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생각하는 자연예찬

그림 그리는 조경가_11회
라펜트l기사입력2014-01-28

조경은 식물과의 만남이다. 이들과 사람이 어떻게 조화롭게 만날 수 있는가를 끝없이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가 만들어 놓은 장이 조경인의 격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지구가 녹색별이고 그 근간을 이루는 녹색의 대부분은 식물이고 물이기 때문이다. 지구 표면적의 70%가 바다인 것을 감안할 때 이것들이 증발하여 대기 중에 머물다가 지표면을 적시는 과정을 반복하므로, 모든 생물을 키우는 역할을 하며, 식물들 또한 이것을 가지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증발시키기도 한다.


식물과 동물의 관계뿐 아니라 대부분의 생명체가 식물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풀만 먹고도 기름진 고기가 되는 채식동물이 있어서 육식동물들 또한 생명을 유지해 가고 있다. 그만큼 식물은 대단한 것이다.

 

괴테, 에디슨, 헤세 등 많은 위인들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갖고 있었고, 정원 가꾸기를 통해 식물을 관찰하는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식물에 대한 깊은 애정은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한 필수요건이라고 확신한다.

 


지구는 푸른 별이다.
그 속에 당신이 있기에 지구는
더욱 푸르다.


겨울
추운 겨울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활엽수들은 스스로 수분공급을 끊은 채 잎을 떨어트린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겉모습만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봄, 여름, 가을에 비해 변화를 느낄 수 없으므로 겨울은 식물들이 쉬고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 이들의 쉼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모든 쉼이 도약을 위한 것이겠지만, 이들 또한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며 뿌리를 키우는 일에 전념할 뿐 아니라,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풀은 씨앗을 떨어뜨리고 나무는 씨앗을 숨겨놓은 과일을 떨어뜨리지만, 어미그루로부터 어느 정도 멀리 보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만지면 톡 하고 터질 것 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 이 대중가요 가사 중 “톡하고 터진다.”는 봉선화 씨앗은 건드리지 않아도 씨앗이 익으면 톡 터지면서 씨앗을 튕겨 최대한 멀리 보내기 위한 노력을 한다. 특히 물봉선화 씨앗에서의 멀리는 물가를 좋아하는 생육특성상, 그 어미그루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미그루 근처에서 최대한 멀리를 의미한다. 이는 동물의 털에 붙어 전혀 다른 환경으로 이동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도깨비바늘, 도꼬마리와는 입장이 다른 것이다.

 

과일 속에 숨겨져 있는 씨앗은 동물들에게 과육을 주는 대신 씨앗을 멀리 보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어미그루 밑에 떨어진다. 지피식물의 씨앗 또한 그리 멀리 가지 못하는데 이 식물들은 몸에서 떨구어낸 잎이나 넘어트려진 줄기 등으로 자기 씨앗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도심에 심겨진 나무의 잎은 대부분 인도나 아스팔트 위를 몰려다니다가 미화원에 의해 치워지지만 환경이 좋은 곳의 식물들이 떨구어낸 잎사귀는 어미그루 근처에 쌓인다. 이렇게 세월이 지나면 제살 썩은 것이 제 몸에 제일 좋을지도 모른다. 낙엽은 씨앗을 보호하고 발아조건이 맞는 씨앗은 싹이 트지만, 그렇다고 살 수 있는 조건까지 갖춘 것은 아니다.

 

양지바른 산자락에는 눈을 녹이는 빛이 있어 춥지 않지만 빛을 받지 못하는 응달에도 눈이 녹지 않아 이불을 덮은 듯 춥지 않기에 평등한 것과 같이, 사실은 이들에겐 삶과 죽음 또한 평등하다.

 

식물들이 사람의 눈에 비쳐질 때 같은 종류끼리는 같아 보이겠지만, 이들 또한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르게 태어나 서로가 다르게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교육은 똑같은 교육, 문자 그대로 평등한 교육을 받고 사회가 요구하는 복제된 인간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즉 제도권의 교육방법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말이다. 필자는 아이들을 강남구 서초동에서 초등학교에 입학시켜 본 후 도저히 이와 같은 교육에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연이라는 스승”에게 맡기기 위해 지리산자락으로 이사했다. 이 아이들이 관악구에 있는 S대와 대전의 K대를 입학하고 졸업한 것으로 볼 때, 자연이라는 스승을 선택한 것에 한 치 후회도 없다.

도심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그 어떤 교육도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것만큼 깨달음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획일화 된 교육방법에 대한 대안이 없고, 또 다른 대안에 대한 결과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지금의 제도권 교육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너무 불안하고 확신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모두가 가는 길을 선택하여 함께 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모두가 가는 길을 간다고 해도 어린이는 물론, 중․장년층, 또는 죽음을 며칠 앞둔 사람들까지도 자연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라도 주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우주의 창조물이기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창의적인 것은 물론 사랑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은 스스로 만들어지고 치유되는 창조물이기에 아픈 이에게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 또한 갖게 하기에 자연과 가까이 해야만 한다.

 


지구는 지금도 쪼개지고 폭발하고 바다를 뒤집으며 살아있는 존재임을 알리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살아있는 것만을 생각한다. 물에 의해 모래가 이동하고 꽃이 피고지고 또다시 피어나고, 내가 숨 쉬고 있는 것 또한 지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생명현상의 장이다.
식물은 위대한 생명의 힘을 스스로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언젠가 길을 가다 화분 채 버려진 못난이 석죽을 발견하고,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버려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움직여 집으로 가지고 왔는데, 내 정원은 이미 식물들로 가득 차 있어서 좋은 자리는 심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도 여유 있는 장소가 그늘진 곳이었기 그곳에 심어두고 잊고 있었는데 얼마 후 이것이 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앗!! 그런데 얼마 후에 다시 보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늘이 싫었던 석죽이 빛과 가까운 쪽으로 넘어져 흙에 닿아 있던 마디에서 뿌리가 나오고, 그 뿌리가 제 몸을 지탱할 만 했던지 그곳에 자리 잡고 몸을 세웠던 것이다. 신비함, 미안함, 반성과 또 다른 느낌을 한꺼번에 갖는 순간 이었다. 이렇게 그 다음 해까지 1.5m을 이동해서 석죽은 자신의 터전을 확보하였다. 이처럼 작은 식물들의 신비로움은 끝이 없는데 끈끈이주걱은 0.0000008그램의 무게를 감지한다고 한다. 도자기보다 수십 배 방수능력이 뛰어나다는 연잎의 표면은 바깥세계와 교신하며 신속하게 또는 천천히 대응하는 기억소자를 가졌다고 확신할 수 있다. 동물보다 더 빠르고 안전한 식물들의 복원능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숲속에서 치유되게 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실제로 필자는 담낭암 판정을 받고 수술이 결정되었지만 심사숙고 끝에 “내 몸속의 암은 내가 만든 것이기에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병원을 나와, 일상생활을 바꾸고 자연과 더 가까이하며 치유되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완치가 되었음은 물론 전보다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의사의 오진이었을 것이다.” 라고 하지만, 내가 그 오진을 믿고 오판을 했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확률이 99%이다.

 


주행거리 376,502㎞, 암을 극복한 내가 건강한 지 확인할 수 있는 숫자이다. 차량을 구입한지 4년 3개월 된 내 차의 현재 주행거리다. 이것은 3만 7천을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닌 37만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만큼의 주행거리만으로도 한 사람의 드라이버가 먹고살만한 일의 양이다. 나는 그 이상의 일을 하므로 두 몫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지식으로 포장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자연과 단절시키고 있다.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자연물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에게 내재된 능력을 쓰레기처럼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내면에 잠재된 눈을 뜨기 위해서는 그 눈과 그것이 지시하는 사고를 인정해야 한다. 이를 통해 지식을 넘어서는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자연은 과학의 잣대로 재기에는 불가능한 생명현상의 장이다. 교육을 통해 훌륭해지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자녀를 원한다면 자연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어야 한다.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석연찮은 체험에 대한 문제점이다. 이 체험이라는 단어는 2000년에 들어서면서 10년 넘게 교육적 대세를 이루고 있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는 “왜? 체험은 중요한데…” 라고 생각하겠지만, 체험이 중요한 이유는 체험을 통해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체험행위는 체험을 판매하는 사람들에 의해 과정이라는 알맹이가 만들어지고 막상 체험이 요구되는 피교육자에게는 결과물만을 제공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들에게 체험을 제공하고 싶다면 이런 문제점을 생각해 보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자기주도 학습”, “체험” 등 시대가 요구하는 단어를 앞세운 상행위에 대해 부모들은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모아 놓아도 그 내용은 자연의 작은 부분에 해당하는 정도로 자연 속에 많은 답이 있다. 사람들 모두가 자연과 동화하며 영적 연결고리를 이어나갈 수는 없지만, 지금이라도 자연의 일원임을 자각할 때 자신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필자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도 무엇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연이라고 확답할 수 있다. 


 

조경인들이 다루고 있는 식물 또한 자연 그 자체이므로 이들로부터의 배움이 더 크다. 테이블에서 책만으로 공부하며 가르치는 스승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자연이라는 대안이 있음에도 이를 찾을 수 없다면 할 수 없지만…

 


자연은 주변 환경과 함께 늘 유기적이다. 거기에는 사람도 함께 한다.

 

 

연재필자 _ 정정수 소장  ·  환경조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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