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스마트도시 – 시놉티콘 Synopticon의 시대

진양교 논설위원(㈜CA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
라펜트l기사입력2019-08-29

 

스마트도시 – 시놉티콘 Synopticon의 시대



_진양교(㈜CA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
홍익대 건축도시대학원 조경설계전공 교수)



오웰의 사회와 푸코의 사회가 어느 면에서는―빅브라더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면에서는―맥락을 같이하고 또 어느 면에서는―빅브라더의 존재가 강제적인지 아닌지 하는 면에서는―달리한다는 이야기를 지난번에 했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오웰의 사회와는 거리를 둘 수 있어도, 바로 그 이성적 판단 때문에 푸코의 사회와는 거리를 두기 어렵다는 얘기도 했다. 오웰의 사회와는 달리, 푸코의 사회는 긍정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이지도 않아서 우리의 선택에 의해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도 했다.

오웰의 사회이건 푸코의 사회이건 이런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얘기들은 우리에게 썩 달가운 얘기들은 아니다. 현재나 미래의 우리 사회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빅브라더의 존재를 허용하고 그들의 감시 속에 우리가 살 수밖에 없다면 이건 사실상 매우 우울하고 비관적인 이야기다. 답답하고 심하면 숨이 조여 오는 느낌도 가질 수 있다. 여기서 다행스러운 것은 역사라는 것을 길게 보면 우리가 걱정했던 부분이 꼭 미래에 그대로 일어나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역사학자도 아니고 사회학자도 아닌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다소 뜬금없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의 경우와는 들어맞는 얘기들이다.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재앙은 오히려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상상할 수 없었던 곳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우리가 우려했던 것들은 대개 아예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더라도 일부만 또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안 믿어도 좋은데, 내 생각으로는 그동안 얘기되어온 수많은 종말의 예언 은 종말을 예언하기보다 종말의 위험성을 경고하여 대비하게 한 측면이 더 컸다.

에셜론의 국제적인 도감청통신망의 존재도 증명이 된 마당에, 푸코가 걱정한 파놉티콘이 위성과 휴대폰, CCTV등의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더욱 교묘하게 진화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쉽지 않다. 파놉티콘적 ‘일방적 관찰은 감시이고 감시가 지속되는 한 감금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논리라면 푸코의 말처럼 우리는 과학기술의 기치아래 감금되어 있는 게 맞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움직임을 곰곰이 뜯어보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관찰이 실제로는 한쪽의 일방적인 행위이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그러니까 쌍방 상호관찰의 복잡한 양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학자들은 그러한 현상을 쌍방감시, 즉 소수의 힘 있는 권력기관이 다수 시민을 감시하는 한편, 다수도 소수의 권력기관을 감시하는 현상, 즉, ‘시놉티콘Synopticon’의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시놉티콘은 서로 동시에 본다는 ‘Syn-Opticon’에서 유래한 의미에서 시사하듯 감시자와 피감시자가 서로를 감시하는 즉 상호적인 감시 관계가 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의 인터넷은 불특정 다수가 익명으로 어느 현상을 보거나 의견과 정보를 나눌 수 있는, 마치 어느 면에서는 옛날 아고라 같지만, 누가 모여 있고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무형의 공간이며 전혀 새로운 관계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의 발달, 활발한 시민운동, 블록체인같이 중앙 서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범 공간적인 수평 네트워크의 발달 등을 보면 현대사회에서 중앙 소수 권력자에 의한 파놉티콘적 일방적 감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권력기관도 다수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의사결정 하나하나도 다수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소수와 다수는 시놉티콘을 통해 서로 협의하고 절충한다.

만약 ‘상호관찰’의 시놉티콘이 건강하게 작동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필요한 만큼 관찰을 허락하되 그 관찰이 지나치지 않도록 역으로 ‘관찰당함’에 대한 관찰을 할 수 있다면 되는 것이다. 그 정도면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가 지켜지고 사회의 안정도 어느 정도 보장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될 수 있다. 물론 나 같은 경우 아직도 시놉티콘의 견제기능에 대해 회의적이긴 하지만, 어떤 때는 역관찰이 제법 잘 작동하고 있는 경우도 간혹 본다. 걱정했던 대로 일어나지 않고 걱정한 만큼은 보정되는 과정이 다행스럽고 그러한 과정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항상 눈과 귀를 열고 사회의 현상을 지켜보며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려하는 그들 때문에 잘못은 예방되거나 수정된다. 파놉티콘을 이겨내고 건강한 시놉티콘을 갖출 수 있다면 현대 사회의 스마트화는 칭찬받을 만할 것이다. 내 특유의 낙관론에 근거할 때, 우리의 스마트도시는 단연 위험 속에 있지만, 바로 그런 위험 때문에 서로를 견제하고 조심하며 거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막연한 우울함에서 이제 벗어나도 될 듯!
글_진양교 대표 · CA조경기술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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