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지와 주합루

하늘이 열리고 본격적으로 가을이 찾아왔다. 가을은 날이 좋아 사진기를 들고 어디든 나가고 싶은 계절이다.

우연한 기회에 조선의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숨어있는 창덕궁을 찾았다. 함께한 심우경 고려대 명예교수와 김흥년 문화재청 경복궁관리소 과장의 배려로 일반에 개방하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엿볼 수 있었다.

왕의 시선으로 본 창덕궁 후원은 어떤 모습일까?

창덕궁의 입구 돈화문. 휴일인 월요일에 방문해서 문이 닫혀있다.

진선문

인정문을 지나면 인정전이 위용을 뽐낸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드므(오른쪽 아래). 방화수를 담은용기로, 화마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화재예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희정당은 왕의 생활공간이었으나 왕의 편전이던 선정전이 비좁아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됐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정원을 만들었다. 후원은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공간이었지만 왕이 주관하는 여러 야외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왕은 후원에 곡식을 심고 길러 농사의 어려움을 체험하기도 했고, 왕비는 누에를 쳐서 양잠을 장려하기도 했다.

후원은 창덕궁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넓고, 가끔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로 깊다. 절경들은 골짜기마다 숨어있다. 그중 후원의 시작인 부용지와 주합루를 관람했다. 

부용지와 주합루는 휴식뿐만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이다. 300평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영화당과 사정비기각, 부용정, 주합루가 위치한다.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정조 원년(1776년)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로,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기관인 규장각,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수집 연구기관으로 설립됐다.

후원 가는 길

영화당이 슬며시 보이면 부용지에 거의 다달았다는 증거.

부용지와 주합루 전경

부용지의 원도

​행사를 위한 영화당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보물 제1763호인 부용정은 연못에 앞발을 담그고 있다. 창덕궁 후원에 조성된 열십자 모양의 정자이며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던 장소이다. 정조는 신하들과 연못에서 낚시 즐겼다고 한다.

부용정에서 바라본 부용지


사방으로 달린 부용정의 문을 열면 여러 경관이 보인다.

부용정 천장에는 문을 접어서 올릴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다. 접히는 문은 '들어걸개문'이라 하고, 쇠로된 장치는 '걸쇠'라 한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는 어수문이 자리하고 양 옆으로 취병이 늘어섰다. 어수문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처럼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철학을 보여준다.

취병은 조선시대 독특한 조경기법의 하나로 푸른 병풍처럼 만든 울타리다. 가림막 역할과 동시에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든다.

주합루의 취병은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의 그림을 토대로 '임원십육지 관병법'에 기록된 제작 기법대로 대나무 틀을 짜고 신우대를 심어 재현했다.

어수문에서 본 부용지

취병의 안쪽

주합루의 단청은 적색이 아닌 녹색이다. 심우경 교수의 말에 따르면 왕과 신하가 공부하는 곳이기에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화려한 적색은 지양하고 안정감을 주는 녹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디자인 개념인 만큼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주합루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주합루 2층에서 바라본 부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