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명사특강]서원우 박사의 나무와 문학[제3회]
시시(詩詩)한 나무이야기 ③5. 나무와 숲의 미학, 그 진·선·미의 심미성
봄을 맞이하려는 한 어리석은 사람이 봄을 찾아 하루 종일 온 산야를 신발이 닳도록 헤매었으나 결국 봄을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무심코 뜰 앞을 보니 봄은 이미 뜰 앞 매화나무가지 끝에 와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또 한 시름에 젖은 귀양살이의 나그네는 강 언덕 위의 정자에 앉아 이미 봄빛이 완연한 강산을 바라보면서도 봄의 정취를 느끼지 못했다는 두 당시(唐詩)의 이야기를 통해 봄을 맞이하려는 두 사람의 감흥을 비교하여 보면 전자는 봄을 오감(五感)으로 맞이하려 하였고, 후자는 오감이 아닌 제육감(第六感, 사물의 본질을 직감적으로 포착하는 마음의 기능), 즉 심감(心感)으로 봄을 맞이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꽃으로 웃고 잎으로 대화하는 소요(逍遙)와 사색(思索)의 계절이며, 우리가 생활하는 자연환경의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는 특히 산을 비롯한 나무와 숲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지각작용(知覺作用)인 오감(五感)에서 ‘약 87%는 시각(視覺)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지만, 특히 나무와 숲은 그 오감에 사물의 신비한 점이나 깊은 본질을 직감적으로 포착하는 마음의 기능인 제육감(第六感)을 더하여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키는 신(神)이 내린 완전무결한 미(美)의 화신(化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나무와 숲은 아름다움의 화신일까?
그 미학적 탐구는 철학의 영역에서 만나볼 수 있다. 우선 숲의 심미성을 임업경영에 처음으로 도입하고 시도한 독일의 삼림학자인 하인리히 폰 잘리쉬(1878)는 ‘삼림미학을 미(美)를 고려한 시업림(施業林)의 합리적 경영’을 주창한바 있다. 요즘 세계경제에서 경영학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 못지않게 임학에서도 이미 미를 고려한 경영의 합리적 실행을 하고 있었음을 감지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무와 숲은 물리적 형태성과 기능성 그리고 미학적 개념인 형식미와 내용미로 대별하여 생태성은 나무의 뿌리, 줄기, 가지로, 형식미와 내용미는 진리성과 도덕성 그리고 예술성의 미학적 개념으로 접근하여 볼 수 있다. 즉, 나무의 뿌리는 암흑의 땅속을 뻗어가는 진리의 근원이며, 줄기는 뿌리를 기반으로 바람직한 행동과 도덕성의 주간(主幹)으로 무성한 가지를 형성하고 이로인해 예술성의 미과(美果)를 완성하게 되어 우리가 추구하는 진∙선∙미의 극치를 표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바람직한 삶의 목표와 비교한다면, 진리탐구는 뿌리의 기능미로, 도덕적 가치추구는 줄기의 기능미로, 그리고 모든 예술적 가치기능은 가지의 잎과 꽃과 열매로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매일 정확한 산책시간과 일정한 코스에서 민들레꽃 색깔과 포도넝쿨이 감기는 것을 예의 통찰하고, 매일 같은 시간에 교회 종소리의 강약으로 그날의 기상을 예측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다 현대 글로벌 시대에서 기상학과 경영학의 융합화(融合化)가 시도되고 있는 추세도 과거의 사례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요즘 전 세계적인 걷기열풍도 마찬가지다. 보통 산책은 단순한 운동이지만 과거 소요유(逍遙遊)는 철학자의 사유(思惟)의 길이기도 했다. 프랑스 생물학자 이브 파칼레는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存在)한다”라고 ‘데카르트’의 존재론을 응용(應用)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이렇듯 자연, 특히 숲길은 소요의 길이며 사색의 길인 동시에 진·선·미를 발견하는 미학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목의 물리적 형태미와 내용미를 비유한 개념도(스케치 : 이승원)
수목의 뿌리-줄기-가지의 형태미와 고대 건축의 기둥양식을 비유하여 ‘숲은 자연 의지의 건축이고 건축은 인간의지의 숲’이란 연상작용이 표출된 개념도(위), 그리고 나무와 숲의 미학적 특성의 개념도(아래 / 스케치 : 이승원)
6. 삼월(辰月, 季春, 嘉月)의 솔버덩과 삼춘답청(三春踏靑)
서울 남산의 팔경(八景)가운데 제오경(第五景)으로 새봄맞이 들풀 밟기 놀이가 있었다. 지금은 산자락이 모두 잠식되어 도심의 외로운 섬이 되었으나 옛 남산 기슭은 솔버덩(소나무가 우거진 펀펀한 언덕)과 버덩(나무는 없고 풀만 우거진 들판)이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산을 떠받히고 있는 부드러운 산자락이었다. 그러한 새봄의 산야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들풀을 밟는 답청놀이로 겨울동안 움추렸던 심신(心身)을 풀며 특히 한해동안 발과 다리에 질병이 없고 액운을 막는 놀이가 있었는데 요즘 걷기운동을 장려하는 의학적 상식에 무속(巫俗)을 가미하여 독려하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풍속도(風俗圖)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광경은 조선 성종때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가운데 “들 구경일랑 오늘 하고 물놀이(浴沂)는 내일하세”라고 읊고 있어 그 정경을 감지할 수 있다.
삼월은 월건(月建)으로 진월(辰月), 계춘(季春) 또는 가월(嘉月)이라 하여 꽃이 피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절기라 할 수 있다. 정극인의 상춘곡에서 “버들잎 풀잎들은 보슬비에 푸르도다. / 중략 / 아침에 나물 뜯고 저녁에 고기 낚아 / 갓 괴어 익은 술을 배천으로 밭아 놓고 / 꽃나무 가지 꺾어 수놓아 가며 먹으리라" 라고도 읊고 있다.
우리 민족이 오천년의 질곡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독특한 ‘말, 글, 얼 (한글학자 최현배선생께서 주창하는 세‘ㄹ’찾기)’을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저변의 에너지원은 우리 산야에 자라는 산야초(山野草)를 식용으로 선별하여 이용하는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나물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없는 세계적인 식량 대 공황기에도 생존할 수 있는, 우리 민족만이 갖는 지혜라고 할 수 있어 봄풀 밟기 들놀이(三春踏靑)가 맹목적인 향락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상옥 시인의 사향(思鄕)에서는 “전략 /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라고 읊고 있는데 여기서 멧남새는 산나물의 방언으로 숲이 우거진 숲과 들에서 자생하는 신토불이 양질의 산나물이다.
들나물이 파랗게 자라나는 버덩이나 그 버덩에 소나무가 알맞게 자라는 솔버덩, 크고 작은 냇가에 자라며 새봄을 틔우는 버드나무 가족들이 이른 봄꽃들을 일깨우며 삼월의 꽃 마당 축제를 장식하는 강산은 우리의 향수서린 고향의 풍경으로 다시 찾아야할 영원한 고향의 나무들이다.
- 강진솔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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