어 설계사무소를 뛰쳐나온 신근혜, 찍고 그리고 쓰고 놀면서 투박하게 공부하는 이대영과 그 일당들, 설계에서 지친 영혼을 시(詩)로 위로하는 문학청년 허대영, 수학 선생님 같은 냉정과 사진과 음악의 열정으로 풍경을 해석하는 주신하, 자발적인 연구와 기획을 통해 공공공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자하는 노동운동하던 건축가 조경민, 삽도에 들어가는 사람 캐릭터의 목도리 디자인에 몰두하는 만화 그리는 오형석, 그리고 온라인 매체의 폭격 속에 부도 위기에 맞서며 오늘도 한 단어 한 단어 엄중한 글쓰기를 통해 성찰과 사유라는 조경분야의 가장 약한 고리를 붙들고 있는 종이잡지 환경과 조경의 기자들, 그리고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세상의 풍경 속을 달리고 싶어 했던 이제는 세상을 떠난 이광빈. 이 중에는 내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한두 번 인사를 나눈 정도의 사람도 많다. 친분이 있다고 해도 나만의 색안경으로 들여다 본 아주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그들의 한 부분만을 멀리서 동경할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한테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 그런 일들을 그저 좋아해서 혹은 스스로 부여한 사명감으로 꾸역꾸역 자기만의 길을 가는 다소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 서비스의 대가를 지불하는 ‘갑’이 없는 일들, 그래서 내 상상력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일들, 또 그래서 어디 눈치 보지 않고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스스로 궁리하는 일들, 화려한 스타건축가나 클라이언트의 명성에 기대지 않는 일들, 이러한 변방의 작업들이 중심과 소통하는 일이 그리 어려울까? 이들 마이너리티(나의 이 표현이 불쾌할 지도 모르겠다, 부디 용서하시라)들의 작업의 핵심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스스로가 기획하는 일”이라는 자발성에 있다. 그들은 자기만의 소우주를 가진 자들이다.


5.
‘우리들의 조경이야기’라는 연재 코너 덕분에 2017년을 네 시간 정도밖에 남기지 않은 이 순간에 결국 자기반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해를 마감하는 괴롭지만 의미 있는 글쓰기를 하게 된 셈이다. 대학 교수로서의 나는 우리 분야의 중심을 구축하고 재생산해야하는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인으로서의 나는 중심의 무게와 권위로부터 끊임없이 튀어나가고 싶은 원심력의 욕망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 내가 속한 분야의 모순이 내 안에서 재생산되는 셈이다. 오늘 발언의 끝날은 결국 “우리”라는 단어로 피해가기 쉬운 “나”를 향해있다.

다양성과 마이너리티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는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 중심과 주변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는 자유로우면서도 동적인 교류 체계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구성원들이 스스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비판적 사고능력, 그리고 하나하나의 발언을 책임감 있게 행사하고 상충과 모순을 허락하는 열린 분위기와 끊임없는 자기 증식이 가능할 때, 자아와 타자, 중심과 주변, 마조리티(majority)와 마이너리티(minority)의 변증법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게 될 것이다.

새해에는 “우리”를 풍성하게 해줄 마이너리티에 주목하자. 혹은 우리 스스로 자발적 마이너리티가 되자. 그들의 자발성과 뚝심, 성찰과 용기를 통해 “우리”의 외연을 넓히고 내연을 심화할 수 있다면, 그래서 새로운 “우리”를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 조경계”는 아직 건강하다.

‘우리’라는 집단은 하나의 목소리를 낼 때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중간생략) 다양성과 비판적 논쟁을 허할 때 비로소 건강한 조경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글_김아연 · 서울시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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