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先塋) 아래 별서를 두어 자신의 이상을 펼쳤던 대전의 유회당(有懷堂)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13회
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5-31


先祖憂勤按度支 선조께서 탁지부를 맡아 노심초사 하실 제
戀鄕當日命圖斯 고향 그리시던 날 이 그림을 그리라 명하셨네.
一花一木模本意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모사한 본뜻은
某水某邱指點時 이 강물 저 언덕을 모두 가까이 두고자 함일세.
茂林修竹悱鋪祭 무성한 수풀 긴 대나무 늘어선 사이에
石層巖卉蒼涯 기이한 돌 겹겹의 바위 물가에 솟아있고
中有高堂棲息久 그 가운데 높은 집 있어 오래도록 기거할 만 하고
上膽先墓孝思追 위로는 선조의 묘를 바라보며 효심 키울 수 있어 좋다네.
-권이진(權以鎭:1668-1734)의 4대손 권감(權堪: 1760-1823)의 제무수동도(題無愁洞圖)-


유회당내원(김영환.2014): 유회당과 선영의 현재의 모습을 진경산수화기법으로 그렸다.

유회당(有懷堂)은 조선 중기의 문신 권이진(權以鎭:1668-1734)이 대전시 보문산 남측기슭 무수동 마을 뒷산에 선묘(先墓) 자리를 잡은 후 1708년 건립한 별업형별서(別業型別墅)이다. 별업형 별서란 조상의 뜻을 받들면서 살기 위해 선영(先塋)근처에 지은 가택이나 정자를 말한다. 유회당이 있는 무수동(無愁洞)은 원래 ‘무쇠골’로 부르던 곳인데, ‘무수천하(無愁天下)’라고 해서 ‘하늘아래 근심 없는 마을’로 일컫는다. 권이진의 큰아버지 무수옹(無愁翁) 권기(權愭)가 정착하면서 안동권씨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고 마을 이름도 그의 호를 따 ‘무수(無愁)’라 하였다. 무수동은 보문산 남쪽계곡사이에서 발원한 세 줄기의 물길이 만나 너른 들을 이루고, 야트막한 산들이 아늑하게 감싸있어 아름답고 풍요로운 경관을 보여준다.


유회당의 위치도좌측으로 갑천과 유등천,우측으로 보문산과 대청호가 보인다.


선영에서 본 무수리 마을풍경(겨울)

무수동은 원래 물과 무쇠가 풍부하여 무쇠골(일명 水鐵里)이라 불렀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기도 하지만 다수의 문화재가 잘 보전되어있고 산신제(山神祭)등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가 전승되어 온 대전의 전통마을이다. 여기에는 안동권씨 종가가 있고, 영조 때 호조판서와 관찰사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의 별서고택이 있어 장소성이 빛난다.

권이진은 공주사람 권유(權惟: 1633-1704)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22세까지 외조부인 우암 송시열(1607-1689)에게 사사받았고, 고모부인 명재 윤증(1629-1714)과는 사승(師承)관계를 맺었다. 1968년 임금이 성균관에서 직접 시행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동래부사, 승지, 판서, 관찰사 등 요직을 거쳤다. 1728년 호조판서로 있을 때는 “궁중에서 민간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 것, 공물을 정해진 액수 이상으로 거두지 말 것” 등 을 건의할 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고 성격이 강직했다. 문집으로 유회당집(有懷堂集)이 전해지는데, 여기에 수록된 무수동기(1689),반환원기(1714),명당실기(1719-1725), 하거원기(1727)와 무수팔경도(無愁八景圖)등에는 마을의 산수체계는 물론 유회당원림(何去園)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무수팔경도는 권이진이 호조판서로 재직시( 1729년경) 자신의 집이 있는 무수동 경승(無愁洞景勝)을 화공에게 그리게 한 것이다. 무수당팔경도는 총8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 첫째 폭이 유회당과 여경암을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안동권씨의 종택과 별서를 중심으로 주변의 경치를 묘사함으로써 옛 대전지역의 모습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유회당전경이곳에서 뒤편좌측에 선영이 있고 오른쪽으로 1키로정도 산길을 오르다보면 기적처럼 여경암과 거업재란 또 하나의 별서가 나타난다자손들을 교육시키던 서당성격의 건물이다.     



유회당의 외원도(김영환.2014): 유회당과 선영 여경암과거업재를 포함하는 유회당의 별서권역 전체를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그렸다.


유회당에는 좌측의 기궁재(奇窮齋), 뒤편의 삼근정사(三近精舍)가 나타나 있고, 선영 묘역으로 들어가는 협문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하거원의 주요 건물인 유회당(有懷堂)의 당호는 ‘명발불매유회이인(明發不寐有悔二人)’이란 명나라 전겸익(錢謙益:1582-1664)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품고 살려 한다.’ 는 뜻이다.


유회당에서 본 연못과 충효문(여름강충세.2013)

그 외에 이곳에는 기궁재(奇窮齋), 유회당판각(有懷堂版閣), 선영묘역, 여경암(餘慶菴)과 거업재(居業齋)가 있으며 정원요소로는 활수담, 화계, 석연지, 노거수로 배롱나무와 노송 등이 있다. 유회당은 충효문을 지나 활수담 연못을 통과하면 화계가 펼쳐지는 높은 기단 위에 위치하고 있다. 유회당의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형태로 난간으로 둘러쳐진 툇마루가 있고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은 구족재(求足齋), 우측은 불기재(不欺齋)의 온돌방을 두었다. 유회당집 동쪽으로는 납오지(納汚池), 수만헌(水慢軒) 동쪽으로는 활수담(活水潭)을 조성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활수담 연못과 돌다리는 후대에 위치를 변경하여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선영아래 낮은 잡석기단위에 조성한 ‘ㄱ’자형 안채의 아늑함, 주변이 잘 내려다보이는 유회당 정자와 활수담 연못, 노송과 석연지가 있는 후원, 크지 않은 사당과 협문이 주변자연과 잘 어울린다.


유회당원경(강충세.2013)


충효문에서 본 연못과 유회당(강충세.2013)

유회당집을 근거로 이곳의 건물과 정원 조성과정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1714년 조성되었다는 반환원(盤桓園)은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서성이네(撫孤松而盤桓)’ 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뜻을 취했다. 삼근정사(三近精舍)는 숙종 41년(1715)에 세운 건물이다. 삼근(三近)은 ‘선친의 묘, 동쪽 골짜기의 시냇물과 바위, 남쪽의 풍광이 좋은 언덕 꽃동산 등 3곳을 가까이 하고자 한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 건물은 대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별업형별서의 시묘건물(侍墓建物)로서 존재가치가 높다. 건물 내에는 수만헌(收慢軒), 하거원(何去園)이란 현판도 같이 걸려있다. 집에서 뒷동산 계류를 따라 샘에 이르는 오솔길에는 복숭아를 심어 도경(桃景)을 만들었고 샘 위쪽 계곡에 돌을 쌓고 모래를 채워 깨끗한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1719년(51세)에는 유회당을 증축했고, 1727년(59세)에는 반환원을 확장하여 하거원을 완성했다. 선영 아래 유회당 동쪽에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납오지(納汚池)를 파고 소나무의 절개를 귀하게 여긴다는 고수대(孤秀臺)를 만들었다. 계류에는 돌다리를 만들고 흙을 쌓아 오덕대(五德臺)라 하였으며, 납오지 서쪽에 대나무가 운치 있게 자라는 죽천당(竹遷堂)을 두었고 수미폭포를 만들었다. 뜰 서쪽에는 1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널따란 돌을 배치시키고 매화나무가 매룡(梅龍)을 이루어 정자역할을 하게 하였다.


유회당후원과 삼근정사(여름강충세.2013): 과거에는 후원 우측계곡에 납오지수미폭포장교석가산(12)등을 조성하여 운치를 더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뜰 가운데에는 사방 3척 크기의 연지를 만들어 장우담(丈藕潭)이라 하였고 납오지 동쪽에는 활수담(活水潭)을 만들었다. 계류를 건너기 위해 돌로 된 장교(長橋)를 도입했고 솥 크기의 샘인 몽정(夢丼)을 만들고 몽정 남쪽언덕에 높은 바위를 잘라 해돋이와 해지기를 감상할 수 있는 배경대(拜景臺)를 조성했다. 활수담 서쪽에는 방교(方橋) 동남쪽 주위로 괴이한 돌을 주워 12봉 가산을 만들었다. 묘원은 수만헌(收慢軒)에서 북쪽으로 270m 거리에 위치한다.

하거원기에 의하면 ‘예기‘ 곡례편에 근거하여 하거(何去)라는 의미를 차용하였는데, 묘역과 하거원의 관계성을 “이곳은 선대의 묘소가 있는 곳이니, 어찌 이곳을 버리고 떠나겠는가? 천석(泉石)은 논할 바 아니고 떠나지 않음을 즐거워하려 함이네.”라고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 이곳 묘역은 유회당의 부친 권유(1625-1684: 우암송시열의 사위)뿐만 아니라 안동권씨 종중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안동권씨 선영(선영)


권이진묘역에서 본 유회당과 무수동마을(강충세.2013)

한편 마을 북동쪽 산록에 위치한 여경암(餘慶菴: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18호)과 거업재(居業齋)는 권이진이 유회당과 1키로정도 떨어진 곳에 별도로 조성한 것이다. 여경암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자제와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지은 여경사(餘慶寺)’ 에서 이름 붙여진 것이고, 거업재는 ‘춘추정신을 깨닫고 올바른 군자의 길을 걷게 한다는 뜻’ 으로 이름 지어졌다. 여경암은 정면 5칸 측면 3칸에 2칸씩을 덧붙인 ‘ㄷ’자형이고 거업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ㅡ’자형이다.


여경암이곳은 신축당시에는 권이진 본인과 가족들을 위한 쉬는 장소로서의 은일형 별서였으나 지금은 암자의 성격으로 변하였다. 



여경암의 겨울

오늘날 거업재는 별업형 별서인 유회당과 차별화시켜 자녀교육을 위한 서당으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여경암은 어떤 연유인지 암자로 변하였고 산신각까지 두어 이곳에서 매년 마을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원래의 한적한 별서의 기능에서 용도가 변질된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러나 여경암(餘慶菴)과 거업재(居業齋)는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심리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 있고, 차경효과(借景效果)가 압권이어서 별서로서는 더 할 나위 없이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거업재(강충세.2013): 본 건물은 자녀들의 교욱을 위한 서당건물로 쓰였다뒤로는 여경암이 보인다.

유회당으로 가는 길. 그 길은 번듯한 양반가, 양반가의 속살을 보러 찾아가는 길이다. 마을 한가운데 종가집이 있고, 거기서 산 중턱을 오르면 온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별업형 별서가 우뚝 서 있다. 앞으로는 연못과 화계가, 뒤로는 커다란 소나무를 비롯한 후원이 전개되고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 신축되어진 정사건물이 각종 현판과 함께 존재한다.

협문을 통해 선영 묘역으로 가는 길. 거기에 가서 효를 바탕으로 강직하게 살다간 선비 앞에 큰절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조언을 구하고 싶어진다. 선영에서 바라보는 무수리마을. 산으로 첩첩히 싸인 마을. 마을 한가운데로 시냇물이 흐르며 농촌의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묘역에 참배하고 여경암과 거업재로 돌아 올라가는 길. 그 길은 다소 험하지만 신선의 세계로 진입하는 길이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기적처럼 나타나는 거업재와 여경암. 이곳은 별서중의 또 다른 아늑한 별서이다. 여기야말로 한가로이 휴식할 수 있고, 여유롭게 학문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세상사 복잡한 것 다 잊고 사색할 수 있는 곳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 마다 갈아입는 수목의 빛깔 따라 너무도 싱그럽고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여경암 후원에서 본 외부차경(강충세.2013)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별업형 별서로 최고의 기품과 덕목을 갖추고 있는 유회당(有懷堂). 그러나 몇 가지 시정되어야 할 사항은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 마주치는 활수담의 인위적인 석재난간은 은은하게 때가 낀 목조다리로 개조되어야 한다. 무수동 팔경도에 나와 있는 수만헌 지역의 납오지, 수미폭포, 석가산등의 정원은 옛날 모습으로 복원되어야 한다. 낡은 삼근정사와 기궁재 건물은 정밀한 보수가 필요하며, 여경암 지역은 거업제와 함께 순수한 서당 건물로 복원되어야 한다. 그리고 후손이든 관리인이든 누군가 들어와 살 수 있도록 유지관리차원의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별업형(別業型)으로서 원형이 잘 남아있는 별서 유회당이 이제 대전시문화재가 아닌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가문화재로 거듭나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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